회암사지를 둘러보고 회암사의 옆에 있는 회암사지 3대화상(三大和尙)의 부도와 석등, 그리고 탑비를 보러 올라갑니다. 3대화상은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을 말하는데, 세분의 부도와 석등, 탑비가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회암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멋지게 휘어진 소나무는 마치 이곳을 드나드는 분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듯합니다.
▼ 회암사의 일주문은 단청을 입히지는 않았지만 화려하고 현판에는 금장을 입혀서 화려함을 더 합니다. 여기서 회암사까지는 꽤 먼거리로 600~700미터로 추정이 되는데, 평일이면 차를 타고 올라가면 되겠지만, 주말에는 여기서 걸어서 가야만 합니다. 회암사 아래 공터에 주차할 공간이 5대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평일에는 길가의 적당한 곳을 찾아서 주차 후에 조금 더 걸어가면 됩니다.
※ 자료사진은 문화재청, 경기문화재연구원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회암사입니다. 천보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회암사는 조선 초기의 회암사의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3대화상(三大和尙)의 부도와 석등 및 탑비는 대부분 오른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의 회암사와 3대화상 부도군은 어떻게 회암사지 위쪽에 자리를 잡았을까 하는 생각에 여러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원래의 3대화상의 부도와 비는 회암사지 복쪽의 산비탈에 있었는데, 1821년(순조 21)에 광주의 유생 이응준이 지관의 말에 따라서 아비의 묘를 쓴다고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를 부서 버리고, 사리를 훔친 후에 그곳에다 자신의 아비를 묻었다고 합니다(이 자료에 따르면 3대화상의 부도와 비는 처음부터 현재의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 하였고, 조정에서는 유생 이응준은 섬에 귀양을 보내고, 묘는 파묘하였으며, 관리부실로 양주목사를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그 후 1828년에 다시 비를 중수하였고,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회암사지 옆에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습니다.
지금의 회암사는 1977년 호선(昊禪)스님이 큰법당을 지으면서 현재의 회암사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설에 따라서, 명당이라면 절터나 탑지 등을 빼앗는 일은 많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에 불을 질러 빼앗고 아비의 묘를 이장하였으며, 안성의 칠장사는 지방 부호가 절터를 빼앗고 묘지를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방의 힘 꽤나 쓰던 유생들이 왕실 대대로 인연이 있던 회암사에 불을 지를 정도면, 알려지지 않는 방화는 부지기 수였을 것입니다.
▼ 회암사를 중심으로 3대화상의 부도 및 석등의 위치를 표시하였습니다. 2번 선각왕사비는 회암사의 왼쪽에 있습니다.
회암사지 옆의 산 능선에 일렬로 부도를 세우는것은 보기 드문 일로 마치 민가의 선산처럼 선대, 후대 순으로 묘를 쓰는 것처럼 보입니다.
▼ 3대화상(三大和尙)의 진영을 보겠습니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찍은 사진인데, 어느 사찰에서 찍은 것이지 알 수 없습니다. 왼쪽이 무학, 중앙이 지공, 오른쪽이 나옹입니다.
3대화상(三大和尙)의 진영이라는 그림은 조선시대의 3대화상이 관련된 사찰에는 대부분 모셔져 있는데, 모습은 많이 다르게 보입니다.
▼ 양주 회암사지박물관의 자료사진으로서, 3대화상 진영입니다.
▼ 여주 신륵사 조사당의 3대화상 진영입니다.
▼ 먼저 무학대사비를 보겠습니다. 보통은 유명한 스님이 입적을 하게 되면 부도(승탑)를 만들어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고 얼마 후에 부도의 주인공에 대한 일생과 업적을 기록한 비를 세우는데, 대개는 부도와 탑은 항상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무학대사비는 무학대사의 부도의 아래에 있습니다.
원래의 무학대사비는 조선 순조21년(1821년)에 파괴되어 없어졌고, 지금의 비는 순조 28년(1828)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무학대사비 옆에는 깨진 비좌(碑座)가 놓여 있는데, 아마도 원래의 무학대사비좌인것 같습니다.
▼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것 처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습니다. 조선 건국을 전, 후로 해서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자료를 찾아보면 무학대사는 경남 합청에서 출생(1327~1405)하였고, 속세의 성은 박씨(朴氏)로 18세(1344년)때 출가하여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金剛窟)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다가, 이미 원나라에 먼저 와 있었던 혜근(惠勤;나옹)과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 무학대사비 옆의 비신이 없는 구 무학대사비의 비좌를 보면 복련 형태로, 비신을 받쳐주던 모서리는 깨졌지만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비좌위에 있는 석재는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는데, 무학대사비의 지붕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비좌위에 올려져 있는 거북이 모양의 뒷모습과, 앞모습인데, 마치 거북이의 꼬리와 머리처럼 보입니다. 비신의 지붕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다음은 무학대사의 승탑과 석등입니다. 승탑 앞에 석등이 세워져 있는데, 보기 힘든 쌍사자석등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졌습니다.
▼ 옆에서 보는 무학대사승탑과 쌍사자석등의 모습입니다. 석등을 자세히 보면 화사석의 측면 화창이 막혀 있는데, 보통은 4방으로 뚫린 화창이 대부분인데, 좀 특이합니다.
승탑은 사방이 8각의 지대석을 깔고, 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판석을 둘렀습니다. 더구나 난간석까지 둘러서 마치 왕릉 축소판을 보는 듯합니다.
무학대사승탑과 쌍사자석등은 무학대사가 입적 후 2년 후인 태종7년(1407년)에 세워졌습니다.
유생 이응준이 순조21년(1821년)무학대사비는 파괴하였지만, 다행히 승탑은 파괴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 무학대사승탑은 물론 승탑 앞의 쌍사자석등도 일반적으로 보기 어려운 쌍사자석등으로 만들어 최고의 예우를 다한 정성이 느껴집니다.
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때 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왔으며, 법주사 쌍사자석등,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석등으로 남아 있습니다만, 그리 흔하게 보이는 석등의 형태는 아닙니다.
▼ 석등을 옆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화사석의 측면 화창은 막혀 있습니다 사자의 갈기와 꼬리는 화려한 문양으로 치장하였습니다.
▼ 다음은 무학대사의 승탑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자료에서 보면 이 승탑은 무학대사가 살아 있을때인 태조 6년(1397년)에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며, 무학대사가 입적 후 2년 후인 태종 7년(1407년)에 사리를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 승탑은 전체적으로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졌는데, 특히 탑신의 용의 문양은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만 승탑의 중대석 이하는 가려서 볼 수 없는것이 아쉽습니다.
▼ 승탑에 팔각의 담장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자료사진으로 알아봤습니다.
몸돌의 모양은 구름속에서 근육질의 용이 노려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람처럼 너무 과장하여 표현하였습니다.
▼ 하대석과 상대석은 연꽃잎 문양으로 각각 앙련(仰蓮),복련(覆蓮)으로 처리하였으며, 중대석의 문양은 연꽃 봉우리처럼 보입니다.
▼ 산 능선의 중간에 있는 지공선사부도비와 부도탑, 석등이 차례로 서 있습니다. 지공선사비도 1821년(순조 21)에 부서져서 1828년(순조28년)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 순조28년에 세운 지공선사비 옆에는 원래의 비좌와 지붕돌이 남아 있습니다.
▼ 자료사진은 일제강점기 때에 찍은 지공선사비와 부도 그리고 그위에 소나무숲 가운데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보이는 유리건판사진입니다. 귀부는 지금의 지공선사비 보다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지공선사비 옆에 옮겨져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3대화상의 부도와 비는 원래부터 회암사지 북쪽, 즉 지금의 자리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인터넷의 개인용 자료에서 보면, 이 부도들은 1977년 회암사지 근처에서 스님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하는데, 흑백사진은 일제강점기 때 찍은 사진이므로 1977년에 부도를 옯겼다는것은 잘못된 자료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사진자료는 e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지공선사의 부도와 그 앞의 석등입니다. 부도탑은 팔각원당형으로 안정된 모습이지만, 석등은 투박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인도의 승려 지공이 회암사에 다녀간 것은 이해가 되지만, 사리탑이 왜 회암사지 뒤편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지공선사는 고려 충숙왕13년~15년(1326~1328년)까지 고려에 머물면서 여러 사찰을 방문하였는데, 그중에서 회암사는 지공이 불법을 알린 중심도량이어서 부도를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은집에서 지공은 원(元)나라의 왕륜사에서 1363년(공민왕 12년) 11월에 입적을 하였는데, 1370년(공민왕19년) 11월에 왕이 친히 왕륜사에 가서 불치와 두골(頭骨)을 머리에 이고 고려에 옮겼다고 합니다.
지공의 유골은 양주 회암사, 묘향산 안심사, 장단(개성) 화장사등 세 곳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지공선사의 유골이 부도탑에 정식으로 안치된 시기는 지공선사비가 세워진 1378년(우왕4년) 보다는 앞선 시기 즉 공민왕19년(1370년)때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은 부도가 만들어지고 몇년이 지난 후에 비가 세워지는 것을 추정하여 보면 그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 지공선사의 석등을 보면 화사석의 화창 측면은 막혀 있고, 앞, 뒤 양쪽 즉 2면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 석등을 보면 마치 탑을 쌓은듯한 모습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 승탑은 전형적인 고려말의 팔각원당형 승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만 지대석과 탑신, 갑석의 둘레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옥개석의 8각 꼭지 부분에는 보주처럼 생긴 원형 돌기가 보입니다.
▼ 승탑, 석등, 비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서 마치 계획적으로 부도를 조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3대화상의 부도 중에서 지공선사의 부도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그다음에 나옹선사, 그리고 무학대사 순입니다.
▼ 다음은 산 능선의 맨 위쪽에 있는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입니다. 비(선각왕사비)는 왼쪽의 산 능선에 있습니다
▼ 언뜻 보면 밑에 있는 지공선사의 승탑과 석등을 보는 듯이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입니다
▼ 나옹선사의 부도는 하나가 아니라 현재 3곳에 나뉘어 있습니다. 부른 명칭은 다르지만 전부 나옹선사의 사리를 보관하는 탑인데. 지금의 회암사지승탑, 여주의 신륵사종탑, 원주 영전사 보제존자탑(국립중앙박물관)등 입니다
▼ 지공선사의 부도와 석등의 구분이 쉽지 않아서 사진으로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대체로 나중에 만들어진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이 부분적으로 살짝 다른데, 크게 다르게 보이는 부분은 옥개석의 반전입니다. 지공의 옥개석은 반전이 없이 그냥 평면적인데, 나옹의 옥개석은 반전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 현재 회암사의 왼쪽 능선에 있는 선각왕사비입니다. 선각왕사는 고려국왕이 나옹선사에게 왕의 스승이라는 직위를 내린것으로 불교국가였던 고려태조 왕건 때부터 왕사 제도가 시행되었습니다.
조선 때는 태조 이성계에 의해 무학대사가 왕사가 되었지만, 그 이후로는 불교를 배척하는 유교이념의 국가였으므로 단 한 명도 왕사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왕실이나, 민간에서 불교가 사라지지는 않았고,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 고려 우왕3년(1377년)에 여주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하였으며, 입적 후 선각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입적후 그다음 해 비를 세웠는데, 1997년 산불로 인해서 비의 보호각은 불타버리고 비도 심하게 파손되어 1999년 모조비를 세웠습니다. 깨진 선각왕사비는 현재 보존 처리 후 경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 과거와 현재의 선각왕사비를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 1997년 천보산의 산불이 얼마나 심했는지 자료사진을 보겠습니다. 현재 비좌의 모습도 부분적으로 많이 깨졌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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