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군의 미산면 마이리의 임진강 옆에 있는 숭의전(지)에 들려 보았습니다. 숭의전지는 고려시대에는 왕건의 원찰로서 앙암사(仰巖寺)였으며, 조선태조6년(1397)때 이 자리에  고려태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건립한 것이 숭의전의 시초이며, 고려 태조(왕건)와 3명의 고려의 왕, 그리고 공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配享)하는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총 5차례의 보수,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한국전쟁 중에 불타버린 것을 1973년에 재건하게 되었습니다.

※ 자료사진은 문화재청과 e-뮤지엄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입구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마셨다는 샘, 어수정(御水井)이 있으며, 가끔 물을 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 숭의전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입니다. 보통은 높다란 홍살문이 있는데, 숭의전 입구에는 없습니다. 옛날 사진을 보면 홍살문이 있었는데, 어는날 부터 없어졌습니다.

 

▼ 고즈넉한 분위기에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고목에는 새순이 싱그럽기만 합니다

 

▼ 숭의전의 내력과 배치도 입니다.

숭의전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았습니다.

 

1451년(문종 1)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4 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凞),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충(趙冲),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토록 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고려 현종의 먼 후손을 공주에서 찾아서 순례(循禮)라는 이름을 내린 후 부사(副使)를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_ 연천군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문화재청의 사진자료입니다.

 

▼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태조 6)에는 앙암사를 폐하고,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_ 연천군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숭의전에서 제사를 받드는 네 분의 왕들을 붉은 네모상자로 표시하여 보았습니다. 태조를 제외한 세분 왕들의 배향원칙은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인 문치주의에 부합하는 왕들만 골라서 배향하게 되었습니다.

 

▼ 전체적인 모습이며, 각 건물별 용도를 알아보겠습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崇義殿, 4왕의 위패를 모신 곳)을 비롯하여,

- 배신청(陪臣廳, 고려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 이안청(移安廳,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 전사청(典祀廳,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는 곳),

- 앙암재(仰巖齋,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 폐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內神門), 외신문(外神門), 협문(夾門) 3동, 운조문(雲鳥門)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마전군 읍지(麻田郡 邑誌)에 의하면 1899년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는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 이안청, 향배청, 전사청, 주방 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_연천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먼저 앙암재(仰巖齋)에 들어가 봅니다 

 

▼ 앙암재(仰巖齋)는 보통 재실이라고 하는 곳이며. 제례 때 사용하는 향(香), 축(祝), 폐(幣)등을 보관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제례준비를 하며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를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 향(香)은 제사때 피우는 향이고, 축(祝)은 제사때 읽는 축문이고, 폐(幣)는 제사때 바치는 천(비단)입니다. 제사가 끝나면 축문과 천은 태웁니다

 

▼ 앙암재의 왼쪽 방에는 헌관실(獻官室)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고, 방안에는 두장의 사진이 보이는데, 하나는 북한 개성에 있는 고려태조 왕건의 릉인 현릉(顯陵)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태조 왕건의 동상입니다.

 

헌관(獻官)은 제사때 술잔을 올리는 제관(祭官)들을 말하며, 보통 술잔을 세번을 올리는데 잔을 올리는 순서에 따라서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으로 부릅니다. 

 

▼ 고려태조의 현릉과 왕건의 동상의 사진인데, 왕건의 동상은 대한민국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할 때의 모습으로 중간 부위는 가려져 있습니다.

 

▼ 앙암재에 있는 고려태조 현릉과 고려태조 왕건의 동상 사진이 있어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문화재청자료] 개성에 있는 고려태조의 현릉을 복원한 사진인데, 보기에는 너무 크기도 하고, 너무 화려한 느낌이 듭니다만,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문화재는 원형 그대로 복원해야 그 가치가 계승되는것인데, 사진으로 보는 현릉은 너무했다는 생각입니다.

 

▼ [e_뮤지엄 자료사진] 고려태조의 현릉을 일제강점기에 찍었던 유리건판의 흑백사진입니다. 사진에서 보면 전형적인 조선왕릉의 모습을 보는듯 전혀 이질감이 없는 모습입니다. 재실이 있고, 비각과 정자각등이 마치 조선왕릉을 보는듯합니다.

 

▼ 다음은 고려태조 왕건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인터넷의 여러 자료들을 보면  왕건상은 북한에서 1992년 현릉을 확장공사를 하면서 봉분 주위를 포크레인으로 팔때 2미터 깊이의 땅속에서 석판이 나왔는데, 이를 무시하고 그냥 작업을 하다가 포크레인 삽날에 동상이 걸려 나왔다고 합니다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공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 강점기때도 일본X들도 이런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동상에는 채색이 되어 있었고 비단 부스러기들이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동상을 깨끗이 닦아버려서 더 이상의 학술적인 조사가 불가능하였다고 하며, 또한 북한 학자들은 이 동상을 그냥 일반적인 청동불상으로 생각하여 개성고려박물관에 전시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사진상으로 봐도 불상이라는 근거로 보일만한 흔적은 많이 부족해 보이는데, 현릉을 발굴하는 행태나 왕건동상을 일반 불상 정도로 처리하는 북한 문화재 학자들의 식견 수준이 매우 걱정스러운 수준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남북의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학자들의 교환방문이 있었을 때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이 동상이 왕건상인 것을 밝히면서 왕건상이 제작된 지 560년 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왕건동상은 고려 광종 2년(951년)에 제작되었고 이후 개성 봉은사(奉恩寺)의 태조진전(太祖眞殿)에 봉안하고 왕실의 제례용 상징물로 사용되다가 고려가 망하자 마전현(지금의 연천군의 일부)의 사찰(앙암사로 추정)로 옮겨졌으며, 세종 11년(1429)에 왕건동상은 현릉 옆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왕건의 나체 동상과 아랫도리를 가린 동상 사진이 있는데, 오른쪽의 사진은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왕건상을 전시할 때 북한 측에서 하부를 가려달라고 해서 가리고 전시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평양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합니다.

머리관은 황제가 쓰던 통천관(通天冠)이라고 하며, 고려태조 현릉 옆에 매장할 때는 황제 복식으로 꾸며서 매장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이제 앙암재에서 숭의전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마주 보이는 문은 전사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 숭의전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문은 제사를 지낼 때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보입니다.

 

▼ 숭의전의 삼문이며, 문은 이름은 천경문이라고 합니다.

 

▼ 숭의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삼문으로 지었습니다. 현판에는 문의 이름을 목판에 양각으로 한문으로 새겼는데, 아무리 봐도 가운데 한자는 천수문입니다.

 

각종 인터넷 자료에는 천경문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경자는 아니고 수(授)자 입니다. 제 생각에는 천경문이 아닌 천수문(天授門)으로 보입니다.

 

고려 태조는 황제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천수(天授)로 하였는데, 즉 태조 원년은 천수(天授) 원년이 됩니다. 하늘이 주신 나라 고려였습니다.

아마도 조선때에는 천수문(天授門)이라는 현판을 달지 못했을 것입니다.

 

삼문은 사당 경내에 있으므로 보통 내삼문(內三門)이라 하며, 가운데 문은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고, 새롭게 모실분의 위패가 들어올 때나, 제사를 지낼 때만 개방을 하며, 사람들이 문을 드나드는 방법은 동입서출(東入西出)로서, 동쪽으로 들어와서 제사를 지내고 서쪽으로 나갑니다. 

 

▼ 고려태조와 세분의 고려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숭의전입니다. 사당이므로 계단도 세 개로 나뉘어 있으며, 뜻은 삼문과 똑같습니다.

 

가운데 계단은 신도이므로 뜻을 아시는 분들은 저 가운데 계단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가끔 가운데 계단(신도)으로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관들도 동쪽 계단을 이용해서 오르고, 내려올 때는 서쪽 계단을 통해서 내려옵니다

 

▼ 가운데 계단은 신도(神道)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아니므로 이 계단으로 다니지 말라는 표시입니다

 

▼ 숭의전 오른쪽(동쪽)에 보면 관세위(盥洗位)라도 새겨진 돌판이 보이는데  즉 제사를 올리기 전에 제관들이 물로 손을 씻는 대야입니다.

 

▼ 숭의전 왼쪽(서쪽)의 담 밑을 보면 망료위(望燎位)라고 새겨져 있는데, 제사를 끝내고 축문을 태우는 곳입니다

 

▼ 숭의전 내부를 보겠습니다.

 

▼ 숭의전 내부를 넓게 바라보겠습니다. 중앙에는 고려태조, 좌우로는 나머지 세분의 고려왕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조선초기 태조6년(1397)에 태조왕건의 위패를 모셨으며, 조선2대 정종1년(1399)에는 고려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만, 세종7년(1425)에 조정에서는 조선의 종묘에는 5왕(五王)을 제사하는데 고려조의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습니다.

 

조선이 고려를 멸하고, 고려 유민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고자 사당을 세우고 고려의 왕들의 위패를 모셨지만, 내심 고려의 왕들까지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일이 반갑지만은 않은 성리학으로 무장한 왕이나, 대신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당의 축소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조선의 입맛대로 숭의전에 모실 8왕의 고려왕들 중에서 4왕을 선별했는데, 태조를 제외한 세분의 왕들은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 문치(文治)에 부합하는 왕들만 골라서 위패를 모셨습니다.

1) 태조(1대) : 고려를 건국한 왕이므로 당연히 모심

2) 현종(8대) : 고려의 문치주의를 확립한 왕

3) 문종(11대) : 고려의 문물제도를 크게 정비하고 고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4) 원종(24대) :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왕

 

▼ 숭의전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배신청입니다.

 

▼ 배신청과 이안청은 같은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 이안청(移安廳)은 위패를 잠시 모셔두는 곳입니다. 숭의전에 보수공사가 있거나, 청소를 할 때는 위패를 이안청에 참시 모신다고 합니다.


▼ 배신청(陪臣廳)입니다, 고려의 개국공신 4분과 12공신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 내부입니다.

조선 문종 원년(1451)에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이라 이름 지었으며, 이미 위패를 모신 고려 4왕 외에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배현경(裵玄慶), 서희(徐凞),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김취려(金就礪), 조충(趙冲), 김방경(金方慶),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정몽주(鄭夢周)등을 배향토록 하였는데, 그곳이 배신청입니다 _ 연천군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숭의전 배신청에 배향된 고려의 공신 16위에 대한 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포털사이트에서 인용)

 

1) 복지겸(智謙) : 고려의 개국공신 ·기병대장.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 고려를 세우게 했으며, 환선길의 반역 음모를 적발, 주살했고 임춘길의 역모도 평정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2) 홍유(洪儒) :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개국1등공신이 되었다

 

3) 신숭겸(申崇謙) : 개국공신이며,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그를 구하고 전사하였다.

 

4) 유금필(庾黔弼) : 홍유와 같은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서 개국초기에는 존재감이 없었으나, 북방야인들을 침략에 맞서 굴복시키면서 왕건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후백제를 항복시킨 최고의 공신이었다.

 

6) 서희(徐凞) : 무신은 아니지만 거란에 맞선 우리 역사상 가장 유능했던 외교관

 

7) 강감찬(姜邯贊) : 거란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뛰어난 작전을 바탕으로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 후 도읍 주위에 나성을 쌓고 국경에 천리 장성을 쌓았다.

 

8) 윤관(尹瓘) : 정벌군의 원수로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했다 하지만 여진의 9성의 환부와 강화를 요청했고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9) 김부식(金富軾) : 고려의 문신이며. 문벌귀족으로서. 삼국사기의 저자로 유명하며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이후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한 대표적 권신.

10) 김취려(金就礪) : 고려 고종 때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무신

 

11) 조충(趙冲) : 고려 후기때 문신으로 거란군의 침략을 여러차례 잘 막아냈다.

 

12) 김방경(金方慶) : 고려의 무신으로, 몽골군에 대항하여 물리치기도 했지만, 여몽 연합군으로 일본정벌에 나서기도 하였고, 삼별초를 진도에서 진압하였다.

 

13) 안우(安祐) : 고려후기의 무신으로 공민왕(1년)때 최영등과 함께 조일신의 난을 평정했으며,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주살하여 1등공신에 봉해졌다

 

14) 이방실(李芳實) : 공민왕때 홍건적의 1차, 2차 침략을 잘 막아내었으나, 간신(김용)의 모략으로 살해당했다.

 

15) 김득배(金得培) : 고려말의 무신으로 홍건적의 난을 평정했으나, 간신(김용)의 모략으로 이방실장군등과 함께 살해 됬다, 김용은 공민왕의 은덕을 입고 출세를 하였지만, 공민왕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여 사형당했다.

 

16) 정몽주(鄭夢周) : 고려말의 충신으로 성리학의 밝았으나, 이방원에 의해 살해 됨

 

▼ 배신청에서 바라보는 숭의전입니다. 숭의전의 협문을 나가면 전사청입니다

 

▼ 숭의전지 건물 중에서 가장 소박한 전사청(典祀廳)이며,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기도 하고, 제사 진행을 관리하기도 하던 곳인데, 제사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은 안 보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복원하면서 일부 건물은 생략한 듯합니다

 

▼ 전사청은 숭의전과 담 하나를 두고 협문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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