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를 여행 중에 고려의 명장 윤관장군의 묘소를 여행길에 한번 들려봤습니다

남북 군사분계선이 가까이 있는 파주는 조선시대에 왕실의 외척으로 힘깨나 쓰던 파평윤씨의 본관이 있는 지방도시입니다. 

 

※ 윤관장군(尹瓘將軍)의 약력에 대해서 자료를 인용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으로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俯少監)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입니다.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였지만,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습니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 2년(1107)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하였습니다.

 

윤관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 6년(1111)에 돌아가자 인종 8년(1130)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습니다.

 

- 지정구분 : 국가지정문화재_사적 제323호(1988-02-27)

- 명     칭 : 파주 윤관장군묘 (坡州 尹瓘將軍墓)

- 시     대 : 고려시대

- 소 재 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 윤관장군묘역입구에는 느티나무가 서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윤관 장군 묘역을 만들 때 심었다고 하는데, 느티나무의 수령이 320년입니다. 그때는 묘역에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것이 좀 이해가 안 갑니다.

 

▼ [자료:다음지도] 하늘에서 보는 윤관 장군 묘역의 위성사진입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보면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되었다고 합니다.

 

▼ 여충사(麗忠祠)의 외삼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옆으로 돌아서 들어가야 합니다. 외삼문 옆에는 윤관장군의 생애와 묘 안내도 등이 있습니다.


▼ [자료:파주문화원,파평윤씨홈페이지등] 윤관장군(문숙공)의 사적지와 사당은 경기 파주의 여충사 외에도 여러 곳에 있습니다.

 

1.여충사 : 경기파주(문숙공 사당)

 

2.상서대 : 경기파주(윤관장군의 휴양지)

 

3.추원단 : 경기파주(상서대에 있는 파평윤씨 12인의 비석군)

 

4.낙화암 : 경기파주(상서대에 있으며, 윤관장군의 애첩이 절벽에서 뛰어 내린 곳)

 

5.정북사 : 함경북도 경성군(사당)

 

6.장사대 : 함경남도 서천(승전공덕비)

 

7.만뢰사 : 함남 북청군(문숙공 진영을 모신 사당)

 

8.원수대 : 함북 경성군(문숙공이 여진전쟁에서 승리해서 비를 세운곳)

 

9.원수암 : 함북 경성군(두만강변에 있는 큰 바위)

10.도린포 : 함남 정평군(문숙공이 영진 정벌 때 후퇴하던 포구)

11.시중대 : 함남 북청 마령(문숙공이 여진 정벌 때 진지

12.조양사 : 평북 가산군(문속공의 사당)

13.수벽사 : 전남 함평군 (문숙공의 사당)


▼ 윤관장군의 묘는 웬만한 왕릉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에 놀람니다. 윤관장군의 묘가 처음 부터 이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아마도 윤관장군의 묘를 다시 찾은 영조 이후에 묘역을 크게 확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묘역 입구의 왼쪽으로는 충효관이 보이고, 여충사의 내삼문이 보입니다.

 

▼ 충효관은 닫혀 있는데, 교육장으로 사용이 되는 듯합니다

 

▼ 여충사의 내삼문 진국문(鎭國門)입니다. 닫혀 있고, 제향일때만 여는것 같습니다.

 

▼ 여충사의 내삼문인 진국문(鎭國門)도 닫혀 있고, 좌측에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습니다.

 

▼ 윤관장군묘 앞에서 좌우로 길이 있는데, 오른쪽 길이 묘소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 먼저 윤관장군의 사당인 여층사를 먼저 보겠습니다.

 

▼ 여충사의 모습입니다만, 문은 닫혀 있습니다. 윤관장군의 위패는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습니다.(숭의전은 고려의 종묘라고 할 수 있는데, 경기 연천에 있습니다.)

 

▼ [자료:파주문화원] 여충사에서 제향의 모습

 

▼ [자료:문화재청] 여충사 윤관장군의 영정입니다

 

▼ 윤관장군의 묘로 올가는길에 있는 여충사의 재실입니다

 

▼ 재실은 분수재(汾水齋)라고 하는데, 현판은 좀 성의가 없어 보입니다.

 

▼ 윤관장군의 묘 앞에는 왕릉 부럽지 않은 석물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왕릉에서나 있는 석마도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석물들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후대에 많이 세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파주문화원] 

 

▼ 윤관장군묘 앞의 좌,우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높은 직급의 장군의 묘라고 해도 무인석에 석마가 있는 묘는 처음 봅니다. 보통은 문인석에 동자석 정도만 있는 정도입니다.

 

▼ 윤관장군의 묘역에 있는 석물들 중에서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문인석이 2기가 있습니다. 이 2기의 문인석만 원래의 석물이고, 나머지는 후대에서 세운 석물들입니다.


▼ 윤관장군은 동상은 서울 훈련원공원과 전남 장성의 육군 보병학교(상무대)에 각각 1기씩 있습니다. 훈련원공원에 있었는 윤관장군의 동상은 서소문공원에서 옮겨진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위키백과] 말도 많은 윤관장군의 동북9성의 위치와 윤관의 진격로의 자료입니다.

함흥평야 일대설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 학자에 의한 왜곡된 역사라고 하며, 진정한 동북9성의 위치는 만주일대로 봐야 한다고하는데, 우리 역사학자들이 아직도 동북9성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니, 참으로 환장할 일입니다.

 

만주지역이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고려 때의 국경이 어디였는지는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 윤관장군이 고려국경에 비를 세우는 그림이라는 "척경입비도(북관유적도첩)"입니다. 1107년 윤관장군이 함경도 일대에 주둔하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선춘령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새겨진 비를 세우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선춘령은 지금 두만강 북쪽 700리라고 하였는데, 중국 연변지역으로 보입니다.

 

▼ [자료:문화재청] 일제강점기 때 찍은 유리건판 사진으로 함경북도 경성에 있는 원수대비입니다. 윤관장군이 여진 정벌을 할 때의 고려군 지휘소가 있었던 곳이 함경북도 경성이었다고 하며, 그곳에 비를 세웠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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