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의 회암사지는 양주시의 최북단에 있으며 포천시와의 경계인 천보산 자락, 야트막한 평지 비슷한 기슭에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절터이기에 문화재도 볼 겸 갔는데, 회암사지는 여주의 고달사지를 보는듯한 넓은 면적에 둘러보는 시간도 꽤 걸리고, 여러 곳에 절집에서 쓰던 석재 도구들이 많아서, 그 당시의 최고의 절집 생활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 자료사진은 양주사지박물관, 문화재청, 경기문화재연구원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회암사지 박물관 뒤에 회암사지가 있습니다.
▼ 회암사지의 관람료와 주차비는 없고, 박물관은 어른 2.000원입니다, 회암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아주 깊은 관계가 있었던 사찰로서, 태조 이후에도 조선왕실과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 한동안 크게 번창하던 절집이었습니다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조선 초기 최고의 사찰이었습니다.
▼ 왕의 행차를 보는 듯합니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왕궁을 나와서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는 회암사에 들어오는 것만 같습니다.
양주 회암사지의 역사를 보면, 창건된 시기는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12세기(1100년~1200년)에 창건되었다는것이 정설인 듯한데, 이때는 고려시대였습니다.
회암사가 절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것은 고려말에 인도의 고승인 지공이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에 원나라를 거쳐서 고려에 들어 왔을때 회암사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天竺國 : 현재의 인도)의 나란타사와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였고, 그 후에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그러한 뜻에 따라 공민왕 23년(1374년)에 이어서 우왕 2년(1376년)까지 대대적인 불사(佛事)를 이루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초에 왕실의 전폭적인 후원를 받았던 회암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데, 그 이유를 좀 알아봤습니다.
고려말부터 성리학이 득세를 하고, 조선을 개국하면서부터는 신진세력들은 노골적으로 불교를 핍박하려 하였지만, 왕실은 불교를 옹호하고 더 나아가 조선 중종 때에는 계비 문정왕후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서 크게 번창하였습니다.
명종 20년(1566)에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부터는 유생들의 거센 핍박으로 결국 명종21년에 회암사는 불태워지고 흔적만 남게 되었으며, 선조 32년(1599) 실록에서는 회암사는 이미 터만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문정왕후가 고려때 있었던 승과 과거제를 부활시키는등 빗나간 불교옹호에 뿔난 유생들이 자신들의 정치 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한마디로 탈레반처럼 싹 쓸어버린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왕비나, 대비들이 정치에 깊히 간섭해서 잘되는것은 못 봤습니다. 오늘의 한국정치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 참고로 문정왕후의 릉은 태릉입니다만, 어느 왕릉보다도 엄청 화려 합니다
▼ 회암사지는 천보산 자락에서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형태이며, 가람들의 배치도를 보면, 복잡한 배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유리창에 회암사의 번성했던 그림을 절터의 크기에 맞게 그려 놓아서 어느 정도의 형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안내도에는 일부 건물지 일부 명칭 표시가 틀린 것도 있는데, 종각지가 관음전으로 되어 있습니다
▼ 조선 태조 이성계는 큰 아들 방과(芳果)에게 왕위를 이양 하고, 아들놈(방원)들을 피해서 무학대사가 있는 회암사에 치유와 쉼터를 찾아서 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태조 이후에도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도 가끔 머문 적이 있다고 하는데, 효령대군은 불교신자였다고 합니다
▼ 안내문을 요약해 보면, 회암사지는 18년간(1997~2015)에 걸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건물지는 약 70개소, 그중 반절에 해당하는 35개소에서 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건물지는 계단을 기준으로 8단지로 구분되고, 영역은 크게 5개 권역으로서 생활영역, 종교적 영역, 정치적 영역으로 구분하여 보면 되겠습니다. 출토유물은 약 10만 점이 발굴되었습니다.
▼ 자료를 보면 1997년 이전에는 이곳이 회암사지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명문이 새긴 귀중한 풍탁 조각을 발굴하여 회암사의 실체를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풍탁은 보광사지 4곳의 추녀(또는 사래)에 매달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4개중 2개는 완전히 없어지고, 하나는 일부 형체만 알아 볼 수 있으나 나머지 한개는 형태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명문이 완벽하게 보여서 회암사의 실체와 풍탁을 매달은 보광전, 시주한 사람, 시주한 목적등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 향토문화전자대전의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금탁의 하단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전 네 모퉁이는 금벽으로 화려하게 꾸미어 천궁보다 훌륭해 금탁을 달아 놓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바라네. 또한 작은 티끌 같은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듣고 부처님의 본심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이 신묘하고 아름다운 연기를 받들어 조선의 국호가 만세에 전해지도록 하소서. 전쟁[于戈]이 영원히 그쳐서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마침내 같은 인연의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홍무 27년[1394] 갑술 6월]
또 다른 명문 내용은, 1394년(태조 3) 6월에 5명의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회암사지의 건물지를 보면 전각들이 길게 배치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중앙을 기준으로 좌, 우에 건물지들이 많이 보입니다. 좌측을 보면 건물지를 이어주는 통로는 천랑(회랑)으로 이어져 있어서 비나 눈을 피해서 건물지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 현재의 회암사지에 건물을 얹은 모습입니다. 회암사의 번창했던 시절을 보는것만 같습니다. 복원 모형은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바탕으로 모형을 만들었고 회암사지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지료사진은 문화재청에서 인용 하였습니다)
▼ 회암사지를 한꺼번에 보려면 서북쪽에 있는 전망대에서 봐야 합니다. 시각적인 이해가 어려워서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에 건물지의 이름을 넣었습니다. 회암사지의 핵심 시설들이 모여 있는 4 권역과 5 권역이며, 맨 뒷쪽의 정청지는 왕이 머무르던 곳으로 담장이 있습니다.
▼ 보광전 밑으로 3 권역, 2 권역, 1 권역으로 주로 사찰의 생활영역과, 초입부의 보조시설들이 있던 곳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회암사지의 발굴전의 모습입니다.
▼ 회암사지의 진입부이며, 중앙은 좌, 우 건물지들의 공용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지의 구조는 계단식으로 각각의 석축과 계단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좌측에는 당간지주, 우측에는 괘불대가 있습니다만,, 보통은 석탑이 있어야 하는데, 안보입니다.
▼ 1단지로 들어가는 계단이며, 계단 위에 건물은 없었으며, 단순하게 사찰의 진입부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없어진 석재는 후보 하여 맞추었습니다
▼ 계단의 소맷돌을 보면 궁궐의 냄새가 납니다
▼ 제1 권역은 회암사지에서 가장 넓은 구역입니다. 주로 사찰의 진입부와 생활공간 등이 있습니다. 사찰의 생활권 영역은 동, 서의 가장자리 담벼락을 따라서 있는데, 계곡의 물이 흘러내리는 배수로 근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 안내문에는 괘불대라고 되어 있는데, 저는 당간지주라고 봅니다. 이유는 크기가 남다르기 때문이며, 남양주 봉선사에도 똑같이 생긴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던 괘불대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괘불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만 있습니다. 괘불대는 말 그대로 불화를 걸어야 하는 기둥(괘불 지주)의 받침대이며 반드시 두 개 조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다는것은 당간지주라는 설명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 괘불대라는 안내문이 있지만, 괘불을 거는데 이렇게 거대한 괘불대는 상상이 안됩니다. 똑같이 생긴 남양주 봉선사의 당간지주를 보면 회암사지의 괘불대는 당간지주라고 봐야 합니다(왼쪽은 회암사지 괘불대, 오른쪽은 남양주 봉선사 당간지주입니다.)
▼ 회암사지의 아주 오래 전의 자료사진인데, 저 멀리 괘불대가 보이고, 온통 밭입니다. 폐사지를 보면 크던, 작던 거의가 밭으로 변했습니다.(1950년대)
▼ 회암사지의 괘불대는 처음 보는 구조입니다. 괘불지주를 끼우는 돌을 통돌로 가공해서 마치 두 개의 석주가 있는 것처럼 만들었는데, 석공의 기발한 생각입니다.
보통은 석주가 두 개씩 한조가 돼서 불화를 걸 수 있으므로 석주는 총 4개가 필요한데, 회암사지의 괘불대는 석주를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 내가 보기에는 괘불지주가 아니고 당간지주로 보입니다
▼ 회암사지의 당간석은 세 개가 보이는데, 당간지주의 요건은 석주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게 세워야 기둥을 당간을 고정시킬 수 있는데, 옆에 있는 석주 하나는 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당간을 고정할 수 있는 구멍(당공)들이 안 보이는데, 당간이 쓰러지지 않게 어떻게 고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간지주에 당공이 없는 구조의 당간지주는 회암사지뿐만 아니라 여러 곳의 절터에도 있습니다.
▼ 당간지주에 당간을 매달은 자료 그림입니다
▼ 두 번째 계단은 일주문이 있던 곳입니다만 설명을 보면 문이 3칸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은 한 칸인데 회암사지는 왕궁처럼 3문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하지만 통도사, 법어사의 일주문도 3문 형태입니다.
▼ 생활권역은 사찰 좌우로 담벼락을 따라서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측에는 먹고사는데 필요한 곡식을 갈거나, 물을 쓰던 곳, 차를 가공하는 석재 도구들이 있고. 좌측에는 해우소와 계곡의 물을 받아 쓰던 석조들이 있습니다
▼ 두 번째 문 터는 사문지(沙門址)입니다. 중앙의 길을 보면 박석으로 깔아 놓았는데 사찰의 정중앙에 박석으로 길을 깔아놓은 사찰은 없습니다. 오직 회암사에서만 보는 길입니다. 왕궁에서나 있는 어도(御道)를 보는 느낌입니다. 박석길은 보광전 앞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 세 번째 문 중문지(천왕문)로 오르는 계단이 보입니다. 소맷돌과 계단석이 새로운 짝을 찾아서 맞추어져 있습니다. 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던 사찰이어서 그런지 소맷돌이 고급스럽게 설치되었는데, 더구나 절집의 소맷돌에 태극문양이라니... 왕궁처럼...
▼ 천왕문(중문지)을 들어서면 좌측에 종루지(鐘樓址)가 보이고, 화장실, 몸을 닦는곳등이 있고, 우측으로는 우물지, 맷돌 등이 있습니다.
▼ 회암사지에는 저런 석물들이 보이는데, 십여 개가 있고, 크기만 다를 뿐 모양은 똑같습니다. 정료대(庭燎臺)라고 하는데, 뜰 정(庭), 햇불 료(燎), 돈대 대(臺)로서 불을 밝히는 받침대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보통은 관솔대라고 합니다.
관솔은 소나무 가지를 베어낸 옹이를 말하는데, 송진이 많아서 불을 붙이면 오래 타기 때문에 등불 대신 썼습니다. 아무리 큰 사찰이라고 해고 관솔대가 있는 사찰은 거의 없을 듯한데, 회암사에서 처음 봅니다.
▼ 생활권역의 우물지 근처에 있는 이 네모난 돌은 가장자리에 얇은 테두리를 만들고 살짝 들어간 구조인데, 물이 빠지는 구멍이 있습니다. 아마 찻잎이나, 간단한 식재료를 씻는데 쓰던 도구인 듯 합니다.
이런한 네모난 돌은 우물지 좌, 우에 하나씩 있습니다. 아마도 우물지앞에는 공양간이 있었나 봅니다.
▼ 흔히 보던 맷돌은 아닌데 지금의 맷돌과는 구조가 다릅니다. 맷돌에 갈린 음식재료들이 흘러내려서 한 곳에 모이게 만들었습니다.
▼ 커다란 우물은 회암사의 모든 식수나, 용수를 공급하던 큰 우물로 보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우물지 내부를 실측조사를 하는 모습입니다. 엄청 큰 우물이었습니다
▼ 우물지 근처에는 똑같은 모양의 네모나게 가공한 돌이 있습니다. 아마도 찻잎을 씻거나, 채소등을 간단하게 씻을 때 쓰던 도구일 듯싶습니다.
▼ 우물지 동쪽으로 커다란 석조가 두 개 있습니다. 작은 것은 한쪽이 깨졌고, 큰 것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있습니다. 보기에는 간단한 구조일지 몰라도, 커다란 바위를 네모로 깊게 만든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들었을 것입니다.
▼ 석조 주위에는 두 개의 커다란 맷돌이 보입니다. 회암사에는 사람들이 1000여 명이 있었다고 하니, 저 맷돌도 무척이나 바빴을 것입니다
▼ 1980년대 발굴조사를 하기 전의 맷돌과 석조의 자료사진입니다(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서쪽으로 와서 옛날의 화장실(해우소)을 봅니다. 그런데 계곡의 물이 흘러내리는 배수로에 배변 구덩이가 있는데, 좀 이해가 안 가는데, 아마도 계곡의 물이 흘러내리는 배수로는 담벼락에 붙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료사진으로 보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는 모습입니다(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해우소 바로 위에는 두 개의 석조가 있습니다. 스님들이 계곡의 물을 받아두었다가 세수를 하거나, 몸을 씻었던 것입니다.
▼ 동객실, 서객실이 있던 자리입니다. 객실 앞에는 관솔대가 하나씩 있습니다. 스님들이 먹고, 자고 생활하던 공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위쪽을 바라보면 전혀 절집 같지가 않습니다. 잘 짜인 행궁자리 같습니다.
▼ 동객실과 서객실앞에 있는 관솔대(정료대)입니다. 관솔대가 너무 많아서 보는 맛이 떨어집니다.
▼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 바로 옆에 배수로 옆에 해우소와 세수를 하는 곳이 있습니다
▼ 제1권역과 제2권역을 보면 스님들의 생활공간이 많이 보입니다. 관솔대가 있는 곳은 관음전입니다.
▼ 제2권역으로 들어가는 정문(지)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계단을 밟고 올라갔을 것입니다. 또한 한양에서, 태종이 (이방원)이 보낸 사람들도 이 계단을 무수히 밟고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회암사와 깊은 관계를 가졌던 왕족은, 태조 이성계,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 특히 왕실의 권력을 이용하여 회암사에 무제한 특혜를 주었던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명종의 친모) 문정왕후 등이었습니다.
▼ 제2권역은 크고 작은 건물지가 많이 보이는데, 스님들의 거주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제2권역은 회암사의 살림살이에 관계되는 일을 보던 스님들의 거처인 듯싶은데, 건물지의 대부분에서 구들이 있었습니다
▼ 제3권역에 해당되는 정문지를 들어섭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보광전의 월대가 보입니다
▼ 제3권역부터는 종교적 영역으로 중심적으로 보광전이 있고, 좌, 우로 부속건물지가 있습니다
▼ 제3권역의 회암사의 핵심인 보광전이 있던 자리입니다.
▼ 보광전앞 월대를 중심으로 동,서로 동운관(집), 서운관(집)터가 있는데, 동운관 터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중앙의 높은 대는 보광전의 월대입니다.
보통 월대(月臺)는 궁궐의 건물 앞에 높게 단을 쌓은 공터인데, 월대에는 아무것도 설치하지 않습니다. 달을 바라본다는 월견대(月見臺)에서 유래됐는데, 절집에 월대가 있는 곳은 아마도 회암사가 유일할 것입니다.
▼ 보광전 옆에는 천랑지라는 표지석이 있는데, 회암사에는 궁궐처럼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회랑을 지었는데, 이 회랑을 천랑이라고 하는 듯합니다. 불국사에도 회랑(천랑)이 있습니다.
▼ 보광전지 옆으로 잘 보면 길이 보이는데, 천랑(회랑)이 이어져 있던 길로 보입니다. 이 천랑은 지붕이 있는 통로라고 보면 될것 같습니다
▼ 보광전지 좌, 우로는 서승당지, 향화료지등이 있습니다. 서승당은 서쪽에 있던 승방으로 스님들의 수행공간이었습니다. 보통은 좌, 우의 개념으로 좌승방이라고 할 텐데 서승방이라고 하였고, 동승방은 안 보입니다.
▼ 보광전 동쪽의 향화료지에는 알 수 없는 석조들이 보이는데, 보광전에 올릴 향불을 준비하던 도구인 듯합니다
▼ 보광전지 뒤에 있는 설법전지 입니다. 설법전은 스님들을 모아놓고 법전을 강의하거나, 법회등을 하던 지금의 강당 같은 곳입니다. 설법전지 부터는 제4권역입니다.
▼ 설법전지도 단을 높게 쌓았습니다만, 보광전보다는 규모가 작고, 월대는 없습니다.
▼ 설법전지 좌우로 보이는 관솔대 뒤로는 네모난 구둥이가 있는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설법전지 뒤로는 제5권역으로 회암사의 맨 뒤쪽이고, 정치적 영역이고, 회암사 최고의 위상을 지닌 공간으로 회암사 부도가 있고, 좌측(서쪽)에는 대장전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평소에 머무르던 곳으로 이해가 됩니다.
▼ 정청지 좌측으로는 불교 대장경을 보관하던 대장전지 입니다
▼ 정청지에서 우측에 보이는 대단한 부도(승탑)를 보러 갑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보겠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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