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관아가 복원되어 있다고 해서 한번 다녀왔습니다. 가끔 지방에서 관아지를 복원하는 곳을 보게 되는데, 그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또한 관광객 유인을 위해서 관아의 흔적을 찾아서 복원하는 사업은 참 좋은 사업이라 하겠습니다.
양주관아 건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이 파괴되었는데, 양주시에서는 십 수년간 관아터를 발굴 조사하여 1997년에는 관아의 정청인 동헌(東軒)의 매학당을 복원하였고, 동헌 옆마당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송덕비(頌德碑)를 모아놓았습니다.
2017년에는 동헌의 부속건물인 동행각, 서행각, 내삼문, 사령청, 중렴성문, 외렴성문, 그리고 내아를 복원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습니다
동헌 뒤쪽에는 1792년(정조 16년) 왕이 광릉에 행차하고 돌아오던길에 민정을 살피고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쏜 뒤 잔치를 베푼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어사대비가 있습니다.
※ 자료사진은 양주시청, 문화재청, 향토문화전자대전, 경기문화재연구원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양주관아의 출입문은 2층 누마루 건물입니다, 조선시대의 관아의 문은 구조가 거의 비슷하게 생겼는데, 조선말 흥선대원군은 관청의 위엄을 갖게 한다는 명목으로 관아의 건물을 높게 지었습니다.
▼ 양주 관아지는 1504년(조선 연산군 5년) 목(牧)을 폐하였다가 1511년(중종 6년) 다시 복구한 이후 1922년 치소를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1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412년 동안 양주의 구읍(舊邑)이 위치하였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임단아문(臨湍衙門)인데, 보통은 관아의 문에는 저런 현판을 달았습니다만, 양주관아는 현판이 없어서 참고적으로 올려봤습니다(임단은 연천군 미산면의 옛 지명입니다)_자료사진은 독일장교 헤르만 산더가 1906~1907년 사이에 조선과 만주를 여행하면서 소장한 사진중 일부 입니다.(사진은 고용된 일본인이 촬영)
▼ 외삼문옆의 측우대가 있습니다. 측우대 위에는 까만 측우기가 있는데, 서구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세종24년(1442년)때에 만들어진 측우기는 전국적으로 내린 비의 양이 얼마인지를 보고케 하였는데, 이때 지방관청마다 설치가 되어서 강우량을 조사하여 중앙에 올려 보냈습니다.
이때 비로소 과학적인 강우량의 데이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비가 오면 땅속을 파서 빗물이 젖어 있는 깊이를 쟀다고 합니다. 측우기를 만든 때는 세종이지만,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애석하게도 세종 때에 만들어진 측우기와 측우대는 없으나, 조선 헌종 3년(1837년)에 만들어진 측우기가 유일한 측우기로 남아 있습니다.
▼ 경기도 양주시는 조선때에는 양주목(楊州牧)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의 행정제도 중에서 도(都), 부(府), 다음으로 목(牧), 군(郡), 현(縣)이 있었는데, 양주는 행정 단위인 목에 해당하였으며, 해당 지방관의 명칭은 목사(牧使)였습니다.
양주목의 치소는 양주관아였는데 역사를 보면, 조선 태조 4년(1395) 서울을 한성부(漢城府)로 고치면서 서울에 있던 양주의 치소(治所)를 견주(見州, 현 양주읍 고읍리)로 옮겨 양주군을 설치하였으며, 중종 1년(1506)에는 이곳에 양주군 관아가 세워진 이후 1922년까지 417년 동안 양주의 관아가 있었습니다
▼ 양주시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양주관아지에 대한 설명 그림입니다.
▼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의 공간이며, 앞에 보이는 3칸짜리 건물은 사령청으로 목사의 지시를 수행하는 하급관리들이 업무를 보던곳 입니다.
▼ 내삼문과 좌,우 행각입니다.
▼ 내삼문에 들어 서면서 바라보는 매학당입니다.
▼ 관아의 정청인 매학당입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양주관아를 뒤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 매학당앞에 보이는 건물터는 과학당(跨學堂)이라고 하며, 매학당 이전의 정청이었습니다
▼ 내아부는 내아, 내아관리사, 내아삼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은 잠겨 있습니다
▼ 현재 내아는 문이 잠겨 있어서, 자료사진으로 봤습니다_양주시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관아옆 동쪽의 공터를 둘러봅니다
▼ 비석군에서 바라보는 동헌 모습이며, 동헌 뒤에 어사대비가 있습니다
▼ 양주시 관내에 흩어져 있던 전임 양주목사들의 선정비를 동헌의 오른편 공터에 모아 놓았습니다. 모두 18기인데 이중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입니다.
▼ 어사대비 앞에는 어사대비에 대한 내용을 알기 쉽게 만화 형식으로 12개 컷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알기 쉽게 되어 있어서 12개의 그림을 전부 올렸습니다. 그림마다 번호가 있었으면 좋았겠습니다.
▼ 어수대비각입니다. 뒤에 보이는 정자는 어수대비와는 관련이 없는 일반 정자 입니다
▼ 다음은 향토문화 전자대전에서 인용한 어사대비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양주 관아(楊洲官衙)에 행차하여 활을 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792년(정조 16)에 세운 사적비이다.
1792년 9월 정조가 광릉(光陵)[세조의 능]에 행차할 때 폭우로 다리가 무너져 동쪽 길을 버리고 북쪽 길을 택하였는데, 행차 후 돌아오는 길에 양주 관아에서 3일간 민정을 살피고 사대(射臺)에서 활을 쏜 후 잔치를 베풀었다.
어사대 비(御射臺碑)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양주목사였던 이민채(李敏采)가 세운 것이다.
비석 전면에 굵고 활달한 필체로 ‘어사대(御射臺)’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 새긴 비문에는 정조가 활을 쏘았던 내용에 이어 왕이 지은 시와 궁궐로 돌아간 후 왕이 내린 말씀을 관아의 오른쪽 벽에 걸어두고 찬양하며, 이 비와 읍지(邑誌)에도 그러한 사실을 기록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숭정 세 번째 임자년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어 비석이 세워진 연대가 1792년임을 알 수 있다. 이민채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어사대비는 높이 140cm, 너비 55cm, 두께 23cm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정조가 양주목에 3일간 머물렀다가 활을 쏜 터에 임금이 활을 쏜 장소라는 비를 세웠는데, 뒷면에 여러 내용을 담았다는 안내문입니다.
대부분의 자료는 정조가 양주목의 양주관아에 머물렀다는 내용인데, 문하재청 문화재연구원의 자료에는 정조가 아닌 인조가 양주목 양주관아에 머물렀다가 환궁했다는 내용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으로 보입니다.
※ [문화유적총람] 어사대비(御射臺碑)의 내용입니다만, 틀린 내용으로 보입니다.
조선 仁祖 16년(1638) 9월 상순에 왕이 광릉에 있는 世祖의 陵舍 관계로 거둥했다가 환궁길에 당시 양주 목사가 있던 관아 소재지인 주내면 유양리에서 3일간 머물면서 백성을 시무하며 수행 신하와 함께 활을 쏘았던 곳으로 후에 양주목사이민채(李敏采)가 그 때의 상황을 비석에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아마도 연구원이 오타를 한것 같습니다
▼ 어사대비의 전, 후면 자료사진인데, 후면은 다행히 총탄 자국이 없어서 다행입니다_경기도 홈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거북이 모양의 비구(龜趺)는 너무 못 생겼습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어사대비가 누각도 없는 모습인데, 왼쪽의 사진은 아마도 한국전쟁 이후의 사진인 듯합니다. 중기관총 총탄 자국이 흉하게 보이지만, 그나마 비신이 깨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한국전쟁중에 격전지의 무덤의 비석에는 가끔 총탄자국이 있습니다. 한반도에는 지정학적으로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최대한 전쟁을 피해야 하는데, 강력한 전쟁억지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 어사대비 뒤에는 정자가 있어서 올라가 보았지만, 양주관아를 보는 조망은 나무에 가려서 좋지 않았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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