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에 진심이었던, 유교의 나라 조선은 그 이전 왕조부터 하늘에 제를 지내는 관습을 이어 받았으며, 그 관습은 오늘날 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고종이 황제의 지위로써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던 원구단(환구단)에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 원구단(圓邱檀) 건물이 대한제국 원년에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습니다만,  어쩌다 환구단(圜邱檀)이 표준명칭으로 정해졌는지 구구절절 이유가 많지만, 여기서는 처음의 명칭이었던 원구단(圓邱檀)으로 하겠습니다.

 

조선이전의 고려나, 백제,신라, 그리고 고구려에서도 하늘이나 땅에 제를 지내는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것이지만, 조선처럼 제사로 시작해서 제사로 끝나는 왕조는 없었을 것입니다. 유교의 이념은 조선의 왕족과 머리 부터 발끝까지 유교로 무장한 선비는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뿌리깊게 뿌려졌고, 지금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1897년(고종 34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를 광무로 하고,  그동안 청나라 사신의 숙소이면서 조선왕실의 별궁인 남별궁을 부수고, 그 자리에 몇백 년 만에 다시 원구단을 지었습니다.

 

고종은 원구단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 때부터 원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온 나라에  알리게 됩니다.

 

원구단이 지어진 2년후 1899년 (광무 2년)에 원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하였고 1902년(광무 6년)에는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황궁우 옆에 석고단(石鼓壇)을 설치하였습니다.

 

원구단의 형태는 천원지방이라 하여 하늘에 제를 올리는 본단은 둥글게 쌓아 원구단을 조성했고, 본단을 받치는 땅은 모나게 쌓았습니다

 

※ 여기에 인용된 자료사진은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의 e뮤지엄과, 나무위키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원구단를 보러 가는 길에 서울시청앞를 지나갑니다. 서울시청의 오래된 석조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경성부청이었습니다.

 

▼ [자료:네이버지도] 서울시청에서 길을 건너기전에 보이는 원구단 삼문(정문)입니다. 현재의 문은 2009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원구단 삼문(정문) 뒤로 웨스틴조선호텔이 서 있습니다.

 

▼ 원구단 삼문옆에는 세개의 돌북을 본떠서 환구단 시민 광장이라는 표석을 세웠습니다.

 

▼ 원구단 삼문은 조선철도호텔일때까지도 호텔의 정문으로 그대로 있었으나, 1970년에 조선철도호텔이 조선호텔로 대대적인 신축을 하게 되면서, 헐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다가 2009년에 현재의 자리에 복원되었습니다

 

▼ 원래의 자리는 아니지만, 그나마 지금의 자리가 최선인 듯합니다.

 

▼ [자료:카카오지도] 야경으로 보는 원구단 삼문(정문)의 모습이며, 삼문 뒤로 위스틴조선호델이 보입니다.

 

▼ 문 안쪽에서 시청방향으로 보는 모습입니다. 경찰버스가 도로마다 가득합니다. 이 나라는 언제쯤 조용해질까?

 

▼ 원구단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서기 전인 1897년~1890년으로 보이는 사진에는 원구단 삼문, 원구단 본단, 황궁우가 잘 보입니다.

 

▼ [자료사진;서울역사박물관] 1901년 5월에 서울에 여행을 온 체코인 브라즈가 촬영한 원구단 정문앞의 소공로를 근대식으로 하수로 공사를 하는 사진입니다.

 

▼ 조선총독부(철도국)가 조선철도호텔을 건립하려고  원구단 본단을 허물고 있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후, 1914년 원구단의 부지에 조선철도호텔을 건립하면서, 원구단은 황궁우만 남기고 전부 철거되었습니다.

 

▼ 조선철도호텔이 건립된 후에 보는 사진인데, 삼문(정문)이 그대로 보이고, 호텔 뒤에는 황궁우가 그대로 보입니다.

호텔의 이름을  철도호텔이라고 한 것은 그 당시 조선총독부의 철도국은 관광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철도와 연계된 관광사업을 하면서, 조선의 주요 역 부근에 호텔을 지으면서 철도호텔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경성의 철도호델은 물론, 부산철도호텔, 신의주철도호텔, 금강산철도호텔등을 운영하였습니다

 

▼ 해방 후에 조선철도호텔은 대한민국 철도국(철도청)에 이관되었다가 나중에 최종적으로 삼성그룹에 매각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면 호텔과, 황궁우, 원구단 삼문의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 백운문의 현판을 달고 있는 원구단 삼문입니다. 2007년에 서울 우이동의 그린파크호텔의 정문이 원구단 삼문(정문)이라고 확인하여, 2009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겼습니다.

 

▼ 1900년 즈음의 유리건판 사진인데, 황궁우와 원구단 본단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관리가 탄 가마를 들고 있는 가마꾼과 하급관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 [자료:나무위키] 원구단 전체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며, 원구단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 1900년 전후로 보이는 때의 원구단의 모습입니다.

 

▼ [자료사진:월간중앙] 조선호텔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황궁우와 서울 시내 방향의 모습입니다.

 

▼ 황궁우 주위로 아케이드가 빙 둘러져 있습니다. 아마도 해방 후의 사진인 듯합니다.

 

▼ 원구단 삼문으로 들어와서 보면 세 개의 돌북(石鼓)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사실 이 돌북은 원래의 위치는 반대편인 북쪽에 있었습니다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구단의 면적이 줄어들게 되었고, 부득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 석고단은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원구단 북쪽에 건립하였으며, 문은 광선문, 돌북이 있는 건물은 석고각이라고 하였습니다.

 

▼ 석고각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건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석고각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도서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지금 이 석고각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아마도 그 당시 헐어버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 석조각의 돌북은 누워 있는 모습입니다

 

▼ [자료사진] 돌북은 원구단의 옆에 석고단이라고 따로 있었으며, 문은 광선문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석고단은 해체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들어섰습니다.

 

▼ [자료:천지일보] 석고단의 정문이었던 광선문은 국민대학교 정문(947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석고단이 해체되어 돌북은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다가  지금의 자리에 단을 만들고 안치하였는데, 원래는 뉘어져 있었지만, 복원할 때는 세워서 복원하였습니다.

 

▼ [자료사진] 돌북의 표면에는 용문(龍紋)이 현란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 황궁우와 웨스틴조선호텔의 경계는 담장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만, 황궁우가 마치 호텔의 정원처럼 보입니다.

 

▼ 거대한 고층빌딩에 둘러져 있어서 기가 죽어 있는 황궁우의 모습은 좀 애처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 황궁우는 8각의 3층 누각이며,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어딘지 모르게 중국풍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 [자료사진:문화재청] 황궁우의 내부(천장)를 보겠습니다. 용무늬와 화려한 문양으로 가득합니다.

 

▼ 황궁우 주변은 난간석으로 둘러져 있으며, 작은 해치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 난간석은 동자석주 위에 얹혀 있으며, 기본 구조는 6 각형입니다.

 

▼ 대한제국의 종말을 지켜보았을 해치는 그저 말이 없고, 해탈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원구단의 내삼문은 호텔과 황궁의 중간에 있으며, 통상적인 조선식 목조건축이 아니고, 청나라 건축형식의 전돌로 쌓았습니다. 그래서 문의 이름이 전축삼문(塼築三門)입니다.

 

조선은 정조 이후부터 청나라의 전축공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성곽을 만들 때 잘 활용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수원화성이 있습니다.

 

▼ 전축삼문으로 들어가면, 웨스틴조선호텔의 로비와 마주 보게 됩니다.

 

▼ 전축삼문에서 보면 황제가 오르는 가운데 답도가 보이는데, 왕(황제)은 가마를 타고 삼문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답도를 직접 밟을 일은 없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 발행한 엽서를 보면 전축삼문의 앞은 지금보다는 무척 넓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원구단의 흔적은 황궁우와 전축삼문, 석고(돌북)만 남았습니다. 이것으로나마 만족하여야 하나 봅니다.

 

▼ 일제강점기 엽서를 보면, 기생들이 전축삼문 앞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조선철도호텔이었던 당시에는 지금의 장소가 그나마 좀 넓었습니다.

 

조선시대 기생들은 전문직이었으며, 기생학교에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 삼문의 중앙에서 바라보는 황궁우는 짧게 끝난 대한제국의 꿈을 보는 듯합니다.고종의 허무한 꿈은 힘도 없는 국가의 멸망직전에 그냥 한번 몸부림 쳐 본것으로 끝났습니다. 고종은 망해 가는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죽을 힘을 다했는지 의문이 드는 군주입니다.

 

▼ 황궁우를 둘러보면 구석에 난간석의 석물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원구단의 본단에 쓰였던 난간석 석물들로 보입니다.

 

▼ 원구단 본관의 난간석입니다

 

▼ 원구단 본단은 어쩌면 영원히 복원이 안 될 수도 있으므로, 철거되어 보관하여야 하는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보관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 황궁우에 드나들던 전축문은 이제 하나만 남았습니다. 청나라 양식의 전축문이지만 조선의 전통문양으로 아름다움을 살렸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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