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탑골공원의 삼일문 앞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입니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뜸할 때 사진을 찍었습니다
▼ [자료:포털지도서비스] 원래 탑골공원의 정문이었던 4개의 석주는 근대건축기법으로 만들어졌으며 1910~1913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이 되며, 1967년 당시 파고다공원 개. 보수 공사를 할 때 해체되어 1969년에 서울법대의 정문으로 이용되다가 지금은 현재 서울대학부설초, 중학교 정문으로 사용 중에 있습니다만, 서울법대가 이전할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그 자리에 자리를 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100년이나 지난 역사적 장소의 문이며, 언젠가는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할 유산입니다.
▼ 1967년 12월 파고다공원 개보수 준공식을 할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삼일문의 현판이 걸렸습니다. 입장료는 없습니다.
▼ 삼일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공원자리가 시원하게 보입니다.
[자료사진: 문화재청] 도심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탑골공원의 모습입니다. 과연 이곳이 세조 때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울은 너무 변해버렸습니다.
※ 자료사진을 연도순으로 보면서 탑골공원 변천 모습을 알아보겠습니다
▼ [자료사진] 공원으로 개발되기 전인 1884년에 로웰이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을 보면 탑의 7층 위로는 이미 없는 모습입니다.
1884년이면 갑신정변이 있었던 해이며, 멀리 백악산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원각사지 13층석탑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아주 잘 보였을 것입니다
▼ [자료사진] 민가들이 들어선 원각사지의 모습이며, 1901년 부터(또는 1896년~) 공원화 공사를 하면서 민가들을 이전시켰으므로 사진을 찍은 시기는 1890년대로 추정이 됩니다.
▼ [자료사진] 1901년 민가 철거 후 공사 진행중인 탑골공원[1901. Photographer Enrique Stanko Vraz]
※ 이 사진은 체코여행가(가이드)엔리케 스탄코 바르즈가 1901년에 찍은 사진이며, 사람들은 관리로 보입니다.
※ 원각사지를 공원으로 만들기 시작한 해는 1896년, 1897년, 1901년 등 여러 자료가 있습니다
▼ [자료사진] 1903년의 사진이며, 원각사탑의 주변정리 공사중이고 이미 담장은 둘러져 있습니다 [1903, photographer Gertrude Bell]
▼ [자료사진:시사타임스] 1904년의 사진이며, 담장이 보이는것으로 보아 공원으로 만드는 도중에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 원각사에는 커다란 동종이 있었는데, 보통 보신각종이라고 하는 동종입니다. 그 원각사종(보신각종)은 세조 때 만들어져서,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야외에 있습니다
▼ 탑골공원의 광장이며, 우측에 손병희선생의 동상과 독립선언문 동판이 보입니다
▼ [자료사진:에포크한남] 1960년 4.19 이전의 탑골공원에 있었던 이승만 전대통령의 동상이며, 이 동상은 1956년에 세우고, 1960년 4월 26일 시민들에 의해 철거되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은 자료에서 보면 여러 곳에 세웠는데, 아랫사람들의 신격화에 따라 만들어진 동상은 결국 끝이 좋지 못했습니다.
▼ 1919년 3월 1일에 파고다공원에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 낭독하였습니다만, 실제는 49인이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못하신 분이 16분이 더 있었습니다.
▼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독립선언서를 확대하여 부착한 것입니다. 이 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를 하였다고 하며, 그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되었습니다.
선언서에 기록된 33인은 원래 거사 당일인 3월 1일에 파고다 공원에 모여서 선언서를 낭독하는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막판에 파고다 공원에 태화관으로 변경하여 그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습니다.
▼ 손병희선생은 3.1운동에 천도교 대표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순국하셨습니다.
▼ 대원각사비는 성종2년(1471년)에 할아버지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기록한 비석입니다. 원래는 태조 이성계가 이 자리에 조계종 본사로 흥복사라는 절을 지었으나, 세종 때 불교통폐합으로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서로 사용되다가 세조 11년(1465년)에 그 자리에 새로운 절을 짓고 원각사라고 하였으며, 세조 13년(1467년)에는 13층의 대리석석탑이 세워졌습니다.
▼ 대원각사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1964년 파고다공원정비사업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 일제 강점기때의 대원각사비의 모습입니다
▼ [자료:서울역사박물관] 1904년의 사진(왼쪽)과 1910년의 사진(오른쪽)인데, 비교해 보면 원각사비의 지대가 좀 낮은 것처럼 보입니다
▼ [자료사진] 일제강점기 전의 사진으로 추정되며, 공원 담장이 무너져 있고, 대원각사비는 냇물에 귀부가 잠겨 있습니다
▼ [자료:서울역사박물관] 관리로 보이는 사람이 원각사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시기는 1910년 전,후로 보입니다
▼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을 정비하면서 출토된 석재들과 도성내에서 쓰였던 석재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 팔각정과 석탑이 보입니다
▼ 팔각정은 1903년 12월에 완공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는 팔각정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는데, 실제 33인 중에서 한 사람이 아닌 일반 시민이 낭독을 하였는데, 정작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일제 경찰이나, 헌병들에게 체포되지 않도록 낭독자를 보호해준 결과(?)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자료사진;서울문화투데이] '바츨라프 세로세프스키’가 1903년 촬영한 팔각정의 완성 전의 모습입니다. 다른 자료에서 보면 팔각정은 1897년에 지어진 것으로 쓰여 있는데, 이 사진을 보면, 민가가 철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팔각정이 지어진 것으로 보아 파고다공원은 이미 영국인 브라운이 1896년에 근대식 공원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건의 한 이후부터 공원공사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거의 완성된듯한 공원 모습이며, 1910년 후로 추정 합니다. 멀리 명동성당이 보입니다. 상층부 탑신이 땅에 내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탑에 대한 수리가 아닌 , 이전이나 반출등의 행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파고다공원입니다.
▼ 대한제국시절 황실군악대는 팔각정에서 일요일마다 연주를 하였다고 합니다
▼ [자료사진:서울시] 1910년의 팔각정 사진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 팔각정 뒤에 있는 10층(원래는 13층)석탑을 알아보겠습니다
▼ 지금은 유리창 내부에 보호되고 있는데, 2000년에 부식방지 유리창공사를 하였습니다
▼ 세조 13년(1467년)에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세조는 왕자시절부터 불교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부처의 일대기를 한글로 풀어쓴 석보상절을 발간하였으며, 왕으로 재임 중에도 불교에 깊은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에 의해 원각사지는 궁궐과 가까이 있어서 여흥을 즐기려는 기녀들의 거처로 전락하였습니다
▼ 1906년~1908년에 조선과 만주를 여행하던 일본주재 독일무관 헤르만산더가 찍은 사진입니다.
▼ [자료:서울역사박물관] 1911년의 사진으로서 관리로 보이는 사람이 인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엽서들입니다. 일제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이 보기 드문 걸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어 엽서등으로 발행하였습니다.
▼ 석탑 뒤로 음악당이 보입니다. 이 음악당은 원래 용산일본군 병영에 있었으나 1916년 3월에 파고다공원으로 이전되었습니다.
▼ 경천사탑(국립중앙박물관)과 원각사탑은 구분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두탑 모두 조형미가 매우 뛰어나서 일본인들이 반출했던 탑이며, 경천사탑은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에 있습니다.
▼ 해방 이듬해 1946년 2월 미군 공병대의 기중기로 상층부의 탑신을 조립하고 있습니다.
▼ 경천사지탑이나, 원각사지탑이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서 풍화작용에 약하기 때문에 실내서 보관하거나, 유리를 씌워서 보관하는 방법이 최선일 수 있습니다.
▼ 탑신에는 모두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서 삼존불을 담아 보았습니다. 세밀하기가 이루 말할 수없이 정교합니다
▼ [자료사진] 조선고적도보에서 원각사지석탑을 자세하게 보겠습니다.이렇게 아름다운 석탑은 일본인들에세 견물생심(見物生心)을 들게 합니다.
▼ [자료사진] 상륜부의 모습입니다. 상륜부는 고려시대의 상륜부와는 전혀 다르게 간략하게 처리하였습니다
▼ 탑골공원의 북문에 해당 하는 문옆에 독립선언문 민족대표 49인 중 한 명인 만해한용운 선생의 '만해용운당대선사비'가 있습니다.
문옆으로 3.1 운동 당시의 모습을 새긴 10개의 부조가 세워져 있습니다
▼ [자료:서울시] 1967년 파고다공원 정비공사를 하면서 공원 주위로 아케이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아케이드는 1983년에 철거되었습니다.
▼ [저료사진:서울시] 공원밖에서 보는 파고다공원 아케이드 모습입니다
▼ [자료:서울시] 공원정비공사가 끝난 후인 1969년의 모습이며, 북쪽에 동상이 보이는데 누구의 동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자료;서울시] 1969년의 사진이며, 동으로 만들어진 3.1 운동의 모습을 담은 10개의 부조 작품은 아케이드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 처음에는 사적비가 보이는데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습니다
※ [출처:cj934.kr] 탑공공원 사적비의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역사가 길면 곳곳이 이야기가 많은 법이니 탑골공원이 바로 그중의 하나다.
본시 이조 태조때에는 여기에 불교 조계종의 본사이던 흥복사가 있었는데,그것이 세종때에는 관습도감, 예장도감 및 중학 유생 집회소등이 되었더니,세조 9년에 왕이 효녕대군의 신앙심에 감격하고 또 스스로도 뜻을 일으켜여기 있던 관청들을 모두 딴곳으로 내어 보내고 민가 200여호를 더 사들여도장을 널리 닦고 옛터에 새절을 다시 이룩하니 그것이 바로 원각사이었다.
13층 탑과 대원각사 비를 세우는 등 큰 규모에 융성한 모습이 장관이더니,연산때에 이르러서는 불교 배척과 함께 연방원을 만들어 기악을 잡혔으며,중종때 훼철되고 임진란을 겪은 뒤 300년동안 무질서한 마을이 되었던 바1897년 한성부 판윤 이채연과 탁지부 고문 영국인 브라운의 협력 아래 내부토목국장 남궁억이 길을 넓히고 공원을 처음 만든지 70년이 되었다.
비록 옛날 원각사 터를 다 들여오지 못하고 범위는 극히 좁아졌다 할지라도보물로 끼쳐오는 탑을 중심으로 공원을 만들어 탑골공원이라 불러 오더니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때 여기서 의거의 함성을 처음 올린뒤이곳은 비로소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 되어 실로 성지와 같이 되어 온 곳이다.
일제의 암흑시대에는 짐짓 거칠게 했고 해방후에도 무심하게 버린바 되어아침 저녁 이 앞을 지나는 이들로 공원답지 못함을 탄식하지 않는이 없더니,서울특별시장 김현옥과 종로구청장 김남규의 주관 아래 새 계획을 세우고한국정취 풍기는 새 화원을 꾸미고 만세운동 기념하는 조각들을 진렬하여분주한 거리속에 정신을 맑혀주는 정결하고도 거룩한 지역을 만들었거니,이리로 들어와 거니는 이는 새힘을 얻어 흐믓한 웃음을 웃고 가리라.
단군기원 4300년(1967) 12월 일 이은상 글 김충현 글씨
※ 비문중에 남궁억선생은 독립운동가, 교육자로서, 고향은 홍천입니다.
▼ 10개의 부조 중에서 1919년 3월 1일 팔각정에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작품인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사람은 아직도 누구인지를 특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 끝 -
'▣ 역사.문화재.사찰 > 서울지역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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