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사유적증에 종묘는 알아도 사직단은 그리 알려지지 않아서 잘 모르고 있다가 서울 구경도 하고 사직단도 볼 겸 겸사겸사 보고 왔습니다.
유교에 진심이었던 조선에는 종묘와 사직이라는 큰 기둥으로 버텨왔다고 흔히 말합니다. 대한제국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환구단)까지 추가되었으므로, 3개의 큰 축이 조선이라는 국가의 큰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1908년 이후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없애고 관광호텔인 조선철도호텔을 건립하고, 땅과 곡식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공원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창경궁까지 놀이시설인 창경원으로 전락시킨 일제가 사직단을 시민공원으로 바꾸고 사직단 위에 일본신사를 건립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 여기에 인용된 자료는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예울포럼, 전주이씨대동종약원등에서 가져왔습니다
▼ 서울 구경은 지하철만 잘 이용하면 시간낭비 없이 원하는 곳까지 가서 볼 수 있는 지하철 천국의 서울입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볼 수 있는 보물 가마인물형토기(시종상)을 원본보다 크게 석재로 복제한 작품입니다.
일제강점기(1924년)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한 한쌍의 가마인물형 토기 중에서 하인으로 보이는 토기입니다.
안장 뒤에 보이는 원형 주입구에 물을 부으면 앞에 대롱으로 물이 나오게 되는 일종의 주전자입니다. 서기 600년 즈음에 만들어진 매우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 경복궁역(1번출구)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사직단 외삼문을 만납니다. 이 대문은 길을 넓히는 몇 번의 공사로 인하여 원래보다 약 30미터 정도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문 옆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찍었던 유리건판에서 사직단의 정문(삼문)을 보면 지금과는 조금 많이 다르게 창살을 단 문짝으로 되어 있으며, 쪽문이 있습니다. 100년 전의 대문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왜 옛날 모양대로 복원을 하지 않았을까요...
1908년 이후 조선에서 시행하던 모든 제사행사는 중지되었으므로, 이 사진은 사직단이 공원으로 격하된 이후라고 보며, 마차에는 석재가 실려 있고 지게꾼들이 기와를 나르는 것으로 봐서 사직단의 어떤 건물들이 해체되는 듯합니다.
▼ [자료:위키백과] 1884년 조지 클레이턴 포크(1884년 주한미국대리공사)가 찍은 사직단이며, 인왕산 쪽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직단 전체가 나무숲으로 사직단 내부가 안 보입니다.
▼ 사직단 내부에서 보는 대문의 모습이며, 대문앞에 보수중인 안향청이 보입니다.
▼ 공사 가림막에 부착되어 있는 안향청의 사진으로 사직대제 전날에 궁(왕)으로 부터 받은 향과 축등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안향청 복원공사는 2025년까지입니다.
▼ 일제강점기 때 찍은 유리건판사진의 안향청입니다.
▼ 사직단의 구성도입니다. 담장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문도 사방(동, 서, 남, 북)에 있습니다.
밖의 담장에 붙어 있는 문은 신문(神門)이라고 하며, 4개의 신문중에서 동, 서, 남문의 문은 크기나 모양이 똑같지만, 북신문은 삼문형태로 특별하게 크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토지의 신을 모시는 사단(社壇)은 동쪽에, 곡식의 신을 모시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있습니다
▼ [자료:예올포럼] 사직단의 배치도를 참고로 인용하였습니다
▼ 혜촌 김학수선생이 그린 사직단도입니다.
▼ 문화재청에서 오래전에 배포한 자료에 사직단의 안내도를 보면, 복원된 제사시설과 복원하지 못한 제사시설을 종합하여 안내하고 있습니다. 2023년 현재 전사청은 복원되어 있습니다만, 안향청은 현재 보수. 복원공사 중입니다.
▼ 사직단의 남쪽 담장을 따라서 전사청으로 먼저 가 봅니다.
▼ 전사청(典祀廳)은 사직대제의 행사를 주관하는 관서를 일컫는 말합니다. 전사청은 2022년 5월에 복원공사가 끝나고 일반에 개방하였습니다.
▼ 전사청 앞에서 보는 사직단입니다만, 자료그림에서 보면 사직단 담장과 전사청 담장이 가깝고 평행으로 붙어 있는데, 복원한 전사청은 비스듬히 머리 떨어져 있습니다.
검은 전돌이 깔인 곳은 찬만대(饌幔臺), 또는 찬막이라고 하며, 전사청에서 준비된 제물을 올려놓던 곳입니다. 찬만대 위로는 차양을 칩니다. 이러한 찬만대는 종묘에도 있습니다
▼ 전사청의 수복방(守僕房)이며, 사직단을 관리하는 관원이 기거하는 곳입니다.
▼ 사직 제관의 제복인데, 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관들은 지위고하를 떠나서 대부분 모양은 비슷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 사직대제에 입었던 제관들의 복식들인데, 아마도, 종묘대제, 사직대제, 원구단제사 때도 복식은 대부분 같았을 것입니다. 왕이 입었던 옷은 정말 화려합니다
▼ 전사청의 잡물고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창고입니다.
▼ 전사청의 가운데 마당 가운데에 제정이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에도 마당에 제정이 보입니다.
▼ 오른쪽이 전사청, 왼쪽이 제기고입니다.
▼ 제기고의 전면입니다.
▼ 제기고의 내부입니다. 국가적인 제사에 쓰이는 제기들을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일반 가정에서 쓰는 제기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 사직단에서 대제를 지낼 때 제관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 왼쪽이 재생정입니다. 제물에 쓰일 동물들의 고기를 마련하는 곳입니다.
▼ 두 칸의 건물인데, 저구가라고 하며, 제단에 올릴 곡식들을 만드는 곳입니다
▼ 홈이 파인 돌판이 곡식을 찧는 절구입니다
▼ 사직단은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에 따라서, 담장도 네모 모양이고, 제단도 네모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담장도 이중으로 만들어졌는데, 밖의 담장에 붙어 있는 문은 신문(神門)으로서 동,서,남,북에 있습니다.
신문의 4개 중에서 동신문(東神門), 서신문(西神門), 남신문(南神門)의 모양은 단문으로서 한 칸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북신문만 특별히 삼문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의 유리건판에서 보는 신문은 대체로 거의 부서졌습니다
▼ 1931년(?)에 찍은 유리건판 사진인데, 제단은 대체로 멀쩡하게 보입니다. 제사도 금지됐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제관들과 하급관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홍살문처럼 생긴 문은 유문(壝門;제단의문)이라고 하며, 유문에 붙어 있는 담장은 유(壝)라고 합니다.
▼ 일제강점기 때의 유리건판사진에서 보면 담장이 무너져 거의 폐허 수준의 사직단의 모습입니다.
▼ 1930년 전후로 추정되는 사진이며,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은 그나마 멀쩡합니다.
▼ 서신문에서 바라보는 서유문(西壝門)입니다. 서신문에서 시작한 어로(御路)는 판위까지 이어집니다
▼ 북신문(北神門)만 삼문형태로 특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향청에서 출발한 향과 폐백은 이문으로 들어갔습니다.
▼ 일제강잠기때의 북신문터 입니다.
▼ 북신문에서 시작하는 향축로입니다. 향축로 끝에 검은 전돌로 되어 있는 판위(版位)가 보이는데, 서문에서 어로를 따라 들어온 왕은 이 판위에서 대직사제를 시작하게 됩니다.
▼ [자료] 사직단의 모습입니다. 서신문에서 어도가 판위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 사직대제의 절차는 용어도 어렵고, 이해가 안 가는 내용들이지만, 간추려서 알아보았습니다.
사직대제는 제사의 선행절차(先行節次) → 거가출궁(車駕出宮) → 행례절차(行禮節次) → 거가환궁(車駕還宮)의 4단계로 구성된다.
준비 절차는 제사 8일 전에 헌관이 경건한 마음을 맹서 하는 서계(誓戒)를 행하고, 7일 전부터는 경건한 몸가짐을 갖는 재계(齋戒)를 행한다. 3일 전부터 사직단에 제수 및 시설물을 설치하는데, 희생(犧牲)은 소 한 마리, 양 네 마리, 돼지 네 마리를 사용한다. 제일에 국왕의 어가가 왕궁을 떠나 사직단에 이르면 제사가 시작된다.
- 헌관(獻官) :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임시로 임명되는 제관이며, 술잔을 올리는 순서에 따라 초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으로 구분이 되며, 초헌관은 무조건 국왕이 하도록 되어 있다.
- 서계(誓戒) : 대제가 있기 7일 전에 제관으로 뽑힌 관헌들이 의정부에 모여서 서약하던 일
- 재계(齋戒) : 제사를 올리기 전에 심신을 깨끗이 하고 금기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일. . 재(齋)는 청정(淸淨), 계(戒)는 청정하게 하는 규범이란 뜻이다. 결재(潔齋)라고도 한다.
- 희생(犧牲) : 집단 성원의 안녕과 동식물의 증식을 기원하여 행하는 종교적 행위
- 전폐(奠幣) : 제사 때에 헌관(獻官)이 집사자에게 폐백을 받아서 신위(神位) 앞에 드리는 일
- 진숙(進熟) : 제사 때에, 익힌 음식을 올림
▼[전향례] : 사직대제 하루 전에 국왕으로부터 향과 축을 받아서 안향청에 안치한다
▼ [거거출궁] 사직대제 아침에 왕과 왕세자가 사직단으로 이동하면서 사직대제는 시작됩니다.
▼ 악공들과 사직대제일무(무용)들이 제단의 아래에서 자리를 잡는다.
▼ 사직대제의 진설
▼ [입취배위] 제관과 관계들이 사직대제가 시작하기 전에 모여있습니다.
▼ 국왕(초헌관)이 서신문에서 어로(御路)을 따라서 판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1. 영신례(迎神禮)
신을 맞이하는 의식으로 제사의 시작과 함께 모든 제관이 4배를 행하는 의식을 말한다. 여러 제관이 각자의 위치에 가서 서게 되면(就位) 제례가 시작되며 , 이에 초헌관이 먼저 4배하면 이에 따라 참석자 전원이 4배를 행한다. 사직제례악은 궁가(宮架)에서 순안지악(順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는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춘다.
2. 전폐례(奠幣禮)
신에게 폐백을 드리는 의식으로 초헌관이 신위 앞에 이르러 세 번 향을 올리고 폐백을 드리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이 의식을 마치면 헌관은 배위로 돌아온다. 그러나 종묘대제는 삼상향과 폐백사이에 관창(灌鬯)하는 의식이 있으며 이를 신관(晨祼)이라 하였다. 졔례악은 등가(登歌)에서 肅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는 열문지무를 춘다.
3. 진숙(進熟)
전폐례와 작헌례 중간에 특정의 제수(祭需)를 진설하는 의식을 말한다.
제례악은 궁가에서 옹안지악(雍安之樂)을 연주한다.
4. 초헌례(初獻禮)
헌관이 신에게 술을 올리는 예로서 삼헌례로 행한다. 초헌 후에는 축관(祝官)이 제사의 연유를 고하는 독축(讀祝)이 있다. 초헌의 술은 예제(醴齊)를 사용한다.
제례악은 등가에서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는 열문지무를 춘다.
- 초헌레는 국왕이 하도록 되어 있다
5. 아헌례(亞獻禮)
헌관이 신에게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예로 절차는 초헌과 같으나 축문을 읽지 않는다. 아헌의 술은 앙제(盎齊)를 사용한다.
제례악은 궁가에서 수안지악(壽安之樂)을 연주하고, 일무는 소무지무(昭武之舞)를 춘다.
※ 아헌례는 왕세자가 한다
6. 종헌례(終獻禮)
헌관이 신에게 세 번째 술을 올리는 예로 절차와 제례악 그리고 일무는 아헌과 같다. 종헌의 술은 청주(淸酒)를 사용한다.
종헌례는 고위당상관이 한다고 합니다
7. 음복례(음복례)
초헌관이 복주(福酒)를 마시는 예를 말하며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겸하며 음복수조 후에 복위(復位)하여 사배한다.
8. 철변두(撤邊豆)
제사에 쓰인 제물(祭物)을 거두워 들이는 예이지만 변두(邊豆)를 조금 옮겨놓는다. 제례악은 등가에서 옹안지악을 연주한다.
9. 송신례(送神禮)
제사에 사용한 변두를 철수한 후 복위하여 4배를 하는 예를 말한다.
제례악은 궁가에서 순안지악을 연주한다.
10. 망료(望燎)
송신례가 끝난 뒤 축(祝 )과 폐백(幣帛)을 불사르는 예를 말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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