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발생지였던 중국에서도 그 흔적이 없어졌다고 할 정도로 희미해진 공자의 이념과 그 제사시설, 유교의 이념을 가르쳤던 성균관을 찾아보았습니다.

 

유교는 중국(주나라)의 공자가 만든 교육의 틀이며, 고려말에서 조선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던 교육의 이념이었으며, 조선에서는 통치의 이념으로서, 크게 확장을 하였으며 ,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학문과, 규범의 국가, 국민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학문과 통치의 이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성균관대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입석에 1398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자리에 태조 7년에 성균관을 세웠으므로 지금의 성균관대학교가 과거의 성균관의 역사까지 이어 가고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 영조가 궁궐 앞도 아니고,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운 이유는 앞으로 고위 관료가 될 학생들에게 당파싸움은 소인배들이 하는 짓이다라고 미리 경고하는 뜻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영조도 그 뿌리 깊은 붕당정치를 없애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노론의 후원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결국에는 다시 노론에 기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영조의 어진

 

▼탕평비에는 ”周而不比(주이불비), 乃君子之公心(내군자지공심), 比而不周(비이불주), 寔小人之私意(식소인지사의)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원문은 예기에 나오는 내용이며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삿된 마음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영조가 등극한 지 18년이 되는 해(1742년)에 사도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하여 직접 글씨를 내렸다고 하는데, 사도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뻐하며, 그동안 어지간히 골치가 아팠으므로 앞으로 고위 공무원이 돼야 할 유생들에게 잘 생각하라고 성균관 앞에 세웠습니다.

 

▼ 탕평비각옆에 세워진 하마비는 다른 하마비 보다 무척 큽니다. 1519년 기묘년(己卯年)인 중종 14년(中宗14年) 4월에 세운 하마비입니다.

 

하마비 앞면에는 '대소인원 과차자 개하마(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라 적혀 있다. 공자를 모신 성역이니 모두 말에서 내려서 예의를 갖추시오! 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문화재들을 보면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옮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탕평비와 하마비도 원래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 성균관대학교로 들어가는 진입로이며, 보통의 대학교로 들어가는 길이면, 무척 붐빌 것인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합니다.  좀 멀어서 그런지 학생들은 대부분 셔틀버스를 타고 드나드는 것 같습니다.

 

▼ 삼문이며,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항상 닫혀 있습니다. 왕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며, 신문(神門)입니다

 

▼ [자료] 개성 성균관의 신문입니다

 

▼ 서울의 성균관은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즉 사당인 대성전은 앞에, 공부를 하는 명륜당은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지방의 향교도 규모는 작지만 기본 배치는 비숫합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성균관의 교육기능이 없어지면서 제사기능만 남아 보통은 문묘(文廟)라고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전체를 복원하였으므로 서울 성균관이라고 해야 맞을 듯합니다.

 

성균관은 개성에도 있습니다(고려시대에 개성에 건립한 성균관이 있습니다)

 

▼ [자료] 참고로 개성의 성균관을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조선은 중국에서 건너온 두 사람의 제사시설이 있는데,  문묘(文廟)와, 무묘(武廟)입니다. 문묘에서는 공자를, 무묘에서는 관우를 제향 했는데, 좋은 사상과 학문은 받아들여서 한층 더 발전시키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나, 제사에 까지 한 국가의 힘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자료:네이버(두피디아)] 안내판의 그림보다도 더 이해가 빠르고 자세한 그림입니다

▼ 동문이라고 하는데, 학생들이 드나들었던 문이며, 국왕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습니다.

 

▼ 먼저 문묘의 안내 그림을 보겠습니다. 대성전(大成殿)은 공자에 제향 하는 시설로서, 유교를 가르치는 모든 시설에는 기본적으로 있습니다. 문선왕묘(공자사당)를 줄여서 보통 문묘(文廟)라고 합니다. 지방의 향교에도 기본적인 구조는 같습니다

 

그림의 아래를 자세히 보면 삼문 양쪽에 작은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말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합니다

 

▼ 문묘묘정비각[文廟廟庭碑閣]이며, 1409년(태종 9)에 당시 예문관 제학이었던 변계량이 왕의 명을 받아 문묘의 창건과 중건에 대한 내용을 비문으로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한때 연산군은 문묘를 폐쇄하려고 묘정비를 도성문 밖으로 버렸으나 1507년(중종 2) 본래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 문묘의 정문으로 삼문형이며 신문(神門)의 성격을 가집니다. 신문에서 대성전 앞까지 신로(神路)가 한 줄로 이어져 있습니다. 즉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닙니다.

 

▼ 삼문에서 바라보는 대성전입니다. 소나무는 대성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 일제강점기 때의 대성전 사진엽서입니다.

 

▼ [자료;서울시] 문묘의 석전대제( 釋奠大祭)의 모습을 일제강점기때의 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석전대제( 釋奠大祭)釋奠大祭) 대성전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과 선현(先賢)들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

 

▼ [자료] 현대의 석전대제의 자료사진입니다

 

▼ [자료] 언뜻 보면 엄청 복잡한 그림인데, 대성전에 위판을 모실 때 배치원칙이다라고 보면될 듯합니다. 좌, 우로는 신라에서부터 조선의 이름 있는 성현들의 이름이 보이는데, 엄청난 영광이었겠습니다.

 

좌, 우의 한국18현(韓國18賢)의 위패는 원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있었는데 1949년 유림회의 때 대성전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 향나무도 있지만 무척 오래되어 보이는 느티나무도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 문묘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입니다. 현재 내부에는 비어 있습니다

 

▼ [자료:조선고적도보]  동무(東廡)의 내부모습입니다. 제사에 너무 진심이었던 조선의 단면을 잘 보여 주는 사진이며, 수없이 많은 위패들이 있습니다.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제자, 중국(한·당·송·원나라)의 역대 현인, 한국의 명현 등 총 112인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었는데, 1949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로 한국 18현(賢)의 위패는 대성전으로 옮겼고 나머지는 다른 곳으로 옮겨 현재는 위패를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 전사청 문 앞에서 바라보는 대성전 마당입니다

 

▼ 대성전의 옆에 있는 전사청입니다. 왼쪽은 수복방(수복청)과 제기고로 들어가는 문이고, 오른쪽 문은 전사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 수복청의 현판이 대학당(戴學堂)으로 붙어 있네요...

 

▼ [자료] 대학당(戴學堂)

 

▼ 좌측은 제기고입니다

 

▼ [자료]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이며, 제기고에 보관되는 석존대제에 쓰이던 제기들입니다

 

▼ 문묘에서 수복당이 그나마 멋진 곳입니다. 협문으로 들어가면 전사청입니다

 

▼ 전사청의 부속건물로 보이며, 오른쪽의 전사청은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 명륜당에서 바라보는 대성전 마당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른쪽의 비석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었습니다. 양 옆으로 동재, 서재가 있습니다.

 

▼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입니다. 조선시대에 성균관의 학생수는 대략 2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을 뒷 바라지하는 노비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약 3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 [자료:조선고적도보] 동재에서 식당으로 가는 문 앞에 북이 걸려 있는데, 하루에 두 번(아침, 저녁) 유생들의 식사시간을 알렸다고 합니다

 

▼ 유생들의 기숙사 서재입니다.

 

▼ 성균관 대성전 앞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을 정도로 무척 오래된 고목입니다. 보통 은행나무는 1000년 이상 사는데, 그것도 두 그루가 붙어 있으며, 은행나무와 유교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 유교를 가르치는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에는 은행나무가 꼭 있을까? 하는 의문은 공자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행단(杏;살구나무 행, 壇)에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 행(杏)자를 은행(銀杏)나무로 받아들여서, 성균관에는 물론 향교, 서원에 꼭 심었다고 합니다

 

▼ 명륜당의 건축구조는 중앙에 강당이 있고, 좌,우로 익랑이 붙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무척 당당한 건축물입니다

 

▼ 명륜당에는 원래 창호가 붙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관리상 창호는 부착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조선고적도보] 명륜당의 일제강점기 초기(1920년대)로 추정되는 모습입니다

 

▼ [자료] 명륜당 앞마당이 일본식으로 정원처럼 바뀌었습니다.

 

▼ 동익랑의 모습이며, 소강학당으로서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중앙의 강당으로 수없이 많은 현판들이 걸려 있습니다.

 

▼ 명륜당의 뒤에 보면 두 채의 건물이 있는데, 존경각(왼쪽)과 육일각(오른쪽)입니다.

 

존경각은 책의 저장고로서 지금의 도서관 비슷한데 다만 책만 빌려주고, 받는 곳이며, 육일각은 활과 화살들을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

 

▼ 동재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작은 북이 하나 달려 있는데, 하루 두 번(아침,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북입니다

 

▼ 동재 안쪽에서 보면 왼쪽이 진사식당, 오른쪽이 동재입니다

 

▼ 동재는 왼쪽이며, 작은 방들이 연결되어 있고, 툇마루가 이어져 있습니다. 오른쪽은 진사식당입니다.

 

▼ 동재의 툇마루와 방의 모습입니다

 

▼ 학생들이 밝고 툇마루에 올랐을 댓돌입니다

 

▼ 방의 크기는 3명 정도 누울 수 있습니다.

 

▼ [자료:조선고적도보] 진사식당의 내부 모습입니다.

 

▼ 식당에 웬 가마가 ???

 

▼ 진사식당 주위에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하는 건물들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먼저 정록청으로 들아가 보겠습니다

 

▼ 서울 성균관은 제향구역인 대성전 구역과 강학구역인 명륜당 구역(강학 구역_성균관)으로 구분되는데, 정록청은 명륜당 구역에 속한 부서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학생들의 학적관리나 각종 시험과 서무의 관리 및 유생들의 생활감독을 했던 곳으로 유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힘 꽤나 쓰던 곳이었습니다

 

정록청은 동재와 진사식당과 붙어 있어서 관원들이 유생들의 생활을 쉽게 감시할 수 있었습니다

 

▼ 명륜당 구역의 깊숙한 곳에 있는 향관청이며, 양쪽에 동월랑, 서월랑이 있습니다. 향관청은 향과 축문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 동월랑, 서월랑은 집무실이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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