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줄여서 동묘(東廟) 또는 무묘(武廟)라고 하며,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관왕)를 모신 사당으로서,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동묘역 근처에 있습니다.

 

관우의 사당은 한양도성의 4곳(동,서,남,북, 중)에 모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철거되었으며, 동관왕묘만 남았습니다.

 

- 남묘 : 남관왕묘(남산->사당동) - 선조때 건립(1598년, 선조 31년)

- 동묘 : 동관왕묘(동대문 밖 신길동) - 선조때 건립(1601년, 선조 34년)

- 서묘 : 서관왕묘(천연동,숭의묘) - 고종(1903년, 광무원년) 건립됨(1909년 동묘와 합침)

- 북묘 : 북관왕묘(명륜동) - 고종(1902년, 광무 6년) 건립(1913년 동묘와 합침)

 

※ 조선(선조 31년,32년)에서 공식적으로 지방에도 관왕묘를 건립하였는데, 성주, 안동, 남원, 강진의 네 곳입니다. 고종 때 추가로 전주 하동등에  건립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 조선의 고종은 망해가는 나라를 위해서 추가로 서묘, 북묘를 건립하였는데, 굳이 관우의 사당을 건립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관우의 힘을 빌려 볼까 했지만 결국은 대한제국(조선)은 망했습니다

 

관우의 사당(관왕묘)이 조선에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중이며, 명나라의 장수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관우의 사당을 건립하라고 조선 조정에 압력을 넣었는데, 처음에는 1598년(선조 31년) 처음으로 서울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습니다.

 

남관왕묘가 건립된 3년 이후(선조 34년, 1601년)에 명나라 장수들은 또다시 관왕묘 건립을 강요하여, 동쪽에 동관왕묘가 건립되었으며,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에 많은 비용과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부담하게 하였습니다.

 

※ 인용된 자료사진은 문화재청, e뮤지엄, 한국민족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동관왕묘가 아닌 동묘공원으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 [자료사진:서울시]  겸재정선이 그린 동문조도(東門祖道)에서 보면 동대문(흥인지문)밖에 동관왕묘가 보입니다.

 

▼ 동묘의 정문인 외삼문입니다.

 

▼ 동묘는 전체적으로 5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삼문, 내삼문, 정전, 그리고 동무, 서무입니다


▼ [자료사진] 동묘보다 3년 먼저 세워진 남묘의 흑백사진을 여러 장 보겠습니다

 

- 남묘의 1884년~1885년도의 사진입니다

 

- 1891년의 남묘의 사진입니다

 

- 남묘의 외삼문이며, 관왕묘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남묘를 건립할 때 명나라 장수들은 건축, 미장들만 조선인들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직접 만들었다고 합니다.

 

- 남묘의 어막대에서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 남묘의 어막대 사진이며, 사람이 사자상에 앉아 있는 곳이 어막대 계단입니다.

 

- 남묘의 어막대 사진으로, 사자상이 좌우로 있는데, 완전히 중국식입니다. 석조물들은 전부 명나라 군인들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 중국인(당시 명나라)들이 만든것으로 보이는 사자상이라는데 보기에는 거북상(?)처럼 보입니다

 

- 남묘의 정전이며, 두채의 건물을 맞붙여 놓은 중국식 사찰의 건물입니다. 동묘의 건축양식도 비슷합니다

 

- 남묘의 내삼문에서 바라보는 정전입니다. 특이하게 가림천으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 남묘의 정전 앞이며, 왼쪽에 등명대(등롱대), 오른쪽에는 돌로 만든 그릇과 받침대가 보입니다. 그릇은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던 향로로 추정이 됩니다.

 

- 남묘의 정전내부입니다. 왼쪽을 자세히 보면 등을 받치는 돌이 보이고, 그 위에 등이 보입니다. 


▼ [자료사진] 다음은 북묘의 자료사진을 보겠습니다.

 

※ 북관왕묘는 무당 진령군(眞靈君)과 그의 정치적 후원자 명성황후(明成皇后)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어 1883년에 완공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고종은 갑신정변 당시 북관왕묘로 피난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 북묘의 정전입니다

 

- 북묘의 등명대(등롱대)이며, 지금은 동묘 정전 앞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 북묘정전의 내부입니다

 

- 북묘비각입니다

 

- 북묘비각안에 있었던 북묘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옥외)에 있습니다. 1887년 고종은 자신이 비문을 짓고 민영환이 글씨를 쓴 북묘 비를 세워 북관왕묘의 건립 내력과 의의를 밝혔습니다.


▼ 다음은 서묘의 자료사진을 여러 장 보겠습니다

 

- 서묘는 숭의묘라고 하였습니다. 이 서묘는 1903년에 건립되어 1904년 첫 봉안의식을 행하였으며, 4년 후인 1908년 국가에서 지내는 모든 제사를 폐지하면서 제사는 중지되었습니다. 1909년에는 동묘와 합사 되었으며, 서묘 건물은 그다음 해 1910년~1912년 까지 제중원 양육부(경성고아원), 1913년~1931년에는 제중원 맹아부(국립맹아학교전신)로 사용되었다가 헐리고 지금은 일반 주택가로 변했습니다.

 

▼ 서묘였던 제중원 양육부(1910~1912)를 방문하는 영친왕부부(네모점선)이며, 이 제중원 양육부는 1913년 ~ 1933년까지 제중원 맹아부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 숭의묘(서묘)에는 4장군(유비,제갈량,관우,장비)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 숭의묘(서묘)의 유비,관우,장비의 형상입니다.


▼ 이제 동묘의 외삼문에 들어와서 보는 내삼문옆에는 어막대 정비공사 중으로, 가림막을 쳐 놓았습니다.

 

▼ 최근에 정비공사가 끝난 어막대의 모습이며, 사자상 하나는 새로 복제했는데 모양은 중국풍입니다. 특별하게 안내문은 없는데, 추정하여 보면 아마도 어막대(왕이 잠시 기다리는 곳)가 아닌가 싶습니다

※ 어막대(御幕臺)는 국왕이 제사를 지내러 와서 잠시 머무는 곳이며, 아마도 차양막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사진에서 보면 정비공사전의 사진이며, 건물은 화장실입니다. 정비공사를 하면서 화장실은 없앴으며, 화장실은 동묘밖에 있습니다.

 

▼ 6월 중에 오면 배롱나무꽃이 멋지게 핀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자료사진] 1903년 서울 동관왕묘(촬영자 Herbert Ponting )이며, 현재 하마비 자리입니다. 하마비는 관왕묘 밖에 있었는데, 어느 날 동묘 내부에 옮겨졌습니다.

 

▼ [자료사진:일제강점기]  현재 하마비 자리의 사진이며, 어막대 위치가 지금보다 내삼문 옅에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 내삼문 옆에는 수복방이 붙어 있습니다.

 

▼ 하마비와 금잡인비는 외삼문 밖에 있었는데, 보존 및 관리 편의상 동묘 내부로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 수복방 앞에 보이는 구멍 뚫린 돌은 나무깃대를 고정하던 것으로 절에서 사용하던 당간지주처럼 깃대를 고정하던 석주(石柱)였습니다

 

▼ [자료사진:일제강점기]  동관왕묘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기둥(하얀색 점선상자)이 보입니다. 아마도 깃발을 매달았던 기둥처럼 보입니다. 지금 석주만 남았습니다. 하마비도 보이는데, 하마비는 내부로 옮겨져 있습니다.

 

▼ 내삼문안으로 들어갑니다.

 

▼ 내삼문은 문이라기보다는 마치 정자처럼 크고 넓어서 쉬어 가기에는 좋아 보입니다.

 

▼ 동묘는 북묘보다 나중에 지어지고, 명나라 사람들의 입김이 덜하던 시기여서 그런지, 그나마 조선의 건축미가 느껴집니다. 정전앞에 향나무가 두그루가 보이는데, 제사시설에는 향나무구 꼭 있었습니다

 

▼ 서무입니다. 비석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들이 들어 있습니다.

 

▼ 동무입니다

 

▼ 동무앞에서 보는 내삼문과, 서무의 모습입니다.

 

▼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제사시설입니다.

 

▼ 현성전(정전)의 뒷모습입니다

 

▼ 동무(東武)입니다.

 

▼ 정전 앞에 계단 좌, 우로 있는 사자상입니다.

 

▼ 치미와 잡상인데, 중국건물에 에 있는 잡상들보다 조선의 잡상이 훨씬 정감이 좋습니다. 

 

▼ 정전의 처마밑에는 두 개의 현판이 보이며,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는 글씨가 있는데, 고종이 추증한 관우의 시호입니다만, 두 현판의 글씨가 같습니다.

 

두개중 하나는 원래 동묘의 현판이고, 다른 하나는 북묘의 현판입니다만, 어느 것이 북묘의 현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북묘가 동묘와 합묘(合廟)할 때 오른쪽에 부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 정전 앞에 세어져 있는 석물은 등명대 또는 등롱대(燈籠臺)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등불을 올려놓는 등(燈) 받침석입니다. 등명대 왼쪽에 놓여 있는 석물들은 원래 북묘에 있을 때는 없었는데, 북묘를 동묘와 합사 하면서 그냥 놓아둔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사진] 등명대(등롱대) 위에 등이 얹혀있는 사진이며, 남묘의 자료사진입니다

 

▼ 등명대(등롱대)의 주위에는 여러 글씨들이 각서 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등명대(등롱대)앞에 돌그릇이 보이는데, 자료에서 보면 드무(물그릇)라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제사 때 향을 피우전 중국식 향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료사진에서 보면 등명대는 왼쪽에 향로는 오른쪽에 있는데,  동묘에서는 합쳐져 있습니다

 

▼ 상단에 성수만년(聖壽萬年), 즉 군왕의 장수를 축원한다는 뜻인데, 고종(?), 관우(?) 누구의 만수를 비는 것인지...

 

▼ 白木廛進上(백목전진상); 서울의 포목상들이 만들어 바치면서 새긴 것으로 뜻을 풀이합니다

 

▼ 광서14년무자시월일(光緖十四年戊子十月日), 즉 1888년 10월, 고종 25년에 만들어졌으며, 북관왕묘 건립 5년 후입니다

※ 광서 연호는 청나라 덕종 재위기간에 사용한 연호입니다

 

▼ 동묘의 정전은 현성전(賢聖殿)이라고 하며, 곳곳에 현판과 주련들이 아주 많이 붙어 있습니다. 정전 가운데 붙어 있는 현판에는 현령소덕무안왕묘(顯靈昭德武安王廟)의 현판이 붙어 있으며, 영조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 현성전(賢聖殿) 내부에서 보면 중앙에 관우상 좌우에는 형주에서 관우를 보셨던 관평과, 조루, 조창과 왕보의 상입니다

 

▼ 현성전(賢聖殿) 안에서 내삼문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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