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普信閣)은 종각이라고 하였으나, 1895년(고종 32년)에 고종이 보신각이란 편액을 내리면서 보신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종각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도성의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기 위해서 처음 지어졌으며, 조선 세조 때 원각사(지금의 탑골공원)에 걸기 위해서 만들었던 종을 광해군 11년(1619년)에 지금의 보신각터에 옮겼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성문을 닫거나, 열때 종을 쳤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정오를 알릴 때에 종을 쳤을 것으로 보이고, 해방 후에는 매년 12월 31일 밤 12시에 행사용으로 종을 치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매년 타종식(제야의 종)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초기 태조때의 종각(鐘閣)은 단층이었으며, 조선 세종 때에 동서 5칸, 남북 4칸의 2층 누각 형태로 다시 지어졌으나, 수차례 불이 나서 현재까지 10여차례의 새로 지은 기록이 보입니다.
지금의 종루는 조선 세종때의 크기로, 1979년 8월에 화재에 강한 콘크리트 건물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또한 걸려 있는 종은 국민의 성금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져서 1985년 광복절에 처음 타종하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보신각종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종의 몸통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종을 칠 수 없게 되자, 국립중앙박물관(용산) 야외로 옮겼습니다.
▣ 나무위키에서 인용한 자료를 년도별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 1396년(태조 5년) : 경기도 광주에서 만든 종을 청운교 서쪽(인사동)에 종루(단층)를 설치한 것이 시초이다.
2) 1413년(태종 13년) : 종루(2층)를 새로 짓고 위치를 통운교(現 종로 네거리) 쪽으로 옮겼다.
3) 1440년(세종 22년) : 기존의 종루를 헐고 동서 5간 남북 4간에 2층으로 고쳐 지었다
4) 1458년(세조 7년) : 새로 대종(大鐘)을 만들어서 설치
5) 1592년(선조 25년) : 임진왜란으로 종루는 소실되고 대종도 파괴되었다.
6) 1619년(광해군 11년) : 종각을 단층으로 다시 짓고, 원각사(圓覺寺)의 종을 옮겨 달았다
※ 원래 이 종은 원각사(圓覺寺)에 있었지만 연산군 10년(1504년)에 원각사를 폐찰했을 때 원각사터에 남아 있던 종을 중종 31년(1536)에 숭례문 안으로 옮겼고, 선조 30년(1597) 임진왜란 때문에 다시 명례동 고개로 옮겼던 것을 광해군 때 종각을 복구하면서 이동시켰다.
8) 1686년(속종12년) : 화재로 종각이 불에 타버림
7) 1864년(고종원년) : 4월 19일 새벽에 시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종각이 전부 타버렸다
8) 1864년(고종원년) : 5월 24일에 종각을 다시 지었다.
9) 1869년(고종 6년) : 9월 4일 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종각이 타버렸다.
10)1869년(고종 6년) : 10월 29일에 종각을 다시 지었다.
11)1895년(고종 32년) : 고종이 보신각(普信閣) 글씨의 편액을 내려서 종각 앞에 달았다
12)1915년 : 도로를 넓히면서 종루를 뒤로 물림
12)1950년 : 6.25 전쟁 중에 종각이 불에 타버림(종은 살아남음)
12) 1953년 12월 : 도로를 넓히면서 뒤로 물러남
12)1979년 4월 : 종의 균열이 발갼되어 경복궁으로 옮김
12)1979년 8월 : 종각을 다시 뒤로 물려 종각을 2층 누각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로 다시 지어졌다.
13)1985년 8월 15일 : 새로 주조된 동종의 타종식
※ 보신각 종루는 일제강점기와 근대의 급격한 변화를 거듭하면서 여러번 원래의 자리에서 수십 미터 물러나 있습니다
※ 인용된 자료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e뮤지엄), 서울시청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종로에 가기 전에 만나는 청계천은 조선이 도읍을 한양에 정할 때부터, 홍수 때문에 골칫거리였으며, 근대화 시기에는 급격한 도시팽창으로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덮어 버리고, 그 위에 고가도로를 건설하여 물길의 없어지고 오염이 심해졌으나, 그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때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고가도로를 없애고 깨끗한 물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 종루가 처음 설치된 곳은 1396년(태조 5) 지금의 인사동 종루를 짓고 종을 걸어 종소리에 따라 각 성문을 열고 닫게 하였습니다.
- 새벽종은 파루(罷漏)라 하여 오전 4시경 33천(天)에 고하는 뜻으로 33번을 쳐서 성문을 열었고,
- 저녁종은 인정(人定)이라 하여 오후 7시경 28수(宿)를 뜻하는 28번을 쳐서 성문을 닫았습니다.
- 또 도성 안에 큰 화재가 나도 종을 쳐서 주민들에게 알렸습니다.
▼ 보신각이란 이름은 1895년(고종 32)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그 이전에는 종루(鐘樓)가 여러 번 이동이 있었습니다. 조선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지금의 인사동에 처음 단층으로 종루를 지었으며, 세종 22년(1440년)에는 종전의 단층종루를 헐고 동서 5칸, 남북 4칸의 2층 형태로 다시 짓고 종은 2층에 매달았으며, 누각 아래로는 인마(人馬)가 다니게 하였다고 합니다.
▼ 종각(종루)은 종로의 교통량이 빈번해짐에 따라 길을 크게 할 때마다 여러 번 길옆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1979년에 지금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신각(普信閣)의 현판은 고종 32년(1895년)에 처음 걸었습니다
▼ [자료사진:서울시] 야경사진으로 보면 종루에 걸려 있는 종이 잘 보입니다.
▼ [자료사진:e뮤지엄] 일제강점기 때의 보신각의 사진을 여러장 보겠습니다. 종로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무척 붐비는 곳입니다.
▼ [자료사진:e뮤지엄] 일제 강점기때의 유리건판 사진으로 보는 보신각인데, 이 종각은 1869년(고종 6년) 운종가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종루는 시전(시장) 건물과 더불어 소실되었는데, 그해 10월에 다시 건립되었고, 화재 후 26년 만에 고종이 1895년 3월 15일 ‘普信閣(보신각)’이라는 현판을 내려 이때부터 보신각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때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었습니다.
▼ 종각(보신각) 옆길에는 시장이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상시적인 시장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에서 보면 종각옆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시장에서 불이 나면 종각도 불에 타버리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 보신각 앞에 자세히 보면 전차선로가 보입니다. 그때도 종각역이라고 했을까요?
▼ [자료사진:e뮤지엄] 일제강점기 때의 번화한 모습의 종로이며 동대문방향을 보고 찍었습니다. 일제는 1920년대부터 조선의 식민지가 정착되었다고 보고, 선전용으로 여러 방면으로 사진엽서, 그림엽서를 발행하였는데, 해방이 되기 전까지 엽서의 발행은 계속되었습니다.
▼ [자료:연합뉴스] 6.25 전쟁 중에 종각이 불에 타 버렸으나, 다행히 살아남은 보신각종입니다.
▼ 보신각종은 더 이상 타종을 하게 되면, 깨질 위험성이 있어서 잠시 경복궁에 보관하였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종각을 짓고 옮겨왔습니다.
▼ 6.25 전쟁 때(1951년) 종각이 불에 타버렸지만, 동종은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이 보신각 종은 무척 큰 크기인데, 높이 318cm, 입지름 228cm이며, 경주의 성덕대왕신종과 비교해 보면 (높이 375㎝, 입지름 227㎝), 키 높이는 작지만, 입지름은 거의 비슷한 크기입니다.
▼ [자료사진:서울시] 지금의 종루는 1979년에 조선 세종 때의 크기로 다시 지었으며, 1985년에는 동종도 새로 만들어서 걸었습니다. 다만, 원래의 보신각종을 복제하지 않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 왼쪽의 보신각종과 현재의 종루에 걸려 있는 동종을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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