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과 탑비는 고려시대의 승려 홍법국사의 유골을 봉안한 승탑과 홍법국사의 업적을 기리는 탑비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 탑은 본래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의 정토사 터에 있었던 것으로, 1915년에 탑비(塔碑)와 함께 현 위치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홍법국사(신라말~고려초)는 통일신라 신덕왕대(53대; 912~917)에 태어나 12살의 나이에 출가하였고, 당나라를 다녀온 뒤 선(禪)을 크게 일으켰으며,그 후 정토사에 머물다 입적 하였습니다

▼ 승탑과 탑비가 나란히 있는 모습인데, 일반적으로 이렇게 같이 세워져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원래 부터 마주 보고 있다기 보다는 사찰 경내의 지근 거리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은 승려 홍법국사의 유골을 봉안한 승탑(부도)이며,  국보로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탑은 본래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의 정토사 터에 있었던 것으로, 1915년에 탑비(塔碑)와 함께 현 위치로 옮겨왔다. 전체적인 구성에서 신라시대 이래의 석조 부도(石造浮屠) 양식의 전형인 팔각원당(八角圓堂)의 기본형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에 새로운 창안을 가미한 작품이다.
 
한편, 특이한 석재에서 오는 질감도 있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감을 준다. 건립 연대는 바로 옆에 서 있는 탑비의 비문에 따르면 홍법국사가 입적한 해가 고려 현종 8년(1017)이므로 상한 연대를 이때로 보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忠州淨土寺址弘法國師塔))]

 

□ 소재지 :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 출토지 : 충주 정토사지

□ 크   기 : 높이 2.55m. 

□ 분   류 : 국보

□ 시   대 : 고려 현종 8년(1017년) 추정

 

▼ 일제강점기때의 자료사진인데,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문화재에도 가차 없는 발굴조사를 많이 했는데, 그때 정토사지의 초석을 발굴하는 모습의 사진들 입니다-e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발굴조사때 출토된 와편에서 정토사(淨土寺)의 명문이 발견되었습니다

 

▼ 정토사지에 있었을때의 홍법국사탑의 모습입니다.

 

▼ 자료사진에서 보면 홍법국사탑이 웬 가정집 안에 놓여져 있는데, 여래좌상도 보이고, 뒷쪽에는 석등 같은 것도 보입니다. 1915년에 정토사지에서 경복궁으로 직접 옮겨진것이 아니라 어느 일본인 집에 있다가 경복궁으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경복궁 조선총독부 박물관 앞에 있는 홍법국사탑과 탑비의 모습입니다.

 

▼ 홍법국사탑의 모양을 먼저 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승탑의 모양을 볼때 사리를 넣어 두는 탑신의 모양이 팔각면이 아닌 공 모양으로 둥굴게 처리 하였습니다.

 

▼ 승탑의 재질은 일반 화강암이 아닌 흑줄이 들어 있는 대리석으로 흔치 않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정토사지 홍법국사의 자세한 설명 입니다.

8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이 장식된 복련석을 얹었고, 8각 중대석 각 면에는 고려시대 특유의 네모난 안상(眼象) 속에 운룡문(雲龍文)이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상대석(上臺石)은 얇고 원형에 가까운데, 밑에는 앙련(仰蓮)을 조각하였고 연판 안은 다시 화문을 장식하였다.
상대석 상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8각으로 낮은 1단이 있고 중앙에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이 부도탑에서 가장 특징 있는 부분으로서 원구형을 이루고 있다. 표면에는 중앙에서 2조의 양각선을 가로로 두르고 다시 상하를 十자로 맺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모양을 두어 단조로운 표면을 장식하였다.
옥개석에는 별다른 조식은 없으나, 8각 귀퉁이에 귀꽃이 있어 주목된다. 즉,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전각(轉角)마다 높직한 귀꽃을 달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큼직한 수막새와도 같다. 옥개석 하면은 삿갓모양으로 깊숙이 패어서 탑신 위에 놓인 원통형 석재 위에 얹혔고, 그 주위로 활달한 비천(飛天)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이 원구형이 된 것은 다층석탑의 복발형(覆鉢形)에서 얻은 착상인지도 모르지만 기발한 의장이 분명하며, 넓게 퍼진 기단부에서는 여유있는 안정감을 주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忠州淨土寺址弘法國師塔))]

 

▼ 옥개석의 8개 귀꽃은 한개만 남기고 모두 파손 되어 있는데, 그것도 보수 흔적이 보입니다. 아마도 대리석의 특성상 쉽게 파손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상륜부가 옥개석과는 이질감을 보이는데, 원래의 상륜부가 아닌 후보 한 느낌이 납니다. 일제강점기때의 자료사진을 보면, 상륜부가 파손이 되었지만,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는데, 그 모양을 기준 삼아서 다시 만든것으로 보입니다.

 

▼ 옥개석의 하부를 보면 비천상 같은 문양이 보입니다.

 

▼ 기단부의 모습도 대체로 양호하며, 중대석의 문양은 8면의 안상 안에 용 문양이 들어 있습니다

 

▼ 홍법국사의승탑과 탑비를 보면 같은 대리석으로 한쌍이란 것을 알 수 있는 특이한 경우 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승탑과 탑비가 옆에 있지는 않았고, 사찰내의 지근거리에 떨어져 있었을 것 입니다.


다음은 홍법국사탑비의 설명 입니다
 
본래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에 있던 것으로, 1915년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국보)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구로 이전됨에 따라 홍법국사탑과 탑비도 함께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 모두가 완전한데, 부리부리하게 조각한 귀두(龜頭)와 용틀임을 투각한 이수의 작풍이 주목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忠州淨土寺址弘法國師塔卑))]
 
 
□ 소재지 :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 출토지 : 충주 정토사지
□ 크   기 : 전체 높이 375㎝. 비신 높이 222㎝, 너비 105㎝, 두께 22.5㎝
□ 분   류 : 보물
□ 시   대 : 고려 현종 8년(1017년) 추정

 

▼ 일제강점기때의 자료사진으로 보는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 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자료사진으로 보는 홍법국사탑비의 탁본 입니다. 상단에 開天山淨土寺故國師弘法大禪師之碑(개천산정토사고국사홍법대선사지비)’라는 전액(篆額)이 보입니다.

▼ 경복궁에 옮겨졌을때의 모습입니다. 1915년에 개최된 일제의 조선공진박람회때 조선의 폐사지에서 가져온 석탑,승탑, 승타비등이 석물조경용으로 많이 전시 되었습니다. 그후 2005년경 대부분이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되었습니다.

 

▼ 홍법국사의 와 홍법국사탑비의 설명문 입니다

홍법대사는 통일신라 신덕왕대(재위: 912∼917)에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였고, 그 뒤 당나라에 들어가 각지를 편력하고 귀국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의 칭호가 내려지고, 목종 때 국사에 봉하여 봉은사에 머물렀다. 그 뒤 정토사에 기거하다 입적하자, 목종은 시호와 탑명을 내리고 손몽주(孫夢周)에게 비문을 짓게 하여 1017년(현종 8)에 탑비를 건립하였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 ‘實相之塔(실상지탑)’이라는 해서의 제액이 있고, 비신 상단부에는 ‘開天山淨土寺故國師弘法大禪師之碑(개천산정토사고국사홍법대선사지비)’라는 전액(篆額)이 있다. 비문 앞면에는 행적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도들의 직명이 적혀 있는데, 편마암의 비 표면이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 이수 앞면 가운데에 ‘實相之塔(실상지탑)’이라는 해서의 제액이 있습니다. 실상(實相)은 홍법국사가 입적하자 고려 목종이 내린 시호입니다.

 

▼ 충주 정토사지에는 또 다른 탑비가 있는데, 법경대사탑비이며, 일제강점기때의 자료사진입니다. 지금은 충주 정토사지에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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