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승려 진경대사 심희(審希)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부도)입니다.

□ 소재지 :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 출토지 : 창원 봉림사지

□ 크   기 : 높이 2.9m

□ 분   류 : 보물

□ 시   대 : 신라 경명왕7년, 고려 태조6 년(923년)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塔碑,보물)와 함께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봉림사지에 있던 것으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지만, 표면의 장엄조각은 적은 편이어서 석재의 색조와 아울러 청초한 감을 준다.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진경대사가 입적한 해인 923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안상에서 이미 고려시대의 특색이 보이고 있고 각 부의 비례는 양호하나 장엄조각의 수법이 가냘퍼 박력이 적고 전체형태가 고준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등 신라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엿보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昌原鳳林寺址眞鏡大師塔))]

 

▼ 창원 봉림사지에 있을때의 자료사진입니다._이하 자료사진은 e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경복궁에 있을때의 진경대사 보월능공탑과 탑비입니다만,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승탑만 있는데, 탑비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 봉림사지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대체로 다른 승탑의 현란한 기교는 안 보이고, 간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탑신(塔身) 역시 8각으로 우각마다 우주(隅柱)를 모각하고 상하에 횡대를 둘러 마치 면마다 네모난 구획이 있는 듯하나, 장엄조각은 없습니다.

 

▼ 옥개석(屋蓋石)에는 밑의 서까래모양, 낙수면의 기왓골 표현은 없고 다만 우동(隅棟)주 02)이 굵게 표현되었을 뿐이고 8각의 우각마다 큰 귀꽃이 있었으나, 모두 부러졌다. 상륜부(相輪部)는 8엽의 화형을 조각한 앙화와 화염보주(火焰寶珠)를 한 돌로 조각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昌原鳳林寺址眞鏡大師塔))]

 

▼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8각 하대석(下臺石)을 놓았는데, 하대석의 측면에는 큼직한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고 상면에는 모퉁이마다 귀꽃이 장식된 반원형의 테를 두르고 그 안에 작은 연판(蓮瓣)으로 장식된 굄을 마련하였다.

 

중대석(中臺石)은 편구형(扁球形)인데 좌우에서 화형(花形)이 내밀리고 중앙에는 화형이 있는 옆으로 넓은 안상 4구와 이를 연결하는 2줄의 띠장식이 있어 불탑(佛塔)의 복발(覆鉢)과 비슷하다.

 

상대석(上臺石)은 단판중엽(單瓣重葉)의 앙화(仰花) 8송이가 조각되었고 밑에 3단의 받침이 얕게 표현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昌原鳳林寺址眞鏡大師塔))]


다음은 현재 국림중앙박물관에서는 안 보이지만, 자료사진으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아 보겠습니다.(탑비는 아마도 보존처리중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개설
보물 제363호. 전체 높이 337㎝, 비신 높이 171㎝, 너비 99㎝. 비는 924년(경명왕 8)에 건립되었다. 비가 있던 경상남도 창원의 봉림사는 폐사된 연대가 불확실한데, 비는 오래 전에 무너졌다.
 
이수와 귀부(龜趺)는 상태가 좋은 편이나, 비신은 아랫부분 6자부터 절단, 분실되었으므로 보완하여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옛 탁본에 의하여 결실된 부분의 문자를 비음(碑陰)에 새기고, 마지막에 ‘□巳閏七月日重竪此刊(□사윤칠월일중수차간)’이라는 중수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巳’는 1797년(정조 21) 정사(丁巳)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봉림사지(鳳林寺址)에서 진경대사탑(보물 제362호)과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내용
진경대사 심희(審希)는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였던 봉림사의 개조(開祖)로, 비문(碑文)에는 출가 후 명산을 두루 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공경을 받고 국왕들을 귀의시킨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923년 봉림사 선당(禪堂)에서 입적하자, 왕이 ‘진경’이란 시호(諡號)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비문은 경명왕이 직접 지었으며, 글씨는 심희의 문하승(門下僧)인 행기(幸期)가 썼다.
 
글씨는 자경(字徑) 2㎝의 해서(楷書)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이수(螭首)주 02) 가운데 ‘고진경대사비(故眞鏡大師碑)’라는 전액(篆額)은 최치원(崔致遠)의 사촌 동생인 최인연(崔仁渷, 일명 崔彦撝)이 썼다.
 
귀부는 머리가 유난히 크고 입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뿔이 있었던 듯한 작은 구멍이 있다. 등에는 귀갑(龜甲)무늬를 새겼으며 둘레에 구름무늬를 둘렀다. 비좌(碑座) 4면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상단에는 복련(覆蓮)을 배치하여 비신을 얹었다.
 
이수 가운데의 전액을 중심으로 반룡(蟠龍)주 03) 두 마리가 보주(寶珠)를 다투듯 구름무늬에 싸여 있으며, 모퉁이에 각각 한 마리의 용이 표현되었다. 이수 하단에는 2단의 층급을 두고 앙련(仰蓮)을 새겼고, 비신 옆면에는 운룡문(雲龍文)을 새겼다. 이들 조각은 천각(淺刻)의 경향이 있으며, 형식화된 통일신라 후기의 조각 양식을 보여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鳳林寺址眞鏡大師塔碑))]


▼ 일제강점기때의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의 자료사진 입니다-e_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경복궁에 있을때의 모습입니다. 2005년 즈음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습니다만, 현재는 안 보이는데, 보존처리중인 것으로 추정 됩니다.


▼ 다음은 창원 봉림사지에 있었던 삼층석탑의 이력을 알아 보겠습니다

높이 2.7m.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창원군지》에 따르면, 이 석탑은 본래 창원시 봉림동에 있는 봉림사지에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어 부산으로 팔려갔다가 다시 현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관리 소홀로 파괴가 심해지자 1960년창원교육청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여러 차례의 이전을 거치면서 파손되어 현재는 일부 부재와 갑석만을 볼 수 있다. 갑석은 1장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앙에는 각형(角形) 2단의 탑신받침을 조출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창원봉림사지삼층석탑(昌原 鳳林寺址 三層石塔))]

 

▼ 창원 봉림사지 삼층석탑은 창원시 상북초등학교에 있다고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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