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성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있는 해발 165m의 구봉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위치하였고, 시대를 달리하는 테뫼식과 포곡식이 결합되어 축성된 복합식산성이다.
당성은 역사적으로 ‘당항성(黨項城 또는 党項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벽은 구봉산의 정상부와 계곡 쪽으로 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조되었으며, 둘레는 1,200m이고 면적은 157,689㎡이다. 현재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_이하 다음 백과사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화성 당성 방문자센터에서 배포된 자료에는 화성 당성의 자세한 내용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화성 당성은 당항성, 당성으로 불리다가 문화재청 고시에 의하여 화성 당성으로 일원화 되었습니다
▼ 주차장은 적당한 크기로 보여집니다만, 아직은 찾는분들이 별로 없어서 한산합니다. 주차료는 없습니다.
▼ 방문자 안내센터의 모습입니다. 화성 당성의 입장료, 주차료는 없습니다. 화장실은 건물 왼쪽에 있습니다.
▼ 안내자료의 사진에서 보면 화성 당성의 모습이 잘 보입니다. 1차성, 2차성의 구분이 잘 보이는데, 아마도 사진에 그래픽 작업을 더 한것으로 보입니다.
역사적 변천을 보면, 당항성은 본래 백제 지역이었는데,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漢城)을 점령하면서 당성군(唐城郡)이라고 하였고, 551년에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이곳을 차지한 이후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에는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으며, 829년에는 군사적인 거점으로서 당성진(唐城鎭)이 설치되었습니다.
▼ 화성 당성의 발굴유물에서 당(唐)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2015년)되므로서 당성의 위치를 확인해준 중요한 자료도 있었습니다. 그림 지도를 보면 1차성과 2차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데, 성문은 3개로서 남문은 없었습니다. 서문지 위치는 리플릿 자료와 안내판 자료가 틀려서 고쳐 놓았습니다.
▼ 통일신라시대에도 많은 사신과 승려들이 당성을 통하여 중국에 왕래하며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하였고, 중국으로부터 불교와 유교 등의 발달한 문화가 신라에 전래되면서 사상적․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당성은 인적·물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중국의 발달한 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첫 번째 창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 안내센터 뒤로 계단이 보이는데, 우측으로 진행합니다.
▼ 당성사적비가 보이는 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동문지를 만나게 됩니다.
▼ 신라에서는 당과의 교역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금의 해군기지처럼 남쪽에는 청해진, 서쪽에는 당성진을 설치했습니다. 당성진에서 경주까지의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경상북도 실크로드라고 하고, 기념비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화성시 남양읍 일대가 당성진었습니다
▼ 화성사적비를 크게 만들었는데, 오른쪽 아래 기념비를 자세히 보면 사적비를 만든분들이 모두 홍씨입니다. 이분들은 모두 남양홍씨로 추정되는데, 남양홍씨의 시조는 당나라 사람인 홍천하(洪天河)인데, 고구려를 거쳐서 신라인으로 당성지역에 정착하면서 당성홍씨였다가 후손들이 번창하고, 지역이름이 남양으로 바뀌면서 남양홍씨가 되었습니다
▼ 화성 당성의 지도를 보면 좀더 자세하게 성곽을 볼 수 있습니다_화성시 공식블로그에서 인용하였습니다만, 서문지의 위치가 애매 합니다.
인터넷자료나 리플릿자료에는 서문의 위치가 망해루와 북문지 중간으로 나오는데, 현지 안내판에는 1차성과 2차성이 겹치는 지점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현장 성벽에서도 지도에 표시된 서문지에는 성문의 흔적도 없습니다.
▼ 동문지에서 바라보는 성곽(2차성)의 모습이며, 복원된 상태인것으로 보입니다.
▼ 성곽의 조사기간중의 사진입니다_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동문지에서 바라보는 북문지 방향 성곽입니다. 화성 당성은 남문이 없습니다
▼ 동문지입니다. 확실하지가 않아서 추정 동문지라고 합니다.
▼ 동문지에서 계단을 오르면 2차성의 성곽을 보게 됩니다
▼ 2차성의 안내문을 자세히 보면 백제시대때 퇴뫼식으로 축성을 하였다가 고구려 점령기를 지나 신라가 점령하였을때 포곡식으로 산성을 축성하였는데, 성문은 3개이며, 서문은 현문식이고, 동문과 북문은 개거식이었다고 합니다. 서문의 위치가 자료의 위치와 다르게 표시되어 있습니다만, 현재의 안내판 표시가 정확한것으로 보입니다.
▼ 성곽을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보는 모습입니다. 멀리 보이는 도시는 사강읍입니다.
▼ 말끔하게 복원된 성곽입니다만, 성 밖의 산책길이 없는것이 흠입니다
▼ 화성 당성에서 바라보는 동쪽 마을의 모습입니다.
▼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당항성이 지금의 화성 당성입니다.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그 당시 당항성의 중요성은 국가 존망의 기로에 있었던 적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은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던 아주 중요한 산성이었지만, 지금은 너 무 오랬적에 있었던 전설같은 역사의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산성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원효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당항성 주위에 도착하였지만, 비바람에 길을 잃고 밤새도록 헤매던 차에 잠깐 잠이 들었고, 목이 말라서 그롯에 있던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깨어 보니 물그릇은 해골이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의 장소가 바로 당항성이었다고 합니다.
▼ 구봉산 정상 부근의 모습입니다. 자료를 보면 1차성과 2차성이 겹치는 부분입니다.
▼ 구봉산 정상을 중심으로 1차성인 퇴뫼식 산성입니다. 아마도 현재 산책길에 설치한 하얀색의 밧줄이 1차성 구간인것으로 보입니다.
▼ 퇴뫼식 산성의 지휘부가 있었던 망해루에는 8개의 건물터가 발굴조사로 발견되었는데, 건물의 형태는 알 수가 없어서 위치 표시만 하였습니다
▼ 8개의 건물터의 모양중에서 유일한 8각형의 건물지가 보입니다
▼ 망해루지의 모습입니다. 퇴뫼식 산성이었을때 지휘소 역활을 하였던 곳에 건물이 있었습니다
▼ 망해루지 옆에는 치성처럼 보이는 곳에 안내 사진이 보입니다. 지금도 서북쪽의 마산포 방향으로는 막힘없이 대부분 잘 보이고, 삼극시대때는 교역 항로가 지금의 마산포였을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 북쪽의 사강읍이 보입니다.
▼ 시화호가 보이고 시화호 건너 안산시가 보입니다.
▼ 마산포 건너서 인천 송도가 보이고 대부도 사이로 수로가 보이는데, 마산포에서 뱃길이 당나라와 연결이 되었을것으로 보입니다. 그 근거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압송되었을때 이 마산포에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조선말기를 보면 흥선 대원군보다 민비와 그 일가의 부패가 더 심했습니다. 마산포 앞바다는 메워져서 논이 되었지만 지명은 아직도 그대로 입니다
▼ 탄도가 아주 잘 보입니다.
▼ 서문지에서 바라보는 망해루지 입니다.
▼ 서문지에서 1차성 발굴조사 현장이나, 신흥사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 기와를 발굴조사후에 모아 놓았습니다. 백제,고구려, 신라의 기와가 섞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 서문지입니다. 화성 당성 자료에는 서문지의 위치가 북문지 방향의 장소에 표시되어 있는데, 현지 안내판에는 여기가 서문지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화성시에서는 확인이 필요 합니다
▼ 1차성 내부의 길입니다만, 주변에 1차성 발굴작업하는 모습이나, 성곽의 모습은 못봤습니다
▼ 2차성의 북문지로 가는길입니다.
▼ 북문지의 모습입니다.
▼ 북문지는 현문식이 아닌 문루(門樓)가 있던 개거식 성문이었습니다
▼ 동문지로 가는 성곽의 모습입니다.
▼ 성곽위에서 처음 출발했던 동문지가 보입니다.
▼ 동문지 근처에는 집수시설지가 있습니다. 발굴조사후에 방치해서 그런지 잡목이 가득해서 접근이 불가 했습니다
▼ 당성의 식수 및 용수를 책임지던 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여러 종류의 그릇이 발굴되었습니다 태정 14년이라는 기와가 발굴되었다는데, 태정 14년은 고려 충숙왕14년입니다.
▼ 집수지 발굴모습의 자료 사진입니다. 당성을 이용하던 백제, 고구려, 신라의 그릇은 물론 당나라의 그릇들도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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