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면천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제91호로서 당진시 면천면 성상리에 있는 조선시대 면천현의 읍성이며, 성의 둘레는 약 1,330m이고, 네모난 타원형의 모습입니다.

 

조선 초기 해안지역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며, 남문·동문·서문이 있습니다. 조선초기 세종21년(1439년)에 평지에 세운 치성(治城)이었으며, 평지에 성을 만든 이유는 일본 왜구의 잦은 노략질때문이었습니다.

 

▼ 2020년 현재 면천읍성은 남문(현기루)과 좌/우 성벽구간이 복원되어 있으며, 서쪽치성 부분은 복원공사중입니다. 전체적인 복원이 끝나는 목표시점은 2023년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자료에는 성문이 모두 3개(동문,서문,남문)만 있고 북문은 없는것으로 나옵니다.

 

▼ 남문 옹성의 왼쪽모습이며, 성곽 끝에는 복원공사중인 가림막이 보입니다.

 

▼ 남문 옹성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모습인데, 성곽끝에 까만덮개가 보이는데, 치성을 발굴조사후에 덮어둔것입니다. 언젠가는 복원이 완료되면 다시 와서 성을 한바퀴 돌아볼 생각입니다.

 

▼ 남문(현기루)앞에 옹성을 쌓았는데, 왜구가 성문으로 몰려들어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것입니다. 성문에 몰려드는 적군이나, 성문 좌우 성벽에 접근하는 적군들을 공격하기 쉽게 치성(雉城)같은 역활도 합니다. 수원화성의 화서문이나, 창룡문을 보는듯 합니다

 

▼ 남문 좌/우에 복원된 성곽의 성돌은 원래의 성돌이 아니라 요즘 돌인듯 합니다.  원래의 성돌은 일제시대때 헐어서 저수지 제방을 만든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의 성곽은 대부분 일제때 없어졌는데, 성돌은 대부분 제방을 만들거나, 도시건설 사업으로 허물어졌으며, 그나마 남은 성돌은 민가에서 가져가서 담을 쌓거나, 하수로 정비용으로 쓰여졌습니다

 

▼ 면천읍성을 알려면, 면천면의 역사를 먼저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당진시 면천면은 삼국시대때 옛 백제의 군현으로 내포 지방의 중심이던 곳이며,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후에는 백제 부흥군의 왕도이던 피성()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옛 면천군은 백제 때 혜군(()으로 불렸다. 백제 패망 이후 신라에 속했는데, 신라 경덕왕 때 혜성군()으로 고쳤다. 

 

1290년(고려 충렬왕16년)에 이르러 개국 공신 복지겸의 후손인 복규()가 거란의 침입을 막는데 공이 컸으므로, 지면주사()로 승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서 면천군으로 고쳤다. 조선 시대 면천군은 당진현, 여미현, 신평현 등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던 내포 지방의 거군이었다.

 

면천군은 1895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속현이던 당진현이 당진군으로 승격되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당진군과 합군되어 없어졌다._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남문으로 들어가려면 옹성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적군이라면 이 옹성을 지나가기가 거의 불가능 했을것입니다. 면천읍성의 성문은 동문,서문,남문 이렇게 세개가 있는데, 남문에만 옹성이 있고, 동문과 서문에는 옹성이 없고 문루만 있었습니다.

 

▼ 면천읍성의 구조에 대해서는 1451년 『문종실록』에 “둘레가 3,225자이고, 높이가 12자, 여장()[성가퀴, 성 위에 활 또는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 쌓은 작은 성벽]은 56개이고 여장 높이가 3자, 적대()[성문 양옆에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지키는 방형의 대]가 7개, 문이 3개인데, 2개는 옹성이 없고, 성 안에 우물이 3개가 있고, 성 밖에 해자()[성 밖으로 둘러 판 못]가 파여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_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면천읍성의 남문인 원기루 입니다. 남문구역의 성곽과 함께 2년여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2014년에 복원되었습니다

 

▼ 동쪽방향으로 뻗어 있는 성곽입니다. 성곽을 보면 남문(원기루)와 옹성에만 여장(성가퀴)을 복원했고, 성곽에는 여장없이 복원이 마무리 됬습니다.

 

▼ 무슨 건물인지 안내가 없습니다만, 읍성 내부에 저잣거리를 만드는 과정인듯 합니다

 

▼ 서쪽으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자료에서 보면 성곽밖에 해자를 파고 물을 채웠다고 하는데, 해자는 복원하지 못할것 같습니다.

 

▼ 남문(원기루)위에서 바라보는 옹성입니다.

 

▼ 성곽 끝에서 바라보는 남문과 성곽의 모습입니다. 면천읍성이 모두 복원되면 해미읍성과 비슷한 빛을 보게될것입니다. 해미읍성에는 옹성이 없지만, 면천읍성의 옹성을 보니 수원화성의 창룡문과 화서문의 옹성이 생각납니다.

 

면천읍성이 생기게 된 이유를 알아보면 ...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 항목에 몽산성()이 나오는데,  면천면 몽산성 남쪽에는 ‘잣골’, 북쪽에는 ‘잣디()’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잣은 주로 통치성에 사용되는 성()에 대한 순우리말이다.) 이와 같은 기록과 유적·지명을 놓고 볼 때 몽산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면천군의 통치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 항목에 의하면, "둘레 1,314척의 석성으로 안에 우물이 2개 있다."라고 하였고, 산천 항목에는 "몽산이 읍치의 북쪽 4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 몽산[299m] 정상을 둘러싼 몽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몽산성에 대해 『세종실록』 1437년(세종 19) 6월 2일의 기록에는 “면천산성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넓고 험해서 백성들이 꺼리니 읍성을 축조하는 것이 낫다.”라고 나온다.

 

즉 세종때 면천읍성의 축성 논의가 시작되었고, 2년후에 읍성이 완공되었다는 기록입니다. 면천읍성이 완공되면서 몽산성에 있던 치성(治城)은 새로운 읍성으로 이주되었으며, 지금도 몽산성이 남아 있는데, 삼국시대때 부터 치성(治城)으로 사용되면서, 이름도 피성(),혜성->몽산성(城->성사리산성으로 변경되어 왔습니다

 

면천군의 치성인 면천읍성의 건설은 면천군이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면천읍성의 건설 이후 면천은 급속히 성장하여 내포 지방의 주요 군현이 되었다. 면천읍성과 면천군 출신의 인물들은 그렇게 역사 속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_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서쪽성곽을 복원공사중인 모습입니다. 150m여 정도의 성곽인데, 아마도 2021년정도에나 복원공사가 끝날것 같습니다. 적대()가 보이는데, 면천읍성에는 7개의 적대()가 있었는 기록이 있습니다.

 

적대()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치성(雉城)이 있습니다. 적대의 기능은 성문과 옹성을 보호하는 방어시설인데, 수원화성을 보면 장안문의 좌/우에 적대가 있습니다, 면천읍성의 적대는 성문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치성이라고 해야 맞을것 같습니다

 

▼ 면천읍성 안에 보면 문루가 덩그러니 하나 서 있는데, 풍락루(豊樂樓)라고 합니다. 원래 면천군 관아의 정문이었는데, 관아의 담장이 없이 홀로 서 있으니 좀 외로워 보입니다.

 

▼ 현재의 풍락루 주변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풍락루 옆에는 면천초등학교(현재는 이전) 부지가 있는데, 학교 정문옆에는 3.1운동을 주도하신 세분의 사진과 약력이 적힌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일제때는 공립보통학교라고 하였다가 국민학교라고 하였고,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합니다.

 

1919년 당시 어린나이에 3.1운동을 계획하고, 주도적으로 실행하였다니,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지금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이가 거의 일정하지만 1910년대의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때는 일정하지 않게 나이가 많은 학생들도 있었을것입니다.

 

▼ (구)면천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는 문화재 시굴조사중이며, 조선시대의 객사자리였습니다

 

▼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은행나무 두 구루가 보이는데, 수령이 1100년이나 되었답니다

 

▼ 참고로 면천초등학교가 인근으로 이전후에 비어 있는 모습이며, 붉은 화살표가 면천은행나무 입니다_자료사진은 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면천은행나무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보면 영어로 써 있는 학명이 깅코(イチョウ)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학계에 먼저 등록하다 보니 은행나무가 깅코가 학계의 기본명칭이 되버린듯 합니다.

 

일제시대 조선고유의 식물등의 이름을 일본인들이 일본명으로 등록한 식물들도 수백종이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조선의 이름 그대로 고칠려고 해도 세계식물학계의 불문율이 있어서 못 고친답니다

 

▼ 학교 서쪽에도 은행나무가 보이네요...서쪽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이 아닙니다

 

▼ 면천읍성 서문지 옆에는 면천군지라는 표석이 보입니다. 현재는 당진군 면천읍이지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면천이 당진보다 상위 행정조직이었는데, 일제시대 지방조직 개편때 면천군이 당진군에 흡수돼버리면서 위상이 많이 깍였습니다

 

면천군지 표석 아래 건치연혁을 새겨넣은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백제 때는 혜군이라 칭했다. 신라 경덕왕 때는 혜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현종왕 때 운주에 속한 후 감무를두었다.

 

충렬왕 16년에 현인 복규가 원나라 태종의 2자(둘째아들)합단의 병을 막아 공을 세워 왕에게까지 알게 되어 면주라 부르게 되었다.(몽산성 구축)

 

이조 태종 13년부터는 면천군으로 고쳤다. 서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당진군에 편입 되었다.

갑술년 1994년 5월 수립

 

오른쪽 표석에는 알 수 있는 글들만 보면 "물이 가득흘러서 바다로 모여들어 간다"라는 글귀와 "시경에 나타난글에서 면천의 이름을 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 서문지에 있는 안내판을 잘 봐야 합니다.

 

▼ 서문지에서 보면 성곽이 복원되어 있습니다만, 남문까지 복원된 성곽이 이어지는 않았습니다. 성돌의 색갈이 남문성곽의 돌은 밝은색인데, 서문지 성곽의 성돌은 거무스럽습니다.

 

▼ 면천읍성의 복원정비계획도를 보면 읍성의 복원이 끝나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 입니다.

 

▼ 인터넷에서 구한 자료사진입니다

 

▼ 충남에는 유명한 해미읍성이 있는데,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때 축성하였고, 면천읍성은 세종때 축성하였습니다

 

▼ 전투 내용을 보면 동학군과 일본군,관군과의 전투로 보입니다.

 

▼서쪽 성곽 끝 치성이 보이는데, 치성 아래 성돌에 각자성돌이 있습니다

 

▼ 성돌에 새겨진 각자로 면천읍성의 축성시기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옥천시면이라는 글자는 면천읍성을 축성 할 때 옥천사람들이 구역을 맡아서 축성을 시작하였는데, 길이가 육십척 사촌이라는 뜻인듯 합니다. 조선시대때 성곽에서 각자성돌이 가끔 발견이 되는데, 대부분 대부분 지금의 공사실명제 같은 각자였습니다

 

조선시대(세종)때 길이계산을 알아보면, 1척의 길이는 31.22㎝이므로 60척이면, 18.7m이고, 1촌은 약 3㎝로 보면 4촌이면 역 12㎝가되므로 총 거리는 18.82m가 됩니다. 

 

▼ 서쪽 성곽의 복원공사는 오래전에 끝났듯 합니다. 성돌의 색갈이 검게 보이는데, 남문쪽 성곽의 성돌의 색갈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 서쪽 성곽의 복원은 치성까지만 입니다.

 

▼ 성안을 보면 잡풀만 우거져 있습니다. 잡풀은 치웠으면 좋았을것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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