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의 1부는 사자루에서 마무리 하고, 2부에서는 낙화암과 고란사등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 인용된 사진자료들은 문화재청 산하기관,문화재연구소, e_뮤지엄(전국박물관)등에서 가져온 자료임을 밝힙니다.
▼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습니다. 백화정에서는 백마강의 풍경이 잘 안보이니 낙화암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 백화정에서 조금 내려 오면 낙화암 입니다. 낙화암 위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의 모습입니다만, 낙화암은 강에서 배를 타고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 고란사에 들렸는데 때마침 스님들의 강연이 있어서 직접 법당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 고란사 법당내부 자료사진입니다
▼ 고란사는 고려시대때 백제의 후예들이 세웠고 고란사(高蘭寺)라고 하였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1900년에 부여현의 은산면에 있던 고려사찰 숭각사를 옮겨 왔으며, 절 뒷편에 고란초가 자라면서 절의 이름이 고란사(皐蘭寺)로 되었다고 합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엽서와 자료사진을 올려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란사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는것 같고 다만, 법당의 크기는 세월이 지나면서 한칸 정도 늘린것으로 보입니다.(자료사진은 e-뮤지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고란사 선착장에서 유람선(편도5,000원)을 타고 구드래 나루터로 갈 준비를 합니다. 구드래나루터 까지는 거리로 1km정도로 짧은 거리인데, 고란사에서 산성을 넘어서 가려면 대부분 무척 힘들어 하기 때문에 구드래나루터에 차를 주차하고 배를 타고 고란사에 직접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 나루터 앞에서 보면 바위가 보이는데, 조룡대(釣龍臺)라는 바위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참 가슴아픈 역사의 전설이 있는데, 소정방이 사비성을 함락시킨후에 어느날 낙화암 근처에 정박해 있던 당나라 군선들이 돌풍에 여러척이 침몰하였는데, 강에 살던 용(龍)의 짓이라 하여, 백마를 미끼로 낚시로 용을 잡았는데, 그때 용을 잡았던 바위라고 해서 조룡대 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전설일뿐이며, 물고기를 한자로 적을때 어룡(魚龍)이라는 것으로 봐서 소정방이 낚시를 하여 물고기를 낚았다는 표현을 용을 낚았다고 과장해서 말들이 퍼진듯 합니다.
그런데 백마강 하류쪽에 보를 만들어서 그런지 물이 많고, 물의 흐름이 느려서 바위 주변에 토사가 많이 쌓여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사진을 보면 조룡대의 모습은 그런대로 강과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 강에 웬 버스가 떠다니고 있습니다. 저 버스는 관광용 수륙양용버스인데, 백제문화단지에서 고란사앞까지 왕복한다고 합니다.
▼ 저배를 타고 구드래나루터까지 갑니다.
▼ 배위에서 보는 고란사와 고란사나루터의 모습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백마강에서 고란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멀리로는 부산(浮山)이 보입니다. 이사진은 아마도 . 일본학자들이 부소산성(당시에는 반월성)을 발굴조사를 시작한것이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인데, 그 당시에 찍은것으로 보입니다.
▼ 이 사진은 조선고적도보(5권)에서 발췌한 사진이며, 1930년대의 사진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유리간판의 사진이며, 1930년대 후반으로 보입니다. 사자루와 백화정이 잘 보입니다.
▼ 이 사진은 문화재검색에서 찾은 사진인데, 오-케예술(?)단, 1936,5.29로 새겨져 있는데, 아마도 조선인 사진사를 대동하고 찍은듯 합니다. 고란사, 사자루, 백화정, 낙화암 글씨를 인화된 사진위에 새겨 넣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사진인데, 일본x이 안보여서 좋습니다.
▼ 일제강점기때 발행하였던 엽서에서 보는 고란사와 사자루,낙화암의 모습입니다.(문화유산채널에서 인용)
▼ 낙화암 아래에 붉은 글씨로 낙화암(落花巖)이라고 새겨져 있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합니다.
▼ 일제강점때의 낙화암 사진입니다. 지금 보다 숲이 우거지지 않아서 그런지 깍아지른 낭떨어지가 위압적입니다
▼ 유람선이 곧 구드래나루터에 도착하게 되는데, 고란사나루터가 희미하게 산 끝에 보입니다.
▼ 여기서 일제강점기때의 백마강의 모습이 담긴 엽서사진과 유리건판 사진을 올려봅니다.(사진들은 대부분 문화재연구소에서 인용)
사진의 촬영연대는 1930년대로 추정되며, 대부분 백마강에서찍은 사진들입니다
▼ 부산(浮山)에서 부소산을 바라보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강물도 얼었고, 부소산에는 눈이 많이 쌓였습니다.
▼ 부산(浮山)기슭에 있는 백강나루에서 부소산을 바라보면 찍은 사진인듯 합니다.
▼ 규암면의 수북정에서 부소산을 바라보면 찍은 사진입니다
▼ 구드래나루터에 내려서 관북리유적지로 가야 합니다.
▼ 구드래 나루터의 제방에서 바라보는 부산(浮山)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구드래나루터 부근에서 보는 부산(浮山)의 모습 입니다. 지금은 강폭이 많이 좁아진듯이 보이는데, 금강 상류에 대청댐의 영향인듯 합니다
▼ 구드래나루터에서 관북리 유적지로 가면서 바라보는 (구)부여박물관의 모습입니다.
▼ 관북리유적지는 왕궁터로 추정되는데, 그러면 이 왕궁지가 사비성인듯 한데, 구체적으로 관북리유적지가 사비성이라고 직시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목곽으로 만들어진 수조는 1호,2호,3호까지 발굴 되었습니다.
▼ (구)박물관의 모습입니다. 현재는 전시회등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건물의 모습이 마치 일본 신사를 보고 있는듯 합니다
▼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는데, 왜색 논쟁이 심했을 것입니다만, 혹시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가르쳐준 건축기술의 기본이 저런 모양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조선시대때의 부여객사의 모습입니다. 고종 때 1869년 건립되었으며, 일제시대때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으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 일제강점기때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으로 사용되던때의 모습입니다.
▼ 일제강점기때 부여고적보존회 고고품 진열관으로 사용되던때의 모습입니다.
▼ 부여객사 뒤로 보이는 (구)박물관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박물관은 정림사지 옆으로 이전 되었습니다
▼ 부여 동헌의 초연당의 모습입니다
▼ 도강영당 (道江影堂)
도강영당은 홍가신·허목·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홍가신(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 37년(1604)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허목(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35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영조의 세자폐위 문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는데 이로인해 영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으로 행정의 최고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수원성 건설에도 참여하였으며 『경종내실록』, 『영종실록』, 『국조보감』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말 부여현의 관아 건물이던 것을 1971년 신축하여 이들을 모신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영당은 앞면 1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을 마련하고 뒤쪽은 통칸으로 3인의 영정을 모셨다.
지금은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 이상은 부여군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 부여현감의 가족들이 사는 곳인데 내아(內衙)라고 합니다
▼ 부여동헌을 나왔습니다. 고목이 운치를 더해주는 동헌의 모습이었습니다.
- 부소산성 2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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