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역사여행을 이번에는 백제문화권의 부여에 있는 부소산성을 찾아 보았습니다.

부여라는 지명은 백제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인데, 부여는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있었으며,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루기도 했지만,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을 맞이했던 비운의 역사을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마강(금강)을 끼고 있는 풍족한 땅이었던 백제의 부여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지 사진자료도 보면서 알아 보겠습니다.

 

※ 인용된 사진자료들은 문화재청 산하기관,문화재연구소, e_뮤지엄(전국박물관)등에서 가져온 자료임을 밝힙니다.

 

▼ 부소산성에 들어가는 입구는 2곳이 있는데, 부소산문 매표소와 (구)박물관이 있는 곳에 매표소가 있습니다만, 부소산문이 있는 매표소를 통해서 들어가는 편이 좋습니다. 무료주차장이 있으며 비교적 복잡하지 않습니다.

 

▼ 부소산문은 부소산성의 정문 역활을 하는곳으로 단장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가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되면서 대대적인 정비사업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뜻보면, 조선시대의 행궁을 보는듯 합니다

 

▼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었는데,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 3개 지역에 분포된 8개 고고학 유적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백제역사유적지구는...

  - 공주의 웅진성(熊津城)과 연관된 공산성(公山城)과 송산리고분군(宋山里古墳群),

  - 부여의 사비성(泗沘城)과 관련된 관북리 유적(官北里遺蹟, 관북리 왕궁지) 및 부소산성(扶蘇山城), 정림사지(定林寺址),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부여 나성(扶餘羅城),

  - 익산시 지역의 왕궁리 유적(王宮里遺蹟), 미륵사지(彌勒寺址) 등 3개지구 8개의 유적지로 일괄 등재되어 있습니다.

 

▼ 부소산성 유적지와 부근의 모습을 나타낸 지도인데, 별로 볼게 없을것 같지만, 붉은색 글씨로 표시된 곳을 찾아 보면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게 되면 백제의 옛모습을 어느정도 가볍게나마 느끼는것이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전국 방방곡곡의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부여읍의 사진중에서, 부소산성 안에서 부여읍의 중심지와 현재의 부소산문의 자리를 찍은 사진으로 보입니다.(1910년대)

 

▼ 일제강점기때의 유리건판 사진중에서 부여읍내에서 바라보는 부소산성 군창지라는 설명이 있습니다(1936년대)

▼ 부소산문을 들어서서 보게 되면 현판에는 사비문(泗沘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흑백사진(유리건판사진)중에서 부여읍 중심지를 찍은 사진으로서 오른쪽에 부소산성 아래 부여객사가 보입니다-1916년대

 

▼ 일제강점기때의 유리건판 사진중에서 부소산성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진인데, 아마도 금성산에서 찍은듯이 보입니다. 왼쪽에 관청 건물이 보입니다.-1936년대

 

▼ 부소산문에서 동쪽방향으로 돌아서 첫번째 만나는 삼충사(三忠祠)입니다.

 

▼ 삼충사의 외삼문에는 의열문(義烈門)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세분 충신의 사당답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 내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삼충신의 사당이 보입니다.

 

▼ 사당 안에는 좌로부터 성충,흥수,계백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각각의 영정에는 유리로 덮힌 닺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자왕이 충신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면, 백제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삼충사에서 약 10분 정도 임도를 따라서 오르게 되면 멋진 누각이 보이는데, 영일루(迎日樓)입니다. 영일루는 아주 멋진 조선식 누각의 형태인데, 지금의 홍산면의 관아 출입문이었던 집홍루를 옮겨 지은것이라고 합니다. 홍산관아는 복원이 되어 집홍루는 복원되어 있습니다

 

▼ 영일루를 가져온 홍산현은 예전에는 부여현과 다른 독립적인 행정관청이었으나, 부여현이 부여군으로 승격되면서 홍산현은 홍산면이 되었습니다만, 홍산현 관아는 지금 그대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 부소산성은 퇴뫼식 산성으로 전부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 토성을 절개해서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토성이 단면이 양쪽으로 보입니다. 이미 일제 강점기때 토성은 절개 되었습니다

 

▼ 산성 안으로 길을 내기 위해 절단한 토성축에 조선인 인부가 앉아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모든것을 샅샅히 뒤져서 수많은 자료를 만들었고 그 일부가 유리건판사진입니다. 일제가 패망후 가져 가지 못한  유리건판 사진이 지금은 귀중한 자료가 되어 쓰이고 있으니, 세상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1936년대

 

▼ 부소산성의 현황도 인데, 거의 백제시대때 산성은 만들어졌으며, 통일신라, 조선시대때 약간의 추가적인 토성이 만들어졌습니다.

 

▼ 토성을 따라서 돌아 봅니다

 

▼ 부소산성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6년경에 일제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조선시대때 만들어진 토성의 수구지와 문지의 발굴조사는 해방후에도 있었던것으로 보입니다. 부소산성의 부분적인 발굴조사는 여러번 이루어졌는데, 최근에는 2020년 5월부터 발굴조사를 하는곳도 있습니다.

 

▼ 토성은 견고하게 쌓여져 있어서 1000년이 넘는 세월에도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듯 합니다

 

▼ 부소산성의 비교적 평판한곳에는 군창지가 있는데, 발굴당시의 사진과 창고건물의 구성등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 군창지의 출입문에는 아름다운 향로가 부착되어 있습니다만, 들어 갈 수는 없습니다

 

▼ 군창지의 오른쪽과 왼쪽의 모습입니다.

 

▼ 일제강점기때 부소산성의 군창지를 발굴 조사하고 있는 일본인 학자들이며, 군창지에서는 탄화한 쌀과 보리등이 발견 되었습니다

 

▼ 부소산성 정상쯤에는 수혈건물지의 발굴 현장을 건물로 만들어서 보존하고 있는데, 수혈지는 땅을 어느 정도 파내고 사람들이 기거 할 수 있도록 만든 주거지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부소산성의 수혈지는 백제군사들이 주둔하던곳으로 추정 된다고 합니다.

 

▼ 토성 위에 나무를 일정한 크기로 박아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시설로 대부분의 토성은 목책을 세웠습니다.

 

▼ 단청을 새단장한 반월루(半月樓)의 모습입니다. 산성의 모습이 반달처럼 생겨서 반월성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부소산성이 정식명칭입니다. 

 

▼ 반월루가 준공되던해(1972년)에 부여군수가 지은 반월루기 입니다

 

▼ 반월루에서 바라보는 관북리 방향입니다.

 

▼ 다음은 사자루입니다.

 

▼ 사자루(泗泚樓) 현판의 글씨는 의친왕 이강이 썼다고 합니다. 이강은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 태어 났으며, 인물이 매우 뛰어 났고, 다른 왕족과는 다르게 독립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영친왕은 배다른 동생입니다. 묘소는 남양주 홍릉(고종)과 유릉(순종)의 뒷편에 있으며, 배다른 동생 덕혜옹주 묘소옆 조금 떨어진 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 참고로 의친왕(의화군) 이강과 의친왕비 김씨의 사진입니다. 정비 사이에는 자손이 없었고, 계비들이 많았고 자손(12남9녀)도 많았습니다.

 

▼ 측면에서 보는 사자루입니다. 계단이 너무 가파르니 조심해야 합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사자루의 모습입니다만, 지금의 모습과는 기둥 모습이 많이 다른데, 마치 콘크리트 기둥처럼 보입니다. 글씨에는 반월성의 송월대의 루(樓)라고 하고 있습니다.

 

▼ 사자루 내부의 모습입니다

- 부소산성 1부는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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