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관문이자 홍주목의 치소를 둘러쌓은 홍주성은 1,772m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남쪽과 서쪽의 성벽이 복원되어 있고, 북쪽 성벽과 동쪽 성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홍주목의 36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습니다.
홍주성이 정확히 언제 축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발굴조사 결과 홍주성역사관 뒤편토성이 나말여초에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며 조선 초기 왜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석성으로 쌓은 이후 몇 차례의 중축을 거쳤고,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동학농민항쟁, 천주교박해 등 산 역사의 현장이며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한 민종식, 이세영 등이 홍주의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인 곳입니다.
충청도 4목 가운데 하나인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과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였던 곳으로 정각은 6각형의 수상정인 여하정이 있습니다.
홍성군청 안뜰에는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와 홍주관아의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있습니다
- 홍성군청에서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며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이었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하였는데, 동학혁명(1894) 때는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_홍성군청에서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조양문과 홍화문 사이의 소녀상입니다. 작품이지만 여러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세지는 강렬한 뜻이 있습니다.
▼ 홍주읍성의 안내문과 읍성역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 읍성의 바깥쪽 성벽을 보면 성돌의 모양이 다른데, 성곽이 여러 시대에 걸쳐서 수리됬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옥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형벌을 집행하기 전에 수용하는 시설로 감옥 또는 원옥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형조, 한성부, 사헌부, 병조, 승정원, 지방관청 등에 부설되었다.
홍주읍성 내에는 1872년 제작된 홍주지도를 통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었음을 확인된다. 홍주읍성 옥은 1895년 설치된 홍주재판소가 1913년 홍주재판소와 검사국이 이전하면서 훼철된 뒤,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과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이 홍성읍 월산리로 이전한 후 홍성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2012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_홍성군청에서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감옥의 형태를 사방이 트인 형태로 3칸의 크기인데, 죄인이 많을 경우에는 무척 비좁았을것 같습니다. 태형틀도 마당에 설치했는데, 겨울에는 어떻게 수용했는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집니다.
▼ 감옥의 형태는 원형인데, 대부분의 다른 읍성의 감옥의 형태도 원형이었습니다
▼ 감옥앞에는 우물터가 있는데, 조선말 천주교 박해때 천주교인을 참혹하게 동사(凍死)시킨 역사의 현장입니다.
▼ 지도에서 보면 우물터의 위치와 옥의 위치가 잘 보입니다. 또한 읍성 내부의 여러건믈들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때 수많은 건물들이 헐리면서 지금은 볼 수 없게 된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읍성의 문은 4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서문,북문,동문이 보이고, 누각형태로 그려져 있습니다만, 남문인 홍화문 자리에는 소나무가 많이 보이지만 문루는 지도에 안 보입니다
▼ 베드로(원시장)를 3개월 동안 매질해도 죽지 않자 겨울에 우물에서 몸에 물을 부우면서 동사(凍死)시킨 장면과 대부분의 천주교인을 교수형을 시킨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홍성군의 홍성읍 내부는 일부 공원형태로 가꾸어져 있습니다. 이 정자는 역사적 사실관계는 없는 정자입니다.
▼ 조선시대 어느 고을을 가던지 공덕비는 널려 있습니다. 드물게는 백성들을 돌보던 지방수령들은 었었겠지만, 과연 백성들이 이임하는 수령들의 공덕비를 만들었을까? ... 이름 하나 남기려는 얄팍한 관리들의 속셈이 많았을 것입니다.
▼ 언덕에 세워져 있는 남문인 홍화문입니다
▼ 1906년에는 이 성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벌였다. 1905년에 민종식(閔宗植, 1861∼1917)·이세영(李世永, 1869~1938)·채광묵(蔡光默, 1850∼1906)·안병찬(安炳瓚, 1854~1921) 등은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5월 19일에 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6문의 화포로 홍주성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덕산(德山)으로 쫓아냈다._홍성군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홍화문은 2013년 12월 남문을 복원 할 때 문루를 얹고 홍화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 홍주성 수성비(맨 좌측)과 공덕비들 입니다
▼ 홍화문의 누각은 아름답게 지어졌습니다. 우마차는 못다니는 언덕에 있으며, 조선시대때 한때는 폐문이 되었던 문입니다.
※ 스킨에 홍화문이 동문으로 잘못되어 있는데, 홍화문은 남문입니다
▼ 홍화문은 홍주성의 남문입니다. 1870년 고지도에는 ‘남문이읍기방해폐(南門以邑基妨害廢)’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후 남문 주변에 송림을 만들어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발굴을 통해 과거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홍성군은 2013년 12월 남문을 복원한 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으로 문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 홍화문 밖에서 성곽의 좌/우를 둘러 봅니다.
▼ 성곽의 남서쪽 방향입니다
▼ 김좌진(1889~1930)은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07년 호명학교를 세웠으며,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 한용운(1879~1944)은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입니다. 1926년 88편으로 된 ‘님의 침묵’ 시집을 발간하였고, 한국불교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썼습니다.
▼ 홍성읍성 안으로 수로가 있었는데, 발굴조사를 통하여 전국 읍성중 처음으로 확인된 수문입니다
▼ 여하정은 조선시대 홍주군의 동헌(東軒)으로 사용된 안회당(安懷堂)의 뒤뜰에 있다. 1896년(고종 33)에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가 건립하였다. 정각은 3평5합5작 규모의 목조와즙(木造瓦葺) 건물로 못 위에 떠 있는 수상정(水上亭)이다. 정면에는 필서가(筆書家) 김병수(金炳秀)가 쓴 여하정(余何亭) 현판이 걸려 있다. 정각의 평면 형태는 6각형이고, 6각 기둥에는 시액(詩額) 12현판(懸板)이 붙어 있다.
▼ 나는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여하정에서 깜빡하고, 안회당을 못보고 와서 자료사진으로 알아 보았습니다. 여하정에서 보는 안회당의 뒷모습입니다
▼ 안회당은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조선시대 홍주군의 동헌(東軒)이다. 원래의 이름은 근민당이었으며, 전체 22칸 규모의 목조와가(木造瓦家)건물로 1678년(숙종 4)에 홍주군의 정사당(政事堂)으로 건립하였다.
홍주목사와 홍주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는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동헌을 개축하고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안회당(安懷堂)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안회당이라는 이름은 논어(論語)의 ‘노자안지(老者安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들과 젊은 사람 모두를 위해 정사를 펼치겠다는 의미이다. 현판은 광복 이후 분실되어 1991년에 안회당을 부분 중수하면서 현판과 당기(堂記)를 새로 조각하였다._홍주읍성 생생문화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다음은 여하정을 나와서 다시 성곽에서 보는 최영장군의 흉상입니다
▼ 홍주성벽을 책임져라!!!
홍주성 서쪽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최영장군 흉상 뒤쪽에 ‘대흥(大興)’이라고 제법 선명하게 새겨진 돌을 볼 수 있습니다. 대흥은 현재 예산군 대흥면을 가리키며, 이 돌부터 다음에 표시된 돌까지 대흥 사람들이 쌓았다는 표시입니다.
월계천의 흐름이 홍주성의 서쪽 성벽에서 급격히 꺾이며 성벽에 피해를 주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1870년 홍주 목사 한응필이 수구와 수로를 만들어 물이 홍주성 안으로 흐르도록 했습니다. 현재는 수구의 일부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 홍주읍성의 북문입니다. 아주 깔끔하게 복원이 되었는데, 문루는 없습니다. 차차 복원한다고 합니다
▼ 1870년(고종 7)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흥선대원군이 서문(경의문)과 북문(망화문)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려주었으나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습니다.
▼ 공터에는 북문과 연결된 성곽의 성돌 유구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것이 신기 합니다
▼ 홍주아문은 현재 홍성군청 앞에 있습니다. 아문이 무척 큽니다. 보통은 홍주아문 보다는 1/2정도의 크기가 대부분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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