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는 고려시대의 처인성이라는 순수한 토성이 하나 있습니다.

 

처인성에서는 고려시대 1232년 12월(2020년 기준 약 788년전) 고려 고종19년, 무인정권 시대에 몽골제국(원나라)의 제2차 침입(1231년8월~1232년12월)때 공식적인 관군이나, 정부군의 지원이 없이 승장 김윤후의 지휘아래 처인부곡(處仁部曲)의  양민,천민등이 합세하여 몽골군의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여, 물리친 고려 최대의 불가사의한 전투가 있었던 장소 입니다.

 

여기서 처인부곡이라는 지명은 읍,면, 다음으로 관리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부락정도 입니다만, 처인성 승리후에 처인현(縣)으로 승격됩니다.

 

여몽전쟁(麗蒙戰爭)은...

1231년(고려 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28년동안 9차례에 걸친 몽골의 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으로 '대몽항쟁', '항몽전쟁' 등으로도 불립니다. 고려의 항복으로 끝난 고려 전쟁사 최악의 암흑기로, 그야말로 전 국토가 잔혹하게 짓밟혔습니다.

 

무신정변으로 집권한 무신정권(1170년~1270년,약 100년간)은 몽골1차 침입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전격 이전하였지만, 몽골은 이를 문제삼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고려를 응징하러 9차에 걸친 침략전쟁을 일으켰지만,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유지에만 골몰하려 육지의 백성들의 안위 따위는 팽개쳐 두다가 결국은 고려 원종때 막을 내리게 됩니다. 


▼ 용인시 처인성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모습입니다.  기존 마을의 농로와 주차장을 정비하였습니다.

 

▼ 처인성의 위치는 지도에서 보면 "e편한세상용인한숲시티"의 남쪽방향에 있습니다. 이 아파트 단지에는 7000여 가구가 입주해 있다고 합니다. 처인성은 현재 신축중인 남사고등학교와 마주보고 있는데, 학교이름은 처인고등학교라고 해야 맞는것 같습니다

 

▼ 처인성은 순수한 토성으로 경기도 기념물4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도로에서 언뜻 보면 약간 높은 야산 정도로 보이기도 합니다

 

▼ 처인성의 주변은 어느정도 정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 봅니다.

 

▼ 처인성 둘레길의 바닥에는 그림을 새겨넣은 판석이 깔려 있습니다. 토성 둘레를 돌면서 천천히 읽어 보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처인성전투에서의 전투장면의 그림입니다. 그림에서는 당시 김윤후 승려가 화상을 쏘는 것으로 묘사 하였으나, 김윤후 승려가 본인이 실제로는 활을 쏘거나, 칼을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면서 전투상황을 통제하였을 것 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전쟁에서 장군이나 최고 지휘관이 무기를 직접 쓰지는 않는것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_전쟁기념관에서 인용

 

▼ 처인성 동쪽에는 처인성 전투의 그림을 새겨넣은 벽화와 처인성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자료를 보면, 몽골의 2차 침입은 1232년8월에서 12월까지 약4개월간 이었는데, 선공부대는 대구까지 침입하였고, 본진은 사령관 살이타이가 용인 처인성에서 군량미를 약탈하려고 직접 전투에 참가 하였는데, 고려군은 없고, 처인부곡민들만 피신해 있는 처인성을 얕잡아보고 무방비로 접근하려다, 매복조의 기습공격에 집중적으로 화살을 맞고 절명하였으며, 총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은 곧바로 철군하였다고 합니다 날자는 12월 16일(음)이라고 합니다.

 

▼ 몽골의 2차 침입의 경로도 입니다. 선봉대는 대구까지 침입하였고, 주력부대는 처인성에서 총사령관 살리타가 사살되었습니다. 몽골군은 전투중에 총 대장이 사망하거나, 본국의 국왕(칸)이 사망하면 전투를 중지하고 일단 본국으로 철수한다고 합니다.

 

▼ 처인성승첩기념비(處仁城勝捷記念碑)은 1979년 12월 16일에 만들어졌는데, 12월 16일은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친 날입니다

 

- 비문은 처인성승첩기념비 뒷쪽에 새겨져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곳 처인성은 세계에서 가장 사나웠던 몽고군을 물리친 곳이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외민족의 침입이 많았으나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같이 위태로운 때는 드물었다. 세계를 제패하려는 몽고는 동방의 강대국 고려를 굴복시키려고 1231년부터 40년 간 6차례에 걸쳐 대군으로써 침공하여 왔다.

1차 침입 때 평안도 귀주성, 자성의 항쟁도 그 하나이며 처인성에서는 역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1232년 살리타를 대장으로 한 몽고군은 2차 침공을 시작하고 그 선봉부대는 경상도까지 내려가 노략질하니 팔공산 부인사에 소장하였던 고려대장경판이 소실되었다. 이어서 살리타는 주력부대를 남진시켜 지금의 서울 한양산성을 공략하고 한강을 건너 처인성으로 진격하였다.

이 때 성 밖 백현원에 살던 김윤후는 처인성에 들어가 군, 평민, 천인과 힘을 합쳐 싸워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니 12월 16일이었다. 이에 몽고군은 크게 무너져 전군이 퇴각하였다. 왕이 김윤후의 공을 크게 가상히 여겨 상장군에 제수하였으나 그는 공을 타인에게 양보하고 굳이 사양하여 섭랑장을 제수하였다.

처인성은 수원의 속읍으로 큰 성은 아니었으나 몽고의 대군을 맞아 성민은 용감하게 싸웠고, 승장 김윤후의 화살은 적 대군을 퇴각케 하였다. 김윤후는 뒤에 충주성 싸움에서 군병과 천인들을 이끌고 몽고병을 격퇴하여 그 남진을 막았고 동북면방어사가 되었으며 대몽항쟁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이 작은 성에서 세계를 정복한 몽고군을 물리친 한국 민족의 슬기를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다.”

1979년 12월 16일

최영희 짓고, 김기승 쓰다.

 

▼ 조선시대 용인현의 고지도 입니다.  용인이라는 지명은 고구려때는 용인현과 용구현을 합쳐서 용인현이었다가, 통일신라를 거쳐서 고려때에는 다시 용구현으로 고치고 후에 조선초기 용구현과 수주(水州;지금의 수원) 소속의 처인현을 합치면서 용인현이 되었는데, 고려때 처인성이 있었던 처인부곡은 처인성전투 승리후에 처인현으로 승격하였습니다.

 

일제시대(1914년)때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때 남쪽의 4개면(서촌면,도촌면,현내면,남촌면)을 합치면서 남사면(南四面)이 되었지만, 최근 용인시의 행정구역 개편때 남사면 일대를 원래의 지명인 처인구로 하였습니다. 

 

▼ 처인성은 고려때는 교통요지의 길목에 있었으며, 군창(軍倉)으로 역활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금으로 받은 처인부곡지역과 주변지역의 쌀을 군량미로 저장하던 곳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에도 군창으로 이용되었는데, 아마도 몽골2차 침입때는 살리타가 군량미를 빼앗으려고 어슬렁거리면서 들어오려다가 매복한 고려의 의병군으로 부터 집중적인 화살세례를 맞고, 죽임을 당하였던것 같습니다.

 

몽골군은 지휘관이 사망하면 곧바로 철군하는 전통이 있어서, 몽골 2차 침입은 4개월만에 끝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은 3년후에 또다시 침입을 하면서 고려는 또다시 몽골군의 침략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김윤후 섭랑장은 20년후 또다시 충주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치면서 몽골전투 전문지휘관이 되었습니다.

 

▼ 처인성의 서쪽방향입니다. 토성이라고 얕잡아 보일것 같지만, 토성의 축성법은 흙을 다져서 쌓았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한 토성 위에는 통나무를 옄여서 만든 목책으로 둘러쳤기 때문에 적군들이 쉽게 넘어 오지 못했습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기 까지도 토성이 대부분이었지만, 임진왜란을 곀고 나서 방어대책은 숙종때 부터는 석성과, 산성위주로 바뀌었습니다.

 

▼ 고려사에서 기술한 김윤후의 간단한 기록입니다만, 김윤후는 20년후에 충주산성방호별감()으로 또다시 몽공군을 물리칩니다.

 

▼ 이렇게 허술하게만 보이는 토성인 처인성이 그것도 일반 하층민들로만 구성된 비전문 전투원이 대군을 맞이해서 일격에 적장을 쓰러트리고 전투에서 이겼다니 참! 불가사의한 전쟁이었습니다.

 

만약에 몽골군이 지휘관이 죽은것을 무시하고 처인성을 총 공격하였다면, 뭐~ 그냥 처인성은 아작이 났을것 입니다.

 

▼ 고려의 고종은 고려23대 왕(1213년-1259년(46년))으로서 가장 오랜기간 왕으로 있었지만, 무신정권의 무력에 눌려서 왕노롯 제대로 못해본 왕이었으며, 재임기간중에 몽골침략만 곀다가 끝난 왕이었습니다.

 

▼ 처인성의 시굴조사는 1차가 1999년에 있었고 , 2차는 2018년에 토성 주변을 시굴조사 하였으며, 어느 시굴조사때 나온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려의 검이 한자루 출토되었습니다.

 

신라시대때의 기와(암막새)도 출토되었지만, 고려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신라에서 축성하였던것으로 봅니다.

 

▼고려시대의 검은 현재 두자루가 출토되었는데, 그중에 한자루(상단)가 처인성에서 출토되었습니다._전쟁기념관에서 인용

 

▼ 처인성의 서쪽 성벽에서 바라보는 북쪽의 한숲시티의 모습입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기는 하지만,  단지 내부에 생활기반 시설이 많이  없어서 , 젊은이들이 살기에는 아직까지는 좀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는곳입니다.

 

▼ 처인성 앞에는 용인시에서 땅을 매입해서 주차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보이는 도로는 원래 마차 한대가 겨우 다니는 좁은길이었는데, 도로포장을 하면서 좀 넓어진듯 합니다

 

▼ 고려의 무신정권은 몽골1차 침입후에 항복을 하면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전격적으로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해 버립니다. 결국은 무신정권은 살아남았지만, 약28년간 고려의 국토는 거의 몽골군에게 아직이 났습니다. 결국은 고려의 태자가 몽골왕(원나라)의 사위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 처인성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성문은 원래부터 하나만 있었는지 다른문의 흔적은 없습니다.

 

▼ 처인성의 성곽에서 보는 서북쪽의 모습입니다. 원래 축사가 있던 땅을 매입해서 주차장이 만들어졌습니다.

 

▼ 처인성 내부에는 큰 나무들이 많이 있는데, 시굴조사를 하면서 많이 베어낸듯한 모습입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승려가 어느정도 지도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김윤후 승려의 전투의지가 일반백성들에게 잘 먹혔을것입니다. 

 

▼ 처인성 내부에서 문화재 시굴조사가 있었는데, 상당한 사료가 발굴되었는데, 신라나 백제때의 유물도 나오고, 고려의 검도 나왔습니다. 몽골이 2차 침입때 총사령관 살리타가 전사하고, 3년후에 3차 침입때 아마도 처인성을 그대로 두지는 않았을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 처인성 주변의 땅을 매입해서 산책로도 만들고 성곽도 고쳐서 보기 좋게 만들었습니다.

 

▼ 풀이 없는곳이 시굴조사후 매립을 한 흔적인듯 합니다.

 

▼ 윗 사진의 성곽위치에서 바라보는 옛날 모습입니다

 

▼ 민묘2기가 주인을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는듯 합니다

 

▼ 남쪽으로 보이는 모습인데, 안성이나, 평택방향으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 이제 성밖으로 나갑니다. 성 외부, 내부를 들러 보는데 1시간정도 걸렸습니다

 

▼ 처인성에서 바라보는 한숲시티입니다. 오른쪽엔 신축중인 남사고등학교가 보입니다. 아마도 내년에는 개교가 될듯 싶은데, 처인고등학교라고 해야 되는것이 맞는것 같습니다

- 끝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