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83.9m의 봉수산(鳳首山) 정상과 그 동쪽으로 900m 정도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식 산성으로, 백제시대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둘레는 약 2.45㎞로, 현재 성벽 일부와 성문, 수구문(水口門), 우물터,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되는 한산(韓山)의 건지산성(乾芝山城)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주요 거점지로 잘 알려져 있다. 곧 백제의 멸망 뒤에 부흥군은 주류성을 근거로 사비성 탈환작전에 나섰다가 실패하였다.

 

그 뒤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이 산성을 최후의 거점지로 삼아 전열을 재정비하고서 신라군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여 나당연합군을 괴롭히는 한편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특히 이 산성에서 공주와 부여는 각각 90여리쯤 떨어져 있으므로, 이 산성은 도성을 웅진(熊津)과 사비(泗沘)로 옮긴 백제의 수도 방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보인다.

 

그 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과 견훤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_다음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예산 임존성은 예전에는 대흥 임존성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예산 임존성으로 부릅니다. 성의 둘레는 약 2.5km이고, 백제에서 쌓은 퇴뫼식 산성으로, 무척 큰 산성입니다. 성문은 북문과 남문이 있었던것으로 조사가 되었지만, 복원된 곳은 남문지뿐입니다.


 ▼ 예산 임존성을 찾아가는 길은 봉수산자연휴양림에서 시작합니다. 등산객용 주차장에 주차하면 안내판이 보이는데, 3코스로 올라가면 임존성의 북동치를 만나게 됩니다

 

▼ 구름다리는 수목원으로 들어가는 다리이며, 임존성으로 가는 길은 구름다리를 건너지 않습니다.

 

▼ 조형물 뒤로 보이는 산으로 임존성 가는길이 있습니다.

 

▼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데크길을 만납니다.

 

▼ 데크길을 잠깐 따라갑니다.

 

▼ 약 1시간 정도 산을 올라가면 북동치(北東雉)를 만납니다.

 

▼ 임존성 북동치에서 바라보는 예당저수지 입니다.

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국내 최대규모의 저수지이며, 농수를 공급받는 예산군과 당진시의 앞머리를 따서 예당저수지라 이름붙여졌다.

 

농업관개용으로 축조되었으나 지금은 생활용수공급과 홍수조절의 기능도 겸한다. 유효저수량은 4,607만 ㎡, 저수면적은 1,088ha에 달한다. 북부 응봉면 일대에는 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중부권 최고의 낚시터로 알려져 있다.

 

제방길이는 314m, 제방높이는 13.3m, 수문은 26개이며, 유효저수량은 4,607만 ㎡, 저수면적은 1,088ha에 달해 단일저수지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 호면둘레는 40km이고 평균수심은 14.5m이다. 본래는 농업관개용으로 축조되었으나 생활용수공급과 홍수조절기능도 한다_출처는 다음백과

 

▼ 북동치에서 북문지 방향(시게반대방향)으로 성곽길을 따라서 돌아 갑니다.

 

▼ 북문지에서 바라보는 북동치입니다. 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면 만나는 곳 입니다

 

▼ 봉수산이 보이는데, 성곽은 봉수산 정상을 거쳐가지 않고, 북서치에서 남쪽으로 돌아 갑니다

 

▼ 북문지는 흔적 만 남았습니다.

 

▼ 흔적만 있는 북문터

 

▼ 북문터에서 바라보는 예당저수지입니다. 예당저수지는 국내에서 제일 큰 저수지 입니다.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 스러진 백제의 꿈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벚꽃은 곱기만 합니다.

 

▼ 북서치(北西雉)입니다. 북서치 또한 성곽의 흔적만 남았습니다.

 

▼ 북서치 뒤에는 높다란 언덕이 있는데, 무슨 지휘소가 있었는지 무너진 성돌이 가득합니다.

 

▼ 높다란 언덕에서 바라보는 북서치입니다. 옆은 봉수산 정상입니다.

 

▼ 북서치에서는 멀리까지도 잘 보입니다.

 

▼ 북서치에는 성벽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이제 남문지 방향으로 길을 갑니다.

 

▼ 성곽 주위의 나무는 전부 베어 냈습니다. 성곽의 흔적이 아주 잘 보입니다.

 

▼ 북서쪽의 성곽에서 바라보는 홍성군의 용봉산과 가야산 그리고 내포신도시가 보입니다.

 

▼ 남문터로 가는 성곽은 아직 어느 정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 임존성의 남쪽성곽이며, 부분족으로 무너진 곳 이 있기는 하지만 복원이 많이 진행된 상태로 보입니다.

 

▼ 묘순이바위의 이야기를 보고 가겠습니다만, 믿거만, 말거나 한 이야기 입니다.

 

▼ 저 두로 포개진 바위가 묘순이 바위라고 합니다

 

백제는 660년 나당연합군이 수도인 사비성을 공격하자 항복함으로써 멸망했지만,  백제군은 지방에서 저항을 계속했는데,  저항의 중심인물은 흑치상지를 비롯해 복신·도침·부여풍(왕자) 등이 있었습니다.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10일 만에 3만의 병력을 모아 소정방이 보낸 당군을 격퇴하였으며, 복신(의자왕사촌형제)은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거점으로 저항하였고, 661년에는 일본에 머물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세우고 큰 세력을 모았습니다.

 

부여풍은 663년 왜군의 지원을 받아서 나당연합군과 싸워 대패하자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하였습니다. 흑치상지도 당군에게 항복한 뒤 당으로 가서 장군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 뒤 주류성이 20일간의 농성 끝에 항복하자 백제부흥운동은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백제부흥군이 몰락한 이면에는 내분이 있었는데, 복신과 승려 도침은 주류성에서 백제부흥군을 이끌다가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였고, 이후 부여풍도 복신과 알력으로 인해 복신을 살해하면서 백제부흥군은 급격히 세력이 약해지면서 결국은 임존성의 흑치상지도 당에게 항복하고, 백제는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습니다.

 

▼ 임존성 내부에 여러개의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남문지 근처 묘순이바위 근처의 샘을 찾아봤습니다. 샘은 아직도 물이 나오고 있었는데, 덮개 때문인지 물은 상태가 안좋았습니다. 표지석에는 "백제임존성청수" 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 그냥 이름없는 바위입니다

 

▼ 오른쪽에는 내상산이 보이는데 임존성의 흑치상지와 주둔군의 전진부대가 있었고, 당과 전투가 있었습니다.

 

▼ 중앙이 남문지입니다. 남문지 측면에 수구(파란색 원)가 보입니다.

 

▼ 남문지에 왔습니다. 남문은 현문식 성문이었는데, 성 내부로 보수장비를 이동하기 위해서 완전복원하지는 않았습니다

 

▼ 성곽복원이 끝난 남문지 좌우의 모습입니다

 

▼ 이제 남문지에서 동쪽방향의 성곽길을 갑니다

 

▼ 동쪽의 성곽은 복원이 않되어 있는 상태 입니다

 

▼ 원래 동문이 있었지는 자료에는 없는데, 성문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길은 대련사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 예당저수지의 상류쪽의 모습입니다

 

▼ 성곽길을 처음 시작했던 북동치가 보입니다. 성곽길은 1시간 반 정도 걸렸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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