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의 공작산의 수려한 산기슭에 전통 깊은 절집이 자리 잡고 있는데, 공작산수타사(孔雀山壽陀寺)라고 합니다. 수타사는 통일신라의 제33대 성덕왕 당시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입니다.

 

창건 당시 우적산(牛跡山) 일월사(日月寺)라 하였으며, 1568년(선조 2)에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면서 수타사(水墮寺)라 하다가, 1811년(순조11)에  수타사(壽陀寺)로 바꾸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공작산은 예전에는 우적산이었습니다. 절집의 이름이 세 번 바꾸기도 흔치 않은 역사를 품고 있는 수타사를 찾아봤습니다.


▼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 옆에는 수타사의 덕망있는 고승들의 승탑(부도)이 한 곳에 모여 있으며, 부도 중에 홍우당부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도들은 따로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부도(浮屠, 浮圖)는 승탑 또는 묘탑이라고도 하며, 스님이 입적(入寂)을 하면, 불교의식에 따라 다비식(茶毘式)을 하고, 다비가 끝나면  유골을 수습해서 함에 넣고 승탑 안에 넣어 두는데, 스님들의 무덤(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승탑(부도)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합장기도를 드리는 분이 있는데, 승탑은 스님의 묘이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만 석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없더라도 부처님으로 보기 때문에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 승탑(부도)은 모두 9기로 보이며, 원당형 승탑이 4기, 석종형 승탑이 5기로 보입니다. 보통은 부도의 표면에 스님의 호를 새기기도 하고, 따로 승탑비를 세우기도 합니다.

 

승탑을 보면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부도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석종형의 부도는 크기 차이만 있을 뿐, 모양은 대체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원당형 부도 4기는 다소 차이만 있고 모양은 아주 유사합니다. 맨 왼쪽이 홍우당 부도입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호 (1984.06.02)입니다.

 

▼ 원당형 부도(승탑)의 모양이 아주 비슷하게 보이는데, 보통 원당형 승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분합니다, 기단부는 3단으로 꾸몄으며, 유골이 들어 있는 탑신부는 약간 눌린듯한 원형이고, 상륜부는 지붕돌(옥개석), 보발,보륜, 보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슷비슷해서 어느 것이 작품성이 좋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만들어졌습니다.

 

▼ 저 다리를 건너면 속세와 인연이 끊어지고 부처님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다 같은 인생의 한 부분이니, 인연이 끊어질 것도, 이어질 것도 근심하지 말고 걱정 없이 살면 됩니다.

 

▼ 어느 절집이나 문화재수리를 한다고 장기간 가림막을 쳐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수타사의 봉황문(鳳凰聞)도 단청 작업과 사천왕상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데, 사천왕상이 있는 문을 보통 사천왕문이라고도 하는곳도 있으며, 사찰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릅니다.

 

▼ [자료사진]  봉황문이 보수작업중이라서 자료사진을 빌려왔습니다. 이 봉황문에는 사천왕상이 문 좌우로 눈을 부릅뜨고 불법을 지키는 동,서,남,북의 수문장을 하고 있습니다

 

▼ [사진자료:문화재청] 수타사 봉황문의 사천왕상의 정식 명칭은 "홍천수타사소조사천왕상 (洪川壽陀寺塑造四天王像)"이며, 숙종2년(1676년) 조각승려 여담이 만들었으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1호(1998.9.5)입니다.

 

이 수타사의 사천왕상은 특이한 재질로 만들어졌는데, 진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소조사천왕상을 만드는 과정은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빼대에 새끼줄로 묶은 다음 진흙을 바르는 작업을 여러 번 반복하게 됩니다.

 

흙이 완전히 굳으면 세밀하게 다듬고 색을 칠 하고, 나무로 만든 보관을 머리에 씌우고 지물을 손에 쥐어 줍니다.

사천왕상은 동방,서방,남방,북방으로 나누어 불법을 수호하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수호신들인데, 구분하는 방법은 보통 손에 들고 있는 지물로 구분을 하지만, 지역, 사찰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사찰마다 항상 이름이 같지는 않습니다

 

 

▼ [사진자료:문화재청] 수타사의 사천왕상을 좀 특별하게 보는 것은 사천왕상의 뱃속에서 월인석보 권 17과 18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1957년 동방지국천왕의 수리를 위해서 복장을 조사를 했는데, 뱃속에서 책 두권(4책)이 발견되었는데, 곧 월인석보(月印釋譜) 권 17, 18입니다.  강원도의 깊은 산속, 그것도 사천왕상의 뱃속에서 놀라운 책이 발견됐으니, 학계는 놀라 자빠졌을 것입니다. 

 

-  월인석보(月印釋譜) 권 17, 18은 보물(제745호)입니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 대장경입니다.

 

석보상절은 세조가 수양대군시절일 때 조선 세종 28년(1446)에 돌아가신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하였는데 곧 "석보상절"입니다.

 

놀라운 일은 석보상절을 지은때가 수양대군(세조)의 나이가 30살이었으며, 이미 불교지식에 해박하였고, 세종이 한글을 반포한 그해(1446년)에 불교 언해서를 발간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종 29년(1447)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어 보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입니다.

 

1459년(세조5년)에 세조는 급사한 첫째아들 의경세자와 계유정난으로 무수히 죽어나간 혼들을 위로하고자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해서 새로운 불교경전 언해서를 만들게 되는데, 총 25권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월인석보입니다

 

조선역사에 왕이 직접 불경 언해서를 만든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서 세조의 해박한 불교지식이 빛을 발하는 결과로 월인석보가 탄생하였습니다.

 

뛰어난 재능은 그 아비(세종)에 그 아들(세조)이었습니다만, 수양은 뛰어난 재능을 이용하여 쿠데타로 조카를 죽이고 세상을 바꾼 대가로  두 아들을 급사하게 하는 업보를 얻었습니다. 

 

※ 수타사는 6.25전쟁중에 피해을 입지 않고 대체로 무사해서 이러한 보물들이 무사히 전해져 오게 되었습니다

 

▼ 수타사에는 중간 크기의 정도의 완성도가 아주 높은 동종이 있습니다. 수타사 동종은 보물이며, 범종각 안에 보호되고 있습니다

 

▼ 수타사 동종은 현종 11년(1670)에 만들어졌는데, 이 동종을 만든 사람은 비구스님으로서 동종을 만드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비구사인(思印)입니다. 비구사인은 주종장(鑄鐘匠)이고, 물론 7~8명의 인원이 보조를 하였습니다

 

사인비구(思印丘)는 여러 사찰에 동종을 만들어 달았는데, 총 8기이며, 뛰어난 작품성으로 전부 보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습니다(2021년 부터 보물의 순번은 붙이지 않고 그냥 국가보물로 부릅니다만, 참고로 연번이 있는 보물이라서 올렸습니다)

- 보물11-1호 :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
- 보물11-2호 : 문경 김룡사 동종
- 보물11-3호 : 홍천 수타사 동종
- 보물11-4호 : 안성 청룡사 동종
- 보물11-5호 : 서울 화계사 동종
- 보물11-6호 : 양산 통도사 동종
- 보물11-7호 : 의왕 청게사 동종
- 보물11-8호 : 인천 강화 동종(강화역사박물관)

 

▼ 종을 매다는 용뉴는 세밀하고 힘차게 표현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동종에는 음통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서는 점차 음통이 사라졌습니다.

 

▼ 종의 상단을 보면 알 수 없는 문자가 이어져 있는데, 인도의 옛 글자인 범어(梵語)를 빙 둘러서 새겼습니다. 뭐라고 새겼는지는 자료를 찾아봐도 없습니다.

 

▼ 수타사의 사인비구동종(思印比丘銅鐘)은 전체 높이 110㎝, 종신 83㎝, 입지름 74㎝이며, 일반 절집에서 보는 동종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졌습니다. 종을 치는 당좌에는 화문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사인 스님은 종의 재료인 구리를 떡 주무르듯이 하는 재주가 있었나 봅니다.

 

▼ 상단에 새겨진 보살입상은 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종의 몸통 네 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 종의 몸통둘레에는 수많은 시주자의 이름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시주자 중에 여성 시주자도 많이 보이는데, 이름도 정겨운 동주, 춘이... 등의 옛 이름이 보입니다.

 

▼ 종의 하대(下帶)에는 여러 무늬가 엉켜 있는데, 연잎으로 보이는 문양도 있습니다.

 

▼ 범종각에서 보는 수타사의 요사채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옛날식 절집을 봅니다. 요즘의 절집은 너무 높고 화려해서 보는 맛은 없지만, 아직도 수타사는 지붕이 낮은 조선식 절집의 멋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 오른쪽을 보면, 눈길을 끄는 당우(宇)가 보입니다.

 

▼ 이 건물의 중앙에는 수타사(壽陀寺) 현판을 달고 있는데, 흥회루(興懷樓)라고 하며, 효종9년(1658년)에 지어졌습니다.

 

▼ 산이 많은 강원도의 루(樓)를 보면 경사진 땅에 다락을 만들고 그 아래로 계단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2층의 형태의 다락(樓)을 만드는데, 수타사는 평지에 강당을 만들고 흥회루(興懷樓)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 최근에 개보수가 있었는지 서까래 등 목재 등이 바뀌어진 것이 보입니다

 

▼ 깨끗한 백색칠 위에 검은색으로 壽陀寺를 썼습니다만, 글자를 쓰신 분의 인장이 있는데, 풀어 볼 재주가 없네요...

 

▼ 건물의 내부에는 흥회루(興懷樓)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내부를 보면 매우 넓은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건물 형태는 누각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흥회루는 대적광전과 마주 보며 개방되어 있어서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서의 기능과 대형 불교의식을 거행하던 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흥회루 천장에 달려 있는 목어(木魚)를 보면 흥회루가 불법을 강연하던 기능과, 법회를 열었던 장소임을 알게 해 줍니다. 고기 뱃속에 나무봉 두 개를 넣고 소리를 내는데, 딱! 딱! 하는 소리를 냅니다

 

▼ 대적광전에서 보는 흥회루의 뒷 모습니다. 보기 드문 뛰어난 조선 건축물입니다.

 

▼ 마주 보는 건물은 백연당(종무소?)이고, 좌측은 흥회루, 우측은 대적광전입니다.

 

▼ 수타사의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을 정면에서 보는 모습입니다. 건물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다포계 팔작지붕이며, 용마루 가운데 청기와가 두 개 놓여 있는데, 왕실과 어떤 관계를 뜻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대적광전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 기다란 돌기둥이 서 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청수대(淸水臺)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듯 안내문은 없습니다. 높이는 2.5미터 정도 됩니다.

 

특별한 설명이 없어서 혹시 밤에 불을 밝히는 관솔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높이가 너무 높고, 아니면 부처님전에 공양을 올리고 종이를 태우는 소전대(燒錢臺)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너무 높습니다. 결론은 청수대가 맞는 듯합니다

 

▼ 기다란 사각형의 각 면에는 투박한 문양을 새겼는데, 연꽃처럼 보이고, 기둥 위에는 물그릇 받침대가 얹혀 있습니다

 

▼ 지대석(地臺石)은 둥그렇게 다듬은 표면에 복련(伏蓮)으로 덮었는데, 너무 투박하게 보입니다.

 

▼ 청수대 상부의 받침돌에는 앙련(仰蓮)으로 둘렀으나, 너무 마멸이 심해서 잘 안 보입니다

 

▼ 청수대 받침돌 중아에 구멍은 혹시 급할 때 횃불을 꽂아두는 구멍이 아닐까? 생각도 해 봅니다.

 

▼ 대적광전의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데, 뒤의 그림은 영산회상도이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2호입니다.

보통 일반절집의 중심 법당은 대웅전으로서, 대개 석가모니불을 모십니다,

 

수타사처럼 비로자나불을 봉안하면 대적광전, 비로전, 화엄전이라고 하고, 아미타불을 모시면 극락전, 아미타전, 무량수전이라고 합니다. 

 

보통 비로자나불을 보면 손의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왼손 집게손가락을 곧게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자세이며  지권인(智拳印)이라고 하며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 주말인데도 수타사는 조용하고 절집의 멋을 느끼기에 아주 적합한 곳입니다.

 

▼ 지금의 수타사 원통보전은 관음보살을 모시는 수타사의 본전 불당입니다. 원통보전은 1992년에 재로 지었으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화려한 불당입니다.

 

▼ 지붕의 용마루의 끝을 자세히 보면 양쪽에 치미 (鴟尾)가 얹혀 있습니다. 일반적인 용마루의 장식기와가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로 보는데, 치미는 대체로 삼국시대에 왕궁이나, 큰절에 사용되었으나, 새로운 장식용 기와를 사용하게 되면서 고려시대에는 사용되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관음보살좌상은 나무로 만들어진 보살좌상이며, 복장유물을 포함하여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는데, "홍천 수타사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陁寺 木造觀音菩薩坐像과 伏藏遺物)"이라고 합니다

- 제작은 영조35년(1758년) 5월이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6호입니다.

 

수타사 관음보살좌상은 높이 46㎝이고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봉황과 화염문으로 장식된 보관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2015년 6월 27일, 관음보살의 개금불사(改金佛事 : 부처님의 몸에 금칠을 다시 하는 의식)를 하기 전에 복장(服藏)조사를 했는데, 이때 조성발원문 1점외 사리 3과, 후령통(복장을 넣는 둥근통) 및 다수의 다라니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발원조성문의 기록에서 영조34년(1758년) 5월에 강원도 홍천 공작산 수타사 옥수암에서 화승 순경(順瓊), 덕순(德淳)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자료사진:문화재청] 수타사 관음보살좌상

 

▼ [사진자료:문화재청] 수타사 원통보전 관음보살좌상의 복장유물

 

▼ 현재 수타사 경내에는 아무런 탑이 보이지 않는데, 수타사로 들어가는 공작교 반대편 방향의 30미터 지점에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자료에서 보면 1568년(선조 2)에 수타사를 이건(移建)하였다고 하는데, 그때 이건 하기 전의 절터가 현재 삼층석탑이 있는 주위가 옛 절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즉 지금의 삼층석탑의 자리는 두 번째 절터이고, 세 번째는 지금의 수타사이며, 첫 번째는 여기서 8Km 위에 있다고 합니다. 석탑이 만들어진 시대는 고려 후기로 보고 있습니다.

 

▼ 수타사 삼층석탑의 상태를 보면 지대석 위에,  하대갑석, 중대석, 상대갑석으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에는 우주나, 탱주가 없는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2층과 3층의 몸돌과 상륜부는 없어졌습니다.

 

탑이 이처럼 부분적으로 몸돌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성리학 유생들의 불교탄압이 있었거나, 일제강점기때 도굴 등에 의해 탑이 훼손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 2,3층의 몸돌과 상륜부의 보개, 보륜, 보주만 있었더라면 참 좋아보였을 삼층석탑인데, 안타깝습니다.

- 끝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