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淸怜浦)는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 해인 1446년 성삼문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가. 이후 중추부사 노(어?)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습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 였으며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고,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합니다. 단종은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중 2달만에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어 그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 청령포의 자료는 영월군의 관광용 자료와 홈페이지에서 인용 하였습니다 >>>
▼ 청령포는 마치 섬처럼 보이는 자연이 만든 감옥같은 곳 입니다. 배가 없으면 드나들기가 불가능하고, 뒤로는 험준한 산으로 웬만한 사람들이 다니기는 어려운 지형입니다. 앞에 흐르는 강은 서강입니다.
▼ 청령포 주차장앞에는 청령포 노래비가 있는데, 원래는 이 자리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여간 노래를 작곡한 분이 한복남 선생이고, 노래는 심수경씨가 불렀던 1960년대 노래였습니다.
▼ 주차장 앞에는 단종과 관련된 벽화가 있고, 앞에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가서 보면 청령포가 잘 보입니다.
▼ 벽화에서 보는 어린 단종이 한양에서 여기 영월까지 힘든길을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찹해집니다. 힘든 길이었지만, 영월에 온지 4달만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 단종(노산대군)은 청령포에서 두달동안 머물렀습니다.
▼ 작은 배는 사람이 작고 많음에 관계없이 수시로 다닙니다.
▼ 배에서 내리면 곧바로 단종이 머물렀던 소나무 숲으로 들어 갑니다
▼ 청령포 안내도 입니다. 웬만하면 한소리 안할려고 했는데, 뭐~~~ 보여야지 읽지요~~~
▼ 그래서 관광안내 리플릿 자료를 올렸습니다
▼ 소나무가 울창한 청령포의 숲에는 단종어소가 있습니다.
▼ 단종어소는 기와집으로 되어 있고, 담장은 돌담으로 되어 있습니다.
▼ 관노들이 머물던 행랑채인데 초가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 관노들의 생활상을 밀납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 행랑채 초가집을 구경하고 단종어소로 들어 갑니다.
▼ 관광안내판은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안내문이 눈에 잘 안들어 옵니다. 안내문이 잘 보이게 바꿀 방법을 고민해봐야 합니다.
▼ 그 당시 승정원 일기에는 집이 기와집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비각입니다. 이비는 영조 39년 9월에 예조판서 이이 장릉을 봉심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할 때, 청령포는 곧 단종이 거처하던 곳인데, 담의 기초가 아직 있으나 가시덤불이 가리워져 있으니, 행로를 가리키는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아뢰었는데. 영조는 이를 듣고 도신에게 명하여 어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여덟 글자를 새겨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 후면에는「歲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竪石 地名 靑泠浦」(세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 영원영수석 청령포)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조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어명에 의하여 원주감영에서 세웠다 지명은 청령포이다
▼ 단종어소의 방 내부 모습을 담아 보았는데, 보기에도 안스럽습니다.
▼ 단종어소를 나와서 관음송 숲길을 갑니다.
▼ 담장밖의 소나무가 단종이 기거하는 방이 긍금한 가 봅니다.
▼ 불행한 역사의 한 장소이기는 하지만 명승지 답게 소나무숲은 좋기만 합니다.
▼ 관음송 뒤로는 노산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 단종이 쌓은것인지 후세의 사람들이 단종의 혼을 달래줄려고 탑을 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때의 단종이나, 지금의 사람들의 마음은 같을 것 입니다.
▼ 노산대라고 하는 바위입니다
▼ 노산대에서 바라보는 서강입니다. 서강은 청령포를 지나 갑니다
▼ 깜빡하고 금표비를 못보고 와서 영월장릉 문화관에서 찍은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금표비는 고판서 윤양래(현종 14년〔1673〕∼영조 27년〔1751〕)는 영조 때 그가 영월부사로 있을 때 청령포를 찾아보고 영조 2년(1726) 10월 이 금표비를 세운 것으로 짐작이 되고,윤양래는 장릉을 봉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령포도 살펴보고 사람들이 이곳에 왕래하는 것을 금하는 금표를 세웠으며 또한 호장 엄흥도의 비석도 세웠다고 합니다.
▼ 청령포를 나서서 잠시 써 있는 글을 보고 갑니다. 2000년 영월군수가 만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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