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박물과 전시실에서 보면 보통 흔하게 보는 석비(石碑)가 아닌 쇠를 녹여 주물로 만든 만든 철비(鐵碑)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홍천군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홍천현으로 불렸는데, 철비(鐵碑)는 홍천현의 현감으로 재직했던 원만춘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보통 홍천 철비라고 합니다.
'원만춘`은 효종 9년(1658년) ~ (현종 2년(1661년)까지 약 4년간 홍천현감을 지냈으며, 홍천현감이 끝나는 해인 1661년 4월(현종 2년)에 홍천 사람들이 건립하였습니다.
※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철비는 99개가 있습니다
종목 :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1984년 06월 02일 지정)
소재지 : 홍천박물관
▼ 아무리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한 조선시대라지만, 판석에 비문을 새기는 것보다 어려운 주물식으로 만든 철비를 만들었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선정비란 덕으로 고을을 다스린 지방관리의 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석비(石碑)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홍천현감 원만춘의 선정비는 철을 이용한 주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각형의 돌로 만든 비좌(碑座)는 대충 다듬었으며, 비좌 가운데 홈을 파고 철비를 세운 모습으로, 앞면 중앙에는 세로로 비의 이름을 새겼으며, 양 옆으로 4 줄씩 비문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놓았습니다.
특이한 것은 뒷면에 이 철비를 만든 장인(匠人)의 이름도 새겼는데, 진금이(匠人秦金伊)입니다
장인의 이름이 내금이(奈金伊)로 알려졌으나, 지난 2019년 진금이(秦金伊), 즉 진쇠이로 확인되었습니다.
▼ 홍촌철비는 원래는 홍천군청의 입구 앞 도로가에 서 있었으나, 최근에 홍천박물관으로 옮겨 보존, 전시하고 있습니다.
▼ 홍천철비는 높이 85cm, 너비 42cm, 두께 7cm의 크기이며, 철비에 새겨진 글자들 중에 마모가 심해서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많습니다. 특이하게 상단에 꼭지를 세웠는데, 좀 귀엽게 보입니다.
홍천현감 원만춘은 조선 인조와 숙종 때의 문신으로, 『국조인물고』에서 보면 홍천현감이었던 원만춘이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었는데, 암행어사가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상을 받았으며, 그가 홍천현감에서 물러나자 백성들이 철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는 사실이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 한국철비대관(저자 진한용선생)에 수록되어 있는 홍천철비의 탁본입니다(경기메모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한국철비대관(저자 진한용선생)에서 해석한 비문을 인용하였습니다
▣ 정면
● 중앙
縣監元公萬春淸白善政永世不忘碑(현감원공만춘청백선정영세불망비)
● 우측비문
莅官四載(이관사재) ; 벼슬하는 4년 동안
霅熅恩德(합온은덕) : 따사로운 은덕 베풀었네.
政先革弊(정선혁폐) : 정사는 혁폐를 우선하고
治尙廉累(치상염누) : 다스림은 청렴을 숭상 했다네.
● 좌측비문
借寇末由(차구말유) : 차구를 하려 해도 방법이 없고
挽鄧莫及(만등막급) : 만등을 하려 해도 미칠 수 없네.
俾也可忘(비야가망) :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表者煜碣(표자욱갈) : 비를 세워 영원히 빛나게 하노라
▣ 후면
● 順治 十八年 辛丑 四月 日(순치 십팔 년 신축 사 월 일)
; 현종 2년 4월 (1,661년 4월)
※ 借寇(차구) : 다른 지방관으로 전출되는 것을 말리는 말.
※ 挽鄧(만등) : 훌륭한 지방관을 모셔 온다는 의미
● 匠人秦金伊(장인진금이) ; 장인 진쇠이
-> 처음에는 奈金伊(나금이)로 판단하였으나, 나중에 秦金伊(진금이)로 판명하였습니다.
▼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철비는 모두 99개라고 합니다. 다른 철비 3개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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