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사총은 조선말기인 병오년(1906년)에 홍주읍성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죽어간 수많은 의병들의 유해를 모아서 한 곳에 묻은 무덤입니다.
처음에는 "홍주구백의사총"이었으나, 1992년에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으며, 2001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보통은 묘라고 하는데, 홍주의사총은 얼마나 많은 의병들이 묻혔는지 또한 어느 누가 묻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무덤이라고 해서 총(塚)으로 구분합니다.
홍주지역의 의병항쟁은 홍주(현 홍성군)를 중심으로 부여, 부령, 청원 등지에서 전개된 2차례에 걸친 항쟁을 말하는데,
제1차 의병은 1896년이며 정부의 개화정책(단발령)의 반대와 일제의 민비시해사건에 항거하여 1895년 4월부터의 모병단계를 거쳐 1896년에 봉기하였지만 2~3일 만에 와해되었습니다.
제2차 의병은 1906년의 홍주읍성전투를 말하는데, 이 전투는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해서 의병의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내었으며, 그 뒤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온 적도 없고, 전투를 한 적도 없는데, 조선 스스로 망했다고 하는 어느 고위 국회의원도 있기는 한데, 조선이 힘이 없어서 망한것은 맞지만,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전투를 한적도 없다는 말은 거짓이라는 것을 홍주의사총은 말해줍니다.
어찌 되었든홍성의 의병들은 일본군에 맞서 나라를 구한다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쳤지만, 한국은 조선에 이어서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있다고 착각이 드는데, 조선인의 탈을 쓴 일본X 앞잡들이 독립투쟁했다고 색깔을 씌워서 나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저격하기 때문입니다.
※ 홍성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홍주군과 결성군이 행정적으로 합쳐지면서 홍성군으로 바뀌었습니다만, 조선시대에는 내포지역에서 홍주와 결성은 각각의 꽤 규모가 있는 큰 고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홍주보다는 홍성이라는 지명을 잘 알지만, 정작 홍주지역의 사람들은 아직도 홍주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랑스러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본에 맞서서 독립투쟁에 목숨을 건 투사들이 아주 많았거든요...
▼ 홍주의사총의 화장실 벽면에 의병이 봉기한 내용을 간략하게 그림으로 잘 표현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대개는 화장실 벽면을 비어있는 상태로 두거나 하는데, 홍주의사총 화장실벽에는 그날의 역사를 잘 알려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 홍주의병의 1차 봉기가 실패한 후에 2차 봉기는 전 이조참판 민종식이 주도했는데, 민종식은 전주의 친척집에서 재기를 모색하면서 처남인 예산 대술의 이용규에게 의병의 모집과 식량등을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5월 12일(양력) 부여의 홍산군 지티(지금의 부여 내산면 지티리)에서 민종식은 4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재봉기 하면서 점령 목표를 다시 홍주읍성으로 정했습니다.
▼ 홍주읍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관군은 의병부대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북문(망화문)을 통해 달아났으며, 홍주읍성 탈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식, 채광묵 등 지방의 명망 있는 유생들이 의병을 모았으며, 홍주의병은 총포로 무장한 의병 600여 명, 창을 가진 의병 300여 명, 유회군(양반 유생) 300여명 등 1200여 명이 달했다고 합니다.
▼ 1906년 5월 13일 홍산(부여)을 떠난 의병부대는 남하해 서천을 점령하고, 다음날 비인을 점령하면서 4일 만인 5월 17일에는 남포(보령 남포읍성)를 공격해서 일본군의 대포와 병기들을 빼앗고, 의병들의 숫자를 1000여 명 이상으로 불린 후에 5월 19일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킵니다.
▼ 그러나 홍주읍성 점령 10일 만인 5월 31일 새벽에 일본정규군이 대포를 앞세워 조양문을 포격으로 부서 버리고 한꺼번에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전투는 이미 의병들한테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의병들은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후퇴를 하였는데, 일본군은 도망치는 의병은 물론 마을에 있는 남자들을 도륙하면서 홍주읍성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시체가 널려있게 되었습니다
▼ 홍주의사총에는 홍주읍성전투에서 죽어간 의병들이 정확하게 얼마나 묻혀있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수십에서 수백 명까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만, 원래는 "홍주구백의사총"이었던 점을 보면 약 900명 정도가 묻혀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에서는 구백 명이 묻혀 있는지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그냥 "홍주의사총"이라고 하고 1992년 묘역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 [자료사진] 그 당시의 의병들의 모습
▼ [자료사진] 홍주전투의 기록화, 동문(조양문)으로 밀려 들어온 의병들이 일본과 백병전을 하고 있습니다.
▼ 홍주의사총은 묘역과 제사를 지내는 사당, 기념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료:홍선군청]
▼ 홍주의사총성역사업조성기(洪州義士塚聖域事嶪造成記)인데,알아보기 어려워서...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만, 어려운 한자가 많아서 옥편을 뒤적여 봐야 했습니다.
洪州義士塚聖域事嶪造成記(홍주의사총성역사업조성기) |
惡辣(악랄)한 일본군(日本軍)이 排日路線(배일노선) 固守(고수)하던 國母(국모) 明成皇后(명성황후)를 弑害(시해)하고 이어 單髮令(단발령)의 강행과 乙巳保護條約(을사보호조약)의 締結(체결)로 民心(민심)이 날로 洶洶(흉흉)해 지자 이에 憤槪(분개)한 洪州(홍주)고을 忠義烈士(충의열사)들이 忿然(분연)히 倡義蜂起(창의봉기) 하였으니 趙鮮趙末(조선조말) 主權恢復(주권회복)을 先導(선도)한 抗日義兵(항일의병)의 始初(시초)였다. 救國一念(구국일념)에서 죽기를 盟誓(맹서)하고 赤手空拳(적수공권)으로 抗戰(항전) 하였으나 1906년 丙午陰四月九日(병오음4월9일) 黎明(여명)에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殉義(순의)하였으니 山川(산천)도 驚歎痛哭(경탄통곡)할 慘思(참사)였다. 九百餘義士公(구백여의사공)들의 屍身(시신)은 救國(구국)의 寃悍(원항)도 풀지 못한채 散骼(산격)위에 ㅇㅇ만 오가는 險谷(험곡)에서 四十餘年間(사십여년간) 風霜雪寒(풍상설한)에 曝露(폭로)되었으니 眞實(진실)로 가슴을 외이는 痛恨(통한)이었다. 民族(민족)이 있어도 疆土(강토)가 없었던 倭政(왜정)때에는 散華(산화)한 先烈(선열)들의 遺骸(유해)를 修墓(수묘)할 겨를 조차 없었다가 8.15 光復(광복)을 맞아 散材(산재)한 荒瘞(황예)를 搜尋(수심)하여 深坎合葬(심감합장)의 禮(예)를 갖춘 後(후) 祠堂(사당)에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고 九百義士塚(구백의사총)이라 하였다. 1991년 12월 總(총) 37億(억)원의 財源을 마련하여 萬餘平(만여평)의 敷地(부지)를 確保(확보)하고 墓域整備(묘역정비) 祠堂補修(사당보수) 石物造成(석물조성) 三問新築(삼문신축)과 付屬工事(부속공사)까지 完成(완성)하여 말끔히 丹粧(단장)하고 이 聖域(성역)을 洪州義士冢(홍주의사총)이라 改稱(개칭)하였다. 이 歷史的(역사적)인 事業(사업)은 殺身(살신)으로 護國(호국)한 英靈(영령)들의 넋을 永遠(영원)히 哀悼(애도)하고 그 殉國情神(순국정신)을 繼承(계승)함으로써 萬世(만세)토록 護國(호국) 할 수 있는 忠節(충절)의 指標(지표)가 될것이다 1992년 12월 30일 洪城郡守 李商善 謹識(홍선군수 이상선 근식) |
▼ 홍주의사총은 2001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문은 근대화 시기의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 큰 뜻을 품고 일어난 의병들을 합장한 묘역의 창의문(倡義門)입니다. 홍주읍성의 전투에 참가한 의병들의 수는 대략 12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홍주읍성에서 패한 의병들이 도주하다가 일본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유해가 홍성천, 월계천 주변과 남산 부근에 방치된 것을 주민들이 거두어 현재의 의사총 주변에 가매장하였다가, 해방 후 1949년 4월 5일 식목일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여러 어른들의 고증을 걸쳐서 현재의 의사총 주변에 묻혀 있는 유해들이 1906년 홍주읍성 전투 시 전사한 의병들의 유해라는 것이 확인이 되어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습니다.
▼ 홍주의사총은 1906년 5월 30~31일 홍주성전투(2차 의병투쟁)에서 일본군에 희생된 홍주의병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만, 어느 누가, 또한 얼마나 많은 의병이 묻혀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 묘소의 오른쪽에 ‘丙午殉難義兵將士公墓碑’(병오순란의병장사공묘비)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고, 옆에 오석에 빽빽한 글씨가 새겨진 묘비가 있습니다.
▼ 오석에 새겨진 비문은 앞뒤로 새겨져 있는데, 앞면만 옮겨 보았습니다.( 빽빽한 글씨가 오석(烏錫)에 새겨져 있는데, 1959년 정인보선생이 짓고, 심상직선생의 글씨로 새겼다고 합니다.)
丙午殉難義兵將士公墓碑’(병오순란의병장사공묘비) - 앞면 |
대한제국 광무10년(1906) 윤달 4월 9일 밤 왜군이 홍주(홍성)의 동문을 공격하였다. 우리의 의병과 장졸은 이에 출격하여 함께 싸웠으나 새벽에 모두 전사 하였다. 세상인은 이 일을 홍주에서 일어난 병오년의 일이라 한다. 그 이전 을사년(1905) 겨울 일본이 5적대신(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준현)과 연결하여 보호조약을 맺어 국권이 느닷없이 일본에게 넘어갔다. 정부.민간의 충절과 의리있는 인사들은 대중을 모아 사투를 맹세하였다. 아침 고종의 밀지를 받아 남으로 내려온 자가 있어 기세를 모아 밀지를 따랐다. 의병이 남포를 기점으로 홍주로 들어가 부서를 처음 정하고 왜적이 쳐 들어와 성에 다다름을 알리자 주장이 달아났다. 지난 항쟁사로 예를 들어도 적을 만나 장졸을 거느리지 부하들도 스스로 정비하지 못했다. 오직 이번에 제어한 일은 의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라잃은 슬픔이 사무쳐 답답한 심정이 가슴에 가득하여 칼날에 눈빛이 번득인지라 왜적을 만남이 10년여의 한 남긴 원수 같았다. 그러나 우거진 숲속에서 갑자기 적을 만났으니, 누가 이를 막을 수 있었겠는가. 이 일로 이날 성에 남은 의병들은 줄지어 선 대오가 장업하였고 손발이 매우 날렵하였다. 이는 사람에 의해 제어한 것이 아니고 정의에 의한 것이다. 성재한.채광묵.전태진.서기환등이 의병 영관이 되었다. 어떤이가 재한에게 ‘주장이 가면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 하니, 재한이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남아가 여기서 머리와 귀를 베일지언정 어찌 왜적에게 굴복하랴” 고 하였다. 태진.기환등도 모두 뜻이 같아 더욱 싸움에 힘쓰게 하니 병사들도 힘써 그 명을 따랐다. 이는 영관을 따른게 아니라 정의를 보고 따른 것이다. 의병들이 보유한 병기는 모두 낡았으나 왜적의 대포의 위력을 천지가 앞뒤의 건물들이 전복되고 뒤흔들렸다. 의병들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왜적과 싸워 크게 살상시켰다. 이에 적장 토방원지조와 목태랑이 모두 죽었다. 한창 싸움이 벌어진때 달빛이 밝다가 갑자기 누런 안개가 짙게 끼어 지척간도 알아볼 수 없었다. 적은 군사를 늘려 양면으로 공격하여 성근 결국 함락 되었다. 이때 의병으로 죽은 이의 시신은 언덕만치나 쌓여 이 틑날 이를 가져다 골짜기의 구덩이에 매장하였다. 당시 왜적의 기세가 더욱 치열하여 근방 사람들도 잡혀 시체더미만 늘어나 길이 막힘을 볼 수 있었다. 시신이 자기집에 보내진 자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성명도 알지 못해 인명수가 중복되어 밝혀지지 않은 자는 어떤이는 7,8백 또 어떤이는 5.6백명이라 한다. 지금도 그날이 되면 성곽 안팎으로 기제를 지내는 밤의 곡소리가 이따금씩 들여온다. 대저 을사변란 이후 그 지역 의병은 계속 일어나 모두 각기 흩어져 행동하였다. 의병들이 성을 지켜 큰 왜적을 대항한 것은 오직 홍주의 일이었는데, 졸지에 일군이 전멸하였다. 비록 비참했지만 그 주민들의 충정에 감동하여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왜적은 더욱 포악해져 우리의 의병은 이에 맞추어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당시 형세는 의병이 각자 흩어져 행동한 것과 성을 스스로 지킨 일인데, 모두 승리하지 못한 계획이었다. 한치의 칼날로 암석을 찔러 잘리게된 것은 칼날 뿐이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니, 홍주의 의병과 여러 군자들이 어찌 당시의 형세가 그와 같았음을 몰랐겠는가!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줄 알면서도 오히려 왜군과 싸워 전사했으니, 이는 의가 극진하고 인이 지극한 것이다. 오직 그리하여 의병과 왜군 사이의 강약과 예비(?),노둔함이 더욱 차이가 있었고, 여러 군자들의 정의가 더욱 밝아져 해나 별이 오랠수록 몹시 빛나... |
▼ 묘역의 오른쪽에는 사당이 보이는데, 창의사(倡義司)입니다.
▼창의사(倡義司)의 문은 삼문형태이며, 진충문(盡忠門)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습니다.
▼ 사당은 들어가서 볼 수 없으므로 담장 너머로 보았습니다
▼ 창의사는 구백의병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하나의 위패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홍주의병의 묘역 뒤로는 홍주의병기념탑이 세워져 있으며, 2013년 2월에 준공되었습니다.
▼ 홍주의병기념탑 벽에 홍주의병의 개요, 전투살황, 편제등에 대하여 새겨진 글자판입니다(스마트폰에서는 잘 안 보입니다)
▼ 오석에 새겨진 글자들이 스마트폰에서 볼 때 잘 안 보여서 글자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홍주의병 개요 |
의병대장 김복한을 중심으로 1895년 봉기한 제1차 홍주의병은 척왜분위기를 고조시켜 을미의병을 적극적으로 확산케 하였으며, 의병대장 민종식을 중심으로 1906년 거병한 제2차 홍주의병은 일본군과의 홍주성전투에서 수백명이 산화하여 단일전투로는 의병항쟁 사상 최대규모의 희생자를 내는 등, 홍성군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우뚝 서 있습니다. 특히 일본군과 국권회복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제2차 홍주의병 수백여명의 유해가 모셔진 홍주의사총(구백의총)은 의병항쟁 유적지로는 보기 드물게 지난 2001년 8월 국가사적 제431호로 지정되어 홍주의병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홍주의병항쟁이 부각되지 못하고 급격한 도시발전과 세월의 흐름에 가려져 잊혀쟈가고 있어, 홍주의병항쟁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도록 홍주의사총 부지내에 홍주의병기념탑을 건립하여 호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고인들의 유지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홍성군민들의 자긍심을 함양하고 홍성군이 정체성을 재정립하여 후세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
홍주의병 전투일지 (1906년) |
- 3월 15일, 정산 천장리(현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서 의병 봉기, 홍주공격 시도 - 3월 16일, 공주 공격게획에 따라 화성 합천(현 청양군 화성면 합천)으로 이동 - 3월 17일, 일본헌병대와 홍주관군들의 공격으로 의병진 와해 - 5월 9일, 홍산군 지치동(현 부여군 내산면 지치리)에서 의병 재봉기, 홍산관아 점령 - 5월 13일 서천 비인 경유하는 5일간의 전투후 남포성 함락, 남포군 병사 31명 및 휴희군 33명 의병 합류 - 5월 19일, 결성 유숙후 홍주로 진격 홍주성 점령, 일본헌병 덕산방면으로 도주. - 5월 20일, 혼주성 점령 후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향식, 유호근 등이 합류, 의병진 재편. - 5월 20일, 공주주둔 일본경찰, 일본헌병 홍주성 공격 패퇴. - 5월 21일, 일본 경찰대 경부, 보좌원 순검 13명 홍주성 공격, 대흥지역으로 패퇴. - 5월 22일, 서울 경부 고문부의 일본인 경시,순사등 총 21명, 홍주성 공격위해 증파. - 5월 24일, 서울에서 증파된 21명과 공주 경무진위대 파견 조선병 57명 홍주성 공격 패퇴 - 5월 27일, 홍주의병, 일본경찰, 일본인 3인, 일진회원 2명 체포(5월 29일밤 처형), 홍주의병 진압위해 공주진위대 20명, 청주진위대 위관 1명, 병정 50명 파견,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보병 2개중대 홍주 파견명령. - 5월 29일, 곽한일, 남규진 의병부대(약 400명) 홍주성 입성. - 5월 30일, 일본군 보병2개 중대(약 400명), 기병반대 소대, 전주수비대 1개 소대, 홍주성 포위 - 5월 31일, 오전 2시 30분경 일본군 홍주성 공격, 3시경 일본 기마병 폭파반 동문 북문 폭파, 보병,헌병대,경찰대 성안 진입, 7시반경 시가전 후 일본군에 의해 홍주성 전체 점령, 홍주의병 수백명 이상 전사. - 8월 6일, 유준근,최상집,이상구,안향식, 남규진, 이식, 문석환,신현두(홍주 9의사) 대마도 유배 |
홍주의병 이후 활동 |
- 1906년 5월, 차상길, 당진 소난지도에서 의병투쟁 - 1906년 6월, 이세영 체포 - 1906년 이세영 유배 방면후 애국계몽운동 전개 - 1908년 7월, 이용구 청양 추티에서 의병 재봉기. - 1906년 10월, 이용규, 예산 현곡(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이남규 자택에서 민종식등과 의병 재봉기 협의(11월 20일 예산 공격계획 수립) - 1906년 11월, 홍순대, 부여군 은산면 의병 80여명 규합하여 의병활동 재개. - 1906년, 11월17일 곽한일,박윤식,이석락,이남규,이충구, 일본헌병,지방병,일진회원의 습격으로 체포 - 1906년 11월 20일, 김복한,홍주의병대장 민종식과 의병봉기 논의로 구속되었다가 11월말 방면 - 1906년 11월 20일, 민종식 체포, 공주부로 이송 뒤 서울로 압송 - 1907년 1월, 맹달섭, 부여군 일본인 가옥 습격 일본인 3명 사살 - 1907년 2월 21일, 맹달섭 경기도 죽산의 쌍령으로 이동 활동 - 1907년 5월 7일, 맹달섭, 당진주재소 습격 - 1907년 7월 3일, 민종식 교수형 선고 - 1970년 7월 4일, 민종식 종신유배형 결정 - 1907년 9월, 이남규, 이충구 부자, 일본 기마대에 체포 압송 도중 귀순 거부로 온양 평촌(현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학살. - 1907년 10월, 김복한 보령군 순사보조원과 순검에게 구금. - 1907년 12월, 안병찬,박창로, 정산(현 청양군 정산면)의 칠갑산 부근에서 항쟁하다 일본헌병대에 체포, 이만식,당진,해미,대흥,서산,부여,공주,경기안성,용인,죽산,양성등에서 활동 - 1908년 3월 11일, 맹달섭, 청양군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 - 1909년 7월, 김동락,김무경, 일본헌병대에 체포. - 1911년, 이세영, 만주방면후 신흥무관학교 교장과 통의부 군사위원겸 사령장 등 역임. - 1915년 7월, 김한종장두한, 신현두, 성달한, 윤병일, 성문경, 유창순,한훈,항일비밀단체인 대한광복회 설립 주도 - 1919년 3월, 김복한, 3.1운동 발발 계기로 안병찬,김덕진,전양진,임한주 등과 함께 파리장서장운동 전재 |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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