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은 충남 서해안의 가운데 위치한 홍성군의 옛 이름으로 조선초 행정구역 개편 시 주변 19개 군현을 관할하던 내포지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의 홍주관아는 군청이 들어서 있어서 관아의 외문인 홍주아문과 동헌인 안회당. 여하정만 남아 있습니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때 행정관서, 경찰관서, 헌병대 또는 학교나 병원으로 쓸려고 대부분의 관아 건물을 헐어 버렸기 때문에 홍주관아도 예외 없이 대부분 헐린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홍주군이었으며 일제강점기 1914년 즈음에 결성군과 홍주군을 합쳐서 홍성군으로 개칭이 되었지만 아직도 홍주라는 지명에 자부심이 커서 그런지 홍성보다는 홍주라는 지명에 더 애착을 가지시는 분들이 많으신 듯합니다.

 

홍주읍성과 홍주관아를 들러보면, 아직은 관광자원으로서의 준비는 좀 모자란 듯한데, Story를 더해서 읍성을 정비하고, 관아를 복원을 한다면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듯합니다

 

▼ 현재 홍주읍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며,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홍주읍성은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해풍현(지금의 구항면)에 있던 읍치를 조선초기 태종 때 왜군(왜나라 해적)에 대항하여 지금의 자리에 읍성을 짓고 읍치를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자료사진;홍주일보] 홍주관아의 복원도

 

▼ 1872년(고종 9년)에 만들어진 홍주현 지도중에서 관아의 부분만 보겠습니다. 홍주아문, 외삼문, 동헌, 정자(사달정)가  그려져 있습니다.

 

▼ 홍주관아의 외문인 홍주아문(洪州衙門)입니다.  보통은 세 칸의 삼문인데, 홍주아문은 다섯 칸인 오문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관아의 문은 처음 봅니다

 

▼ 그림이 너무 세밀하게 그려져서 알아보지를 못 하겠습니다.

 

▼ 지방수령인 홍주목사가 일을 보던 동헌(안회당)에 들어가려면 외문과 내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현재는 외문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홍주아문은 1870년(고종 7년)에 관아의 외문으로 다시 지어졌다고 합니다

 

[자료사진:1932년] 일제강점기때 홍성군청의 홍주아문 모습입니다

 

▼ 고종 때 문을 고쳐지으면서 흥선대원군이 외문의 이름인 홍주아문의 글씨를 내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글씨 끝에 낙관이 새겨져 있는데, 어느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 5칸의 외문이고 문칸마다 비어 있지만, 원래는 가운데 문만 남기고, 각 칸은 문간방이나, 창고로 쓰였습니다

 

[자료사진:방방콕콕] 가을의 홍주아문

 

▼ 군청 안에서 보는 외문(홍주아문)이며, 일반적인 3칸의 문이 아닌 5칸의 문입니다. 가운데 문만 남기고 양쪽의 공간에는 창고나 문간방이 있었습니다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군청안의 커다란 느티나무인데 고려의 공민왕때 심었다고 하며, 고을에 나쁜일이 일어날 것같으면, 밤새워 울어서 미리 예방을 하였다는 나무입니다.

조선시대에 목민관들이 홍주목에 부임을 하면, 처음에 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지금의 홍성군청은 너무 비좁아서 부서별로 여기저기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본청은 주차장처럼 차가 많이 있어서 홍성군의 규모에 비하면 지금의 군청은 좁게 보입니다.

홍주관아의 자리에 군청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비좁아서 군청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군청이 읍성밖으로 멀리 옮긴다면, 비좁은 문제는 단번에 해결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홍주관아라는 정체성이 사라지고 또한 홍주(홍성) 중심지의 경제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여러 가지로 잘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 군청 뒤에서 보는 동헌이며, 안회당이라고 합니다. 관아의 목사가 일을 보던 딱딱한 느낌의 동헌의 느낌이 없이, 딱 보면 어느 대감집에 딸린 사랑방처럼 보입니다. 

 

원래의 홍주관아의 동헌은 근민당(勤民堂)이라고 있었으나, 1977년에 해체복원 공사 중에 발견된 상량문에서 숙종 4년에 자리를 옮겨서 새로 동헌을 지었다고 하였으며, 고종 7년(1780년)에 개축을 하면서 대원군이 홍주관아의 외문(홍주아문)의 편액과 동헌의 편액을 안회당(安懷堂)이라는 글씨를 내렸다고 합니다만, 흥선대원군의 글씨가 쓰인 편액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조선시대 고종 전에는 그냥 동헌(動軒)이라는 편액을 걸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료사진:빙방콕콕] 홍주동헌 안회당

 

▼ 지금은 군청직원이나, 외부에서 군청에 일을 보러 보시는 분들의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합니다. 뭐... 이것은 참 잘하는 것 같습니다. 문화재라고 지어 놓기만 하고,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으면, 건물은 금방 망가지거든요!!!

 

▼ 어느 집안이 권력 좀 있고, 꽤나 위세를 떨치는 대감집 사랑채처럼 멋진 한옥이지만 엄연한 관아의 중심인 동헌입니다

 

▼ 보통 관아의 집무실 처마밑에는 그냥 동헌(東軒)이라는 편액을 거는데, 홍주목의 관아에는 안회당(安懷堂)이라고 걸었습니다. 안회당이라는 동헌의 이름은 흥선대원군이 지었으며,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집이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 안회당 주변은 물론 군청내부의 모든 지역이 주차장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차가 너무 많습니다. 더군다나, 홍주아문과 안회당은 사적이므로 가급적 주차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조금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안회당의 뒤에는 배롱나무가 멋지게 피어 있습니다.

 

▼ 지금의 자리가 원래는 근민당이 있었던 자리라고 하며,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었습니다.


읍성의 성곽아래, 안회당의 뒤편에 있는 연못에 있는 정자이며, 원래는 청수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 조선 고종 때에는 안회당 뒤편에 사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습니다. 그럼 청수정이 있었다는 안내문은 무엇인지?....

 

▼ 1896년(고종 33년) 관찰사 이승우가 옛 청수정(淸水亭)자리에 새로 정자를 짓고 여하정(余何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합니다

 

▼ 나는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뜻을 가진 여하정(余何亭)입니다.

 

▼ 역대 홍주목사들이 일하는 중에 가끔 여기서 쉬었다 갔을 것입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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