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金) 까마귀산의 절집이라는 예산의 향천사(香泉寺)에 구층 석탑과 멸운대사의 부도(승탑)를 보러 다녀왔습니다. 고대 예산(禮山)의 지명이 오산(烏山)이었다는 것을 보면, 향천사가 자리 잡고 있는 금오산(金烏山)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향천사는 백제 의자왕 16년에 의각대사가 금오산 기슭에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전설로만 알려져 있고, 기록 근거가 없어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구층석탑이 전형적인 백제의 탑이 분명하므로 향천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예산군의 변천사를 알아보면, 백제때는 오산현(烏山縣), 통일신라때는 고산현(孤山縣), 고려 초에는, 예산현으로,  바뀌었고, 조선말까지 예산군이었다가, 일제강점기 1914년에는 대흥군, 덕산군, 예산군을 통합하여 예산군으로 통합되었습니다.

 

▼ 향천사는 조선시대 말까지는 예산군(예산현)을 대표하는 큰 절이었으나, 일제강점기때, 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수직계열화 작업으로 인해 덕산군(덕산현) 수덕사의 말사로 예속되었고, 수덕사가 예산의 대표사찰로 알려지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향천사의 가치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차라리 번잡한 수덕사 보다는 조용한 향천사를 한번 찾아보시는 것도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일주문의 편액(扁額)를 자세히 보면 "금오산향천사" 중에서 산(山) 자를 아주 작게 썼는데, 무슨 뜻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글씨를 쓰신 분은 향천사 회주(會主)이신 법정(法定) 스님입니다.

 

▼ 옆에서 보는 멋진 이름을 가진 향설루(香雪樓)가 조선건축의 멋을 한껏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통사찰의 건축에서는 2층 건물인 다락(樓)을 세우는 경우는 주로 산사에서 종각을 겸한 본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지었지만 그리 흔하지는 않았는데, 현대에 와서는 커다란 2층 루(樓)를 를 만드는 것이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산 금오산 향천사 창건설화 (禮山 金烏山 香泉寺 創建說話)
창건 이야기에 따르면 의자왕은 신라 무열왕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하자 의각대사를 일본에 보내 원군을 청하게 된다. 652년(의자왕 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사에 머물던 의각대사가 중국 당나라로 가서, 오자산에서 3년간 석불 3,053상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16나한상등 부처를 조성해, 655년 사신을 따라 부처상을 돌배에 싣고 오산현 북포해안(지금 예산읍 신암면 창소리)에 도착한다. 

의각대사는 싣고온 부처를 봉안할 절터를 마련하기 위해 배에서 한 달 동안 지극 정성으로 예불을 올리던 어느 날, 금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배 주위를 돌고 사라지기에 뒤를 밟아보니 지금 향천사 자리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서 주위를 살펴보니 향내음이 그윽하여 산 이름은 금오산, 절은 향천사가 되었다고 전해온다. 


번외로 창건설화에는 불사를 도운 ‘흰 소’가 등장한다. 싣고온 부처상을 옮길 때 불심깊은 이가 흰 소 한 마리를 끌고와 불상 모시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 그 소 덕에 7일만에 불상을 모두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소는 기력이 다해 바위 위에서 소리를 한번 내고 죽었다고 하며, 그를 가엾게 여긴 백성들은 바위의 이름을 ‘고함암’이라 명하고 소를 기렸다고 한다. 현재 예산군 향천리에 있다고 한다.


​▼ 향설루는 2019년에 지었는데, 마치 관아의 아문처럼 거대한 다락(樓) 문이며, 향이 눈처럼 내린다(?)는 향설루(香雪樓)의 편액 글씨는 향천사 회주(會主)이신 법정(法定) 스님이 썼습니다.

※ 법정(法頂) 스님과는 다른 스님입니다.

 

▼ 향설루를 본전 앞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며, 산사(山寺)에서는 계단식 지형을 활용해서 누각(樓閣)을 짓고 아래에는 출입 통로, 위에는 주로 종을 달았습니다만, 향천사의 향설루에는 범종이 없으며, 신도들의 휴게소 정도로 쓰이는 듯합니다.

 

▼ 향설루 앞에 두기의 멋진 석등이 있습니다만, 보통은 본전 앞에 하나만 세우는데, 두기를 본전에서 멀리 떨어진 향설루앞에 세웠습니다.

 

아마도 남원 실상사의 석등을 보고 모작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고려시대 양식의 아름다운 석등을 보는 것과 똑같습니다.

 

석등은 부처님 말씀인 진리의 빛으로 어두운 마음을 밝혀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상징적 조형물이며, 가끔 오래된 절집의 석등에서 초의 그을음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에는 촛불을 밝혔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 향천사의 본전인 극락전의 옆, 나한전 앞에 구(9)층석탑이 보입니다.

 

▼ 사찰이 목조건물인 특성상 화재에 아주 취약해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여러 전쟁 중에 여러 번 불에 타 버리고, 또다시 짓고를 반복하였을 것입니다.

 

고려 때 보조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조선숙종 대에 멸운당대사 혜희(惠希)가 절을 크게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극락전 앞에 2개의 구멍이 뚫린 석주(錫柱) 2기가 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당간지주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자료를 그대로 옮기는 분들이 있는데, 이 석주는 당간지주가 아니고 괘불지주라고 합니다.

 

보통은 석주를 2개씩 1식으로 하여 3미터~4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석주를 세우는데, 법회 때 불화(탱화)를 나무기둥(괘불대)에 매달아 높게 올릴 때 나무기둥을 지지해 주는 돌기둥입니다.

 

향천사의 괘불지주는 석주 4개 중 2개는 없어졌는지, 아니면, 석주 2개로 괘불을 걸어 올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괘불지주의 간격으로 보면 겨우 1미터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보면 지금은 그냥 장식용으로 세워 둔 것으로 보입니다.

 

[자료사진] 참고로 괘불지주가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보면, 불화(탱화)를 걸어서 높게 올리는 괘불대(나무기둥)를 단단하게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돌기둥입니다.

 

괘불의 넓이는 보통 3미터~4미터 정도의 상당히 큰 걸개그림이므로, 괘불지주 간의 사이는 최소한 3 미터~4미터 정도의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 극락전의 창호는 꽃으로 장식을 한 꽃살창을 한 아름다운 창입니다. 보통 사찰에서 보는 일반적인 꽃살창입니다

 

▼ 극락전 우측에 최근에 조성한 약사여래좌상이며 커다란 광배로 격을 높였으며, 불두(佛頭)위에는 보개를 얹었습니다

 

▼ 극락전 우측 아래에 커다란 범종이 보이는데, 최근(1986년)에 주조된 범종입니다. 향천사에는 불전(극락전)에서 쓰던 범종이 있었는데, 지금은 수덕사 근역성보관(불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 예산군의 인터넷 사이트(디지털예산문화대전)에서 성보문화재로 잘 못 소개하고 있는 현재의 범종이며, 이 범종은 1986년에 주조한 일반적인 동종입니다.

 

 

▼ 문화재인 향천사 범종(충남 유형문화재)은 아래사진이며,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공출로 빼앗겨 예산역까지 실려갔다가 다행히 해방이 되면서 공출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되돌아오지 않고 본사인 수덕사 근역성보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어떤 일본 X이 동종에 욕심이 생겨서 일본으로 빼 돌리려다 다행히 실패하여 국내에 남아있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향천사 범종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동종을 언제, 누가 조성했는지 알게 된 것은 종에 "康熙四拾年 壬午三月 忠淸道 ㅁㅁㅁ ㅁㅁ寺 大鐘重 四百斤 李海俊 惠雄 玄海"이 새겨져 있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즉 조선숙종 28년(1702) 때 충청도 어느 지역 ㅁㅁ사(향천사로 추정) 대종이며, 무게는 400근(약 240Kg), 종을 제작한 장인은 이해준, 혜웅, 혜경, 현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찰에서 쓰이는 불교용품들을 스님들이 직접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 동종은 일반인(이혜준), 혜웅,혜경,현해스님등이 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향천사 동종의 전체높이는 102.6㎝, 종신 64.3㎝, 무게 240kg으로 법당 안에서 사용했던 동종입니다.

 

▼ 귀한 백송(白松) 한그루가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나한전 앞에 서 있는 형천사 구층석탑이며, 많이 파손되었지만, 아름다운 목조탑처럼 잘 만들어진 백제시대의 탑입니다. 지대석 위에 각종 화분들을 올려놔서 탑을 보는 재미가 좀 그렇기는 한데, 치웠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 옥개석이 대부분 파손되어 많은 아쉬움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백제의 미(美)를 느끼게 되는 아름다운 석탑입니다.

 

이 탑은 백제 의자왕 12년(652)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백제 승려 의각이 백제에 돌아와서 655년에 향천사를 세울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임진왜란과 각종 민란, 몽고군의 침략등을 겪으면서 많이 파손된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백제탑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우아함은 그대로인 탑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정밀 조사, 측정을 해서 모델링을 해보고, 복제품이라도 만들어 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향천사의 구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3.75m이며, 하대 면석과 1층 탑신석에만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며, 2.3층 탑신석에는 우주가 없이 옥개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4층 이상은 탑신이 없이 옥개석(지붕돌)만 포개져 있는데 너무 파손이 심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상층부에는 노반과 보주만이 남아있습니다.

 

지대석에 화분은 치웠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온전하게 석탑을 보는 재미가 없네요!!!

 

▼ [자료사진:문화재청] 향천사 구층석탑의 지대석에 각종 화분들이 많아서 자료사진으로 자세하게 보겠습니다.

 

지대석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복원과정에서 새로 끼워 넣은 것처럼 보입니다


▼ 향천사의 구층석탑에서 서쪽으로 부도 있어서 보러 가는 길에 천불전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 천불전(충남문화재)에는 (의각국사 3천여불 중) 1,516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만, 내부는 볼 수 없었습니다.

 

[자료사진:문화재청] 천불전 내부를 자료사진으로 보면, 각종 불상들이 즐비합니다.


▼ 향천사의 부도를 찾아가는 길이 매우 헷갈려서 포털의 지도서비스를 이용하여 위치를 표시하였는데, 구층석탑(나한전)에서 서쪽으로 개울을 한 번 건너면 천불전이며, 또 한번 개울을 건너면 부도가 있습니다. 즉 개울을 두 번 건너야 합니다.

 

▼ 향천사의 부도를 설명하는 안내판의 글씨가 발색되어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향천사 부도 (香泉寺 浮屠) _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이 절을 창건한 의각대사와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모아 금산전투에 참여했던 멸운대사의 부도 2기가 있다. 의각대사의 부도는 바닥돌 위로 상.중.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쌓고, 둥그스름한 탑신(塔身)의 몸돌을 올린 후 지붕돌을 얹은 구조이다. 

위로 들려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일반가옥에서 보이는 서까래를 가지런히 표현하였고, 윗면의 여덟 모서리마다 조각을 돌출되게 새겨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멸운대사 부도는 만든 시기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부도이다. 바닥돌 위에 8각 기단을 두고 길쭉한 타원형의 몸돌을 올리고 그 위에 8각 지붕돌을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서까래를 본떠 새기고, 윗면의 여덟 모서리마다 돌출된 귀꽃을 두어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그 위에 보주(寶珠)를 얹었다.

 

▼ 부도가 총 4개가 보이는데, 각각 부도의 주인을 표시하였습니다.

 

※ 향림당 대용선사님은 6.25 전쟁 이후에 스님이 되었으며, 일상이 곧 수행이요, 수행이 곧 일상이어야 한다”며 평생을 수행을 실천하시었던 스님이랍니다. 

 

※부도의 왼쪽은 의각대사라는 주장이 있으나 근거 자료는 없으며, 부도의 조성양식이 고려~조선초기의 양식인데 의각대사는 백제말기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스님이어서 부도의 주인이라는 설은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오른쪽은 멸운대사 혜희(惠希) 스님의 것으로, 그는 임진왜란 때 승려 50인을 이끌고 공주 갑사의 영규대사가 규합한 승병과 함께 금산에서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며, 부도(승탑)의 양식은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승탑입니다. 

 

▼ 앞에서 보았을 때 왼쪽으로 보이는 부도는 누구의 부도인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는 없습니다만, 부도의 형태는 고려시대에 유행한 부도의 양식을 하고 있어서, 고려시대 스님의 부도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승탑(부도)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으로서 특이한 것은 지붕돌 밑면에 기와집의 서까래처럼 줄을 가지런히 새겼습니다.

 

▼ 중대석(가운데받침돌)은 여덟 모서리에 기둥(우주)을 본떠 새기고 각 면마다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팔부중상의 모습을 조각하였습니다.

 

▼ 멸운당대사의 부도는 지대석 위로, 8각 기단에 안상을 새겼으며 종모양의 탑신을 받치는 탑신석은 복련으로 처리하였습니다.

 

탑신은 기다란 종모양이며 탑신의 지붕돌(옥개석) 밑면에 서까래를 본 떠 새기고, 윗면의 귀꽃은 여덟 개인데, 사람 얼굴을 새겼습니다

 

꼭대기에는 낮은 받침돌 위로 연화의 봉오리 모양을 한 머리장식을 올려놓았습니다.

 

▼ 승탑비의 앞에는 멸운당대사 혜희지탑(滅雲堂大師惠希之塔), 뒷면에는 강희 47년 무자월일립, 즉 숙종 34(1708)에 해당하는 강희 47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멸운당대사는 조선 숙종 34년(1708 년)에 입적하였고,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이 1598년에 끝났을 때와 기간을 보면 110년이나 차이가 있는데, 멸운당대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과 전투를 하였다는 설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어 보입니다.

 

▼ 멸운당대사의 승탑을 보면 옥개석의 귀꽃에 사람 얼굴을 보입니다.

 

▼ 멸운당대사 부도의 우측에는 최근에 조성한 화려한 승탑이 보이는데, 탑신에는 보산대선사지탑(寶山大禪師)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아마도 향천사의 큰 스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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