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의 영중면의 도로옆의 작은 소공원(?)에는 익종 태봉 석조물이 형태도 갖추지 못한 채로 대충 모여져 있습니다.

익종이라고 하면 잘 모를 수 도 있는데, 조선말때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이며, 너무 일찍 죽었으며, 아들 헌종때 익종으로 추존한 왕입니다 

 

옛 왕조들은 태를 소중하게 여겨 좋은 땅에 묻으면 태의 주인이 지혜롭게 될 뿐만 아니라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어서 왕자, 왕녀들의 태를  높고 정결한 곳의 산 봉우리를 골라서 태를 묻었습니다.

 

이 태실은 일제강점기 전국의 태실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는데, 남아 있던 석조물들을 한국전쟁 이후 당시 육군 제5군단에서 인수하여 보관하였다고 전해지며, 1977년 소공원이 조성될 때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의 모든 왕자, 왕녀들의 장태절차는 물론 익종의 태실 조성 의식절차를 기록한 의궤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지정구분 : 포천시 향토유적 제30호(1986년 4월 9일)

- 명     칭 : 포천 익종 태봉 석조물(包川 翼宗 胎封 石造物)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재 지 :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640-1


▼ 익종(효명세자)의 태실 석조물의 앞쪽입니다. 어느 정도 작은 공원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도로옆에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앞에서 보면 먼저 보이는 하마비입니다. 모든 태실의 입구에는 하마비가 있었습니다

 

▼ 포털사이트 지도에서 익종태봉석조물의 모습을 갈무리 한 그림입니다. 바로 도로 옆에 있습니다. 태실의 석물들은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 하단부에 보이는 이 석물은 연자방아의 일부인듯 하며, 태봉의 석조물은 아닌 듯합니다.

 

▼ 앞에서 보면 매우 귀엽게 생긴 귀부(龜趺)가 보이는데, 어린 거북처럼 표현한 듯합니다. 태실의 귀부는 태실에 따라 모양이  많이 다른 것도 있습니다.

 

▼ 익종(효명세자)의 태실에 대한 설명입니다만, 원래의 태실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설명이 없지만, 자료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1809년(순조 9) 8월 9일에 태어난 원자의 태(胎)가 9월 3일에 지금의 포천시 영중면 성동 2리 향교골에 소재한 태봉산(胎封山)[190m], 즉 당시의 영평현(永平縣) 상면리(上面里) 고향교동(古鄕校洞) 유좌지원(酉坐之原)’의 길지였던 이 봉우리로 낙점되었다. 이후 1836년(헌종 2)에 태실(胎室)이 태봉(胎封)으로 가봉(加封)되었다"

 

- [자료:문화재청] 익종(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이야기

추존 황제 문조(재세 : 180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음력 5월 6일)는 순조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순조 27)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왕세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예악진흥을 위해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발전시켜 손수 악장, 치사, 전문 등을 직접 지었고,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이 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대왕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문화재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능은 구리시 동구릉에 있으며 수릉(綏陵)입니다.


▼ 조선왕조에서는 왕자나, 왕녀가 태어나면  태반을 항아리에 일정기간 보관한 후 미리 정해진 산 꼭대기에  태실(胎室)을 조성하고 태 항아리와 지석을 묻는데 이 절차를 장태(藏胎) 혹은 안태(安胎)라고 합니다. 이때 태실을 묻은 곳의 임자가 왕이 되면 태실의 외부를 크게 바꾸는데 가봉(加封)이라고 하며, 가봉한 태실을 태봉(胎封)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끔 태봉산, 또는 태봉리라는 마을 이름이 보이는데 태실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 거북이 모양의 비좌를 귀롱대석이라고 하고, 비석을 가봉비라고 하는데, 지금 가봉비 위에 얹혀 있는 덮개돌(옥개석)은 형태가 이상한데 원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의 가봉비는 덮개돌이 없는 비석과 이수가 일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 귀부에 얹혀 있는 태실의 가봉비인데, 이 비도 원래의 가봉비인지도 의심스럽고 아마도 부러진 비석의 반쪽만 올려놓은 것같습니다. 가봉비에 얹혀진 덮개돌은 어디서 주워다 올려 놓은 듯한데, 마치 석탑의 보주처럼 보입니다.

 

▼ 조선왕실에서는 왕자나, 왕녀의 태반을 태 항아리에 담아서 좋다는 산의 꼭대기에 묻어 놓고, 만약 태항아리의 주인공이 왕(추존왕 포함)이 되면 격식을 갖춰서 석물을 두루는데, 이러한 행위는 대개 기록(의궤)으로 남겨집니다. 

 

▼ 가봉비 뒤에 보이는 장태석물은 개첨석(거북문양)과 중동석이며 태함 위에 얹혀집니다. 이 모든 석물은 태실의 아기씨가 왕이 되면 화려하게 석물로 치장이 됩니다.

 

▼ 장태석물들이 아무렇게나 모여 있는데, 난간석(횡죽석), 난간석주(연엽주석), 동자석(연옆동자석)등이 보입니다. 

 

▼ [자료:문화재청] 장태석들이 아무렇게나 있어서 자료사진으로 훼손이 안된 태봉을 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영월에 있는 정조대왕의 태봉입니다.

 

▼ [자료:경기문화쟈연구원] 조선에서는 전국에 태실, 태봉이 있었는데,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북한지역은 조사을 못해서 자료가 없는 듯합니다.

 

▼ 연엽주석(난간석받침돌)이 6개 정도 보이는데, 원래는 8개 있어야 합니다

 

▼ 둥그런 돌은 태항아리를 담아 두었던 태함이며, 이 태함은 땅속에 묻힙니다. 태함 위에는 덮개돌이 덮히고 중동석, 개첨석 등으로 얹히는데, 태함의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여러 모양이며, 내부는  배수구 역할을 하는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익종의 태 항아리는 일제강점기때 분실되었습니다. 보통은 서삼릉에 있는 태실묘에 안장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익종은 아마도 정식 왕이 아닌 추존왕이어서 태항아리 이전 대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 [자료:문화재청]  태함에 넣는 태항아리이며, 외 항아리와, 내 항아리로 두 개가 있으며, 태함에 넣고 매장합니다. 보통은 백자 항아리를 씁니다(숙종의 태항아리입니다). 가끔 태 항아리를 개인 소장하고 있는 사례가 있기도 합니다

 

▼ [자료:경기문화재연구원]  순조의 가봉태실을 단면도를 보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태 항아리를 태함에 넣고 땅 속에 묻고 땅 위에 장태석을 두르고 가봉비를 세우면  태봉이 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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