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부터 왕들의 왕자, 왕녀(공주, 옹주)들이 태어나면 태를 일정기간 보관하였다가 길지(吉地)에 묻는 왕가들의 전통적인 풍습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그 풍습이 이어져 왔으며, 태실의 자료를 보면 왕의 자식인 아기씨의 태를 묻는 곳을 태실(胎室)이라고 하며, 그 아기씨가 왕이 되면, 태실 위에 각종 석물로 치장을 하고 태봉(胎峰)이라고 불렀습니다.
1929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실의 흔적 지우기 행패로 인하여 태항아리, 태지석등이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던 자리에 남아 있는 조선 11대 중종의 태봉에 들려 보았습니다.
가평 중종대왕태봉(中宗大王胎峰) 가평군 향토유적 제6호 (1986년 6월 19일)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 112번지 |
▼ 중종의 태봉이 있는 태봉산으로 들어가는 작은길은 나무다리를 건넙니다.
▼ 중종태봉의 위치 지도입니다. 주소는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산 112번지입니다.
▼ [자료:지역N문화] 중종대왕 태봉의 주변 사진입니다. 왼쪽 임도 끝에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 조선의 왕릉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동시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등재가 되어 있는데, 태봉. 태실도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를 하기 위한 여러 의견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대부분 왕궁와 가까운 경기도 주변에 분포되어 있지만, 태실, 태봉은 대부분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경기도의 조선의 태실과 태봉은 65개소가 있습니다만, 조선국왕의 태봉은 중종태봉(경기가평)과 성종태봉(경기광주)이 경기도에 있었는데, 성종태봉이 창경궁으로 이전되면서 중종대왕태봉이 경기도의 유일한 태봉입니다.
▼ 태봉,태실의 위치를 보면 야트막한 산의 능선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풍수지리에 의한 길지를 찾아서 태봉의 위치를 정 합니다. 중종의 태봉도 좋은 자리에 터를 잡았습니다.
▼ 안내문을 읽어 보면 중종이 1506년 왕위에 오르자 마자 그 이듬해 1507년에 태봉을 만들어졌으며, 1929년 일제에 의해 태가 서삼릉으로 반출된 이후 방치되었다가 1982년 12월 산의 주인이 이곳에 분묘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태실의 태함(胎函). 석물등이 발견되었고, 이후 흩어져 있던 여러 석물을 상색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전시하다가 1986년 6월 가평군에서 향토유적 6호〔명칭 : 중종대왕태봉(中宗大王胎封)〕으로 지정하였으며, 이듬해 1987년 원래 태봉이 조성되었던 현 위치로 석물들을 옮겨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정비하였습니다.
※ 년도별로 중종의 생애와 태실, 태비의 조성 과정을 알아 보았습니다. - 1488년 : 중종 탄생 - 1492년 : 아기태실로 처음 조성(가평 서면)_탄생후 5년후 - 1494년 : 진성대군에 봉해짐 - 1506년 : 11대 조선왕 등극 - 1507년 : 태봉가봉(태실을 가평 가평읍으로 이전) _가평현을 가평군으로 승격 - 1929년 :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강제 이봉되어 태봉지는 훼손되고 방치됨 - 1982년 : 태함과 태봉의 석물 발견(상색초등학교로 이전) - 1986년 : 가평군 향도문화재로 지정(제6호) - 1987년 : 석물을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태봉을 복원 |
▼ 중종이 누구인가 알려면 성종의 가계도를 보면 되는데, 조선 제9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으며, 7세가 되던 해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재위 39년(1544년)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자료:서삼릉 왕릉관리소] 중종대왕 태실은 가평현(加平縣) 서면에 있었는데, 중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인 1507년 현재의 위치로 태실을 옮기고 태실에 돌난간을 설치하는등 왕의 태실로서 위엄을 갖춘 태봉으로 승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29~1930년에 전국에 산재한 태실 54기를 한 곳에 모아 관리한다는 방침에 따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봉되었습니다.
- 자료사진은 서삼릉에 있는 테비군의 모습입니다.
▼ 서삼릉에 있는 중종의 태실비의 전면과 후면입니다. 후면에 파인 흔적은 일제의 연호를 지워버린 자국이며 XXX年五月(년오월) / 自京畿道加平郡郡內面移封(자경기도 가평군 군내면 이봉)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자료:e-뮤지엄] 중종의 태봉에서 서삼릉으로 이봉된 태지석과, 태항아리입니다. 태지석은 아기씨의 태실에 묻는 일종의 출생증명서와 같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희한하게 금편이 들어 있었는데, 어찌 도난되지 않았는지 긍금합니다
태항아리는 보통 외 항아리와 내 항아리로 구분되는데, 내 항아리에 아기씨의 태를 넣고, 내 항아리를 외 항아리에 넣고, 태함에 넣습니다. 그리고 태함은 땅속에 묻히게 됩니다.
태항아리는 보통 백자를 쓰는데, 최근에 문화재청에서 서삼릉의 태실에서 꺼낸 일부 항아리를 조사해 본 결과 일본에서 만든 허접한 토기였다고 합니다. 결론은 일본 X들이 진짜 태항아리는 빼 돌린 것입니다. 현재 모든 태항아리와 태지석등은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중종의 태지석입니다. 중종이 태어난 후 5년이 지난 1492년에 가평 서면에 태실을 만들고 태지석을 묻었습니다. 태지석의 명문과 아기 태실비의 명문은 내용이 같기 때문에 태지석이나, 태실비 어느 것 하나라도 없을 때 하나만 확인하면 그 태실의 주인을 알 수 있습니다.
태지석의 명문은
- 皇明弘治元年三月初五日丑時生(황명홍치원년 삼월초오일 축시생):성종19년(1488) 삼월5일 축시에 태어났다.
- 大君仇等隱金伊阿只氏胎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藏(대군구등은금이아기씨태 홍치오년구월초칠일해시장) : 대군의 아기이름은 은금이이며, 1492년 9월7일 해시(밤 9에서 낮 11시 사이)에 태장 하였다.라는 내용이 오석(검은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 중종태봉의 여러 석물들을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태봉비의 거북모양의 귀부(龜趺)가 반대로 되어 있고, 태실비(작은 비석)도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보이는 태함은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하는데, 지상에 있습니다. 결론은 태봉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문화재청] 일제가 조경용으로 창경궁에 옮겨 놓은 성종의 태봉을 보면 중종의 태봉도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자료:한민족대백과] 중종대왕의 태봉이 가평에 만들어진 경위를 찾아보면, 1492년(성종 23년)에 가평 서면의 어느 곳인가에 태를 봉안했던 것을 1507년(중종 2년)에 중종의 어태(御胎)를 옮겨 안치하고 새로 임금의 품격에 맞게 가봉하였습니다.
이렇게 왕자가 임금이 되면 태실의 품격이 급격하게 올라가게 되고 태실의 형태도 왕의 격식에 맞게 바꾸게 되는데 이어한 행위를 가봉이라고 하며, 태실은 태봉이라고 바뀌게 됩니다.
▼ [자료:문화재청] 하늘에서 보는 중종대왕태봉의 모습입니다.
▼ 가봉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일제강점기 때 태항아리와 태실비를 이전하는 과정 또는 도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신의 훼손(부러짐)이 큰 상태이며, 부러진 중간 부분을 복원을 하였는데, 중간 부분의 없어진 글자는 복원하지 못하였고, 다만 몇 자는 확인이 됩니다.(다른 자료를 통해서 가봉비의 명문을 알아보았습니다)
- 가봉비의 명문(明文)은 전면에 ‘主(주)’, ‘胎藏(태장)’과 같은 일부 글자만 보이는데, 세 글자를 추정하여 보면 ‘主上殿下胎藏’(주상전하태장)이 앞면에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 가봉비의 뒷면에는' 正'(정)자 하나만 보여서 정확한 명문의 추정은 어렵다고 합니다.
▼ 다음은 초기 안태지에 세워졌던 태실비를 보겠습니다.
태실비의 비대(碑臺)는 문양이 없으며 비신의 앞면의 글자는 인위적으로 쪼아져서 판독이 불가능하나 '중종태지석'에서 보면 '大君隱金伊阿只氏胎室’(대군은금이아기씨태실)라고 되어 있으므로 쪼아진 글자가 '大君隱金伊阿只氏胎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정종의 아기 때의 이름은 '은금이'였습니다.
태실비의 뒷면은 ‘弘治五年九月初七日亥時立’(홍치5년9월7일 해시립)이 각자 되어 있으므로 태실비를 세운 시기가 1492년 9월 7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태봉의 난간석을 보면 원래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1987년 태봉을 새로 조성할 때 새로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 [자료:e-뮤지엄] 하늘에서 보는 중종태봉입니다 가운데 오뚝이처럼 생긴 것은 석함인데, 뚜껑이 열고 그 안에 태항아리를 넣고 땅속에 묻게 됩니다.
그런데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태함이 땅 밖에 노출되어 있는데, 아마도 복원 과정에서 태봉의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그냥 노출된 채 복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태함이 땅 밖에 있는 경우도 종종 보입니다.
▼ 태함이 원래는 이렇게 땅 밖에 있으면 안 되고, 땅속에 있어야 정상입니다
▼ [자료:경기문화재연구원] 자료 그림을 통해서 보면, 태함이 땅속에 묻혀 있고 그 위에 각종 석물들이 있는 단면도인데, 태봉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 [자료:한민족대백과] 왕실의 자손들이 태실과 태봉에 안치되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는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세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사람의 태는 태봉(胎峰)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를 태실까지 봉송하는 절차와 봉안하는 의식도 까다롭다.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할 장소를 관상감(觀象監)에서 물색하고 봉송 및 개기(開基)·봉토(封土) 등의 날을 가려 정하였다.
선공감(繕工監)에서는 태를 봉송할 도로를 수치하고 역사에 지장이 없도록 대비한다. 봉송일이 되면 봉송 관원을 임명한다. 당상관으로 안태사(安胎使)를 정해 안태 봉송의 책임을 맡게 하고, 배태관(陪胎官)을 차정해 태를 봉송하는 도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며, 전향관(傳香官)과 주시관(奏時官)을 차정, 안태사와 배태관의 업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그와는 별도로 당하관으로 감동관(監董官)을 뽑아 일체의 공사를 감독하게 하고, 상토관(相土官)을 파견해 이미 선정된 태실이 길지(吉地)인가를 재확인시킨다. 그 밑에 감역관(監役官)을 두어 도로의 수치와 태실의 역사를 감독하게 한다.
태실의 역사를 마치면 토지신에게 보호를 기원하는 고후토제(告后土祭)·태신안위제(胎神安慰祭)·사후토제(謝后土祭) 등의 제례를 치른다. 태실의 주위에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벌목·개간·방목 등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킨다. 금표를 세우는 범위는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하였다.
관할 구역의 관원은 춘추로 태실을 순행해 이상유무를 확인한 뒤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태실을 고의로 훼손했거나 벌목·채석·개간 등을 했을 경우에는 국법에 의해 엄벌하도록 정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태실이 가장 많은 곳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에 있는 서진산(棲鎭山)으로 조선 왕실 13위의 태실이 있어 세칭 태봉이라 한다.
▼ 태봉비와 아기비(태실비) 뒤에 보이는 원래의 석물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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