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4대 왕 헌종의 태실은 예산군의 옥계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헌종의 태를 묻을 때는 옥계저수지가 없었는데, 지금은 태실이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보통은 아기태실일때는 그냥 누구누구 태실이라고 하다가 태실의 주인이 왕이 되면 가봉(加封)을 거쳐서 태봉(胎封)이라고 하고 그 산을 태봉산이라고도 하는데, 헌종의 태실은 헌종태봉(憲宗胎封)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헌종태실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직 태실과 태봉에 대한 명칭이 통일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헌종태실의 주소 : 덕산면 가야산로 131


▼ 헌종태실의 들머리에 도직하면 안내판이 가정집 앞에 세워져 있는데, 태실로 가는 길은 2개의 길이 있습니다.

 

▼ 저멀리 가야산이 보이고 가야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서 옥계저수지에 모이게 되는데, 헌종대왕태실은 옥계저수지로 툭 튀어나온 낮은 봉우리에 있습니다.

 

태실을 둘러싸고 도는 길이 있는데, 흰점선길을 따라서 들어가고, 나오면 됩니다.

 

▼ 헌종태봉도(보물)입니다. 태봉도는 태실을 가봉하고 전문 화공이 그리며, 왕에게 보고됩니다. 우측의 작은 글씨가 안 보여서 따로 크게 옮겨보았습니다. 

 

이 헌종태봉도는 다른 왕들의 태봉도와는 달리 마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 현실감이 좋습니다

 

태실을 가봉하고 나면 그 고을의 격이 한단계 높여지는데, 헌종태실이 있던 덕산현은 태실이 가봉되고 나서 덕산군으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 참고로 보물로 지정된 태봉도는 3점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장조는 사도세자를 추존하여 장조라고 하였습니다.

 

▼ 헌종대왕태실로 들어가는 길은 가정집 앞마당을 거쳐서 들어가는길이 있으나, 개도 짖고, 가정집 앞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합니다.

 

▼ 두번째로 들어가는 길은 전봇대옆 데크계단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이 제일 무난합니다.

 

▼ 데크계단으로 내려가서 징검다리를 건너가면 됩니다.

 

▼ 산허리에 둘레길이 있으며, 헌종대왕태실로 가는길은 이길 뿐입니다

 

▼ 둘레길에 헌종대왕태실 안내판이 보이면, 올라가는 길이 보이는데 약 35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 태실을 가봉하면 태봉이라고 안내하고 있는데, 아직 태실과 태봉의 분명한 명칭이 확정되지 않은 듯합니다.

 

▼ 헌종은 조선의 24대 왕으로서, 효명세자(22세에 요절)의 아들이며, 순조가 죽자, 8세 때 즉위하였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다 보니 할머니 순원왕후(순조의 비)가 대신 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재위는 15년이었으며, 후사가 없이 23세에 죽었습니다.

 

▼ 가봉태실비의 대좌인 귀부만 남아 있습니다만, 아기태실비도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옥계저수지에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자료:충청뉴스] ???동창회기념 4293 . 5 . 1(1960년), 사진인데, 헌종대왕 가봉태실비에 모여서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는 가봉태실비가 온전한 상태였다는 것이므로 원래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 옥계저수지에서 건져 올린 가봉태실비에서 보면 하단부에 下(하) 자가 간신히 보일 정도이며. 胎室(태실) 글자는 선명하게 보이므로 이 가봉태실비의 앞면에는 主上展下胎室(주상전하태실)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다른 왕의 가봉태실비를 빌려서 헌종대왕태실비를 재현해  봤습니다.(명종대왕가봉태실비입니다)

 

▼ 일제강점기 때 전국의 태실에 묻혀 있는 태항아리를 전부 서삼릉 한편에 모아 놓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래 사진은 헌종의 태실을 덕산군에서 옮겨온 태항아리를 묻고 그 위에 세운 태실비입니다.

 

왼쪽의 비문을 보면 '헌종성황제태실'이라고 황제로 칭하고 있는데,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이라고 하고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직계선왕(5대조까지)을 황제라고 칭하였으며, 오른쪽은 뒷면인데, 글씨가 파여 있는 것은 일본연호(昭和:쇼와)를 파낸 것이라고 합니다.

 

'유충남예산군덕산면이봉'이라고 새겼습니다.

 

▼ 태실을 가봉한 지금의 모습은 완전한 모습이 아니고 대다수의 석물은 없어진 상태입니다.

 

▼ [자료:문화재청] 참고로 가봉태실을 완벽하게 복원한 정조대왕가봉태실(영월)입니다. 이렇게 아기태비와 가봉태비가 있어야 합니다.

 

정조의 아기태실은 특이하게 정조가 죽은 후에 가봉되었습니다. 이러한 태실을 가봉하려면 많은 석재와 인원이 필요한데, 인원은 대략 1500~1700명 정도가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태봉을 지키기 위한 수비군이 별로도 7명이 배치되었으며, 주변에 각종 제약이 따랐습니다.

 

▼ 가봉태실(加封胎室)을 이루는 석재의 명칭을 알아보겠습니다.

 

▼ [자료:문화재청] 일제가 성종대왕가봉태실을 창경궁(당시 창경원)에 볼거리로 옮겨와서 설치한 모습입니다. 대다수의 조선의 왕들의 가봉태실의 모양은 거의 비슷합니다.

 

▼ 가봉비와 석재 등이 무슨 돈이 된다고 도굴을 했는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 아기태실의 주인이 왕이 되면 태실의 표면은 전체적으로 석재를 이용하여 왕의 지위에 맞게 대대적인 공사를 하게 되는데, 보통 왕에 오른 후 2~3년 후에 아기태실을 왕의 격식에 맞게 석물을 꾸미는데 이런 공사를 가봉(加封)이라고 합니다.

 

▼ 아기씨(왕자, 왕녀)가 태어나면 태를 묻는데, 겉으로는 일반 민간인 묘처럼 보입니다만, 다른 점은 아기태실비가 일반인의 묘비와는 모양이 다릅니다. 만약 태실의 주인이 왕이 된다면 봉분을 없애고 그 위에 각종석물로 치장을 합니다만, 왕녀 또는 일반 왕자들의 태실은 민묘처럼 있다가 방치되거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지기도 합니다.

 

▼ [자료사진:문화재청] 아기태실을 마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유물들인데, 총 7가지는 필수적으로 꼭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 땅속에 묻는 태함은 커다란 돌로 만들어지며, 내부에는 태항아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태함의 덮개돌이 있습니다.

 

▼ 태함에 들어가는 태 항아리는 외항아리와 내항아리가 하나로 이루어지며, 태항아리 바닥에는 동전이 들어갑니다.

 

▼ 헌종대왕태실은 각종 석물들이 많이 없어졌는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 중동석과 개첨석은 남아 있으며 중동석 밑에 있었던 태 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 모자처럼 생긴 것은 개첨석이라고 하며, 아래의 돌항아리 처럼 보이는 것은 중동석이라고 합니다. 이 중동석 밑에 태항아리를 품고 있는 태함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태항아리도 없는데, 태함이 있을까요?

 

▼ 명월봉을 한 바퀴 돌아서 오면, 정자와 옥계저수지가 시원하게 보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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