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대흥면의 대흥동헌 뒤에 뜬금없이 태실(태함 및 태비)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딱히 어디에 안치할 장소를 찾지 못해서 동헌의 뒤뜰에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을 해 봅니다만, 태실을 문화재로 취급하는 추세이므로 원래의 장소에 이전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인용한 사진과 자료는 문화재청, e-뮤지엄, 서삼릉태실연구소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동헌의 뒷뜰을 보면 화령옹주의 태함과 태비가 보입니다.
▼ [자료:파주시청] 화령옹주를 알려면 영조의 계보를 봐야 합니다. 화령옹주는 후궁 숙의문씨의 딸로서 1753.3.2 출생하여 1821.9.3에 69세로 죽었습니다.(날자는 음력임)
▼ 화령옹주 태실(和寧翁主 胎室)은 태실비(아기비)와 태항아리를 담았던 태함 뿐 입니다. 태를 담았던 태 항아리는 일제강점기 때(1929년 추정) 대흥면에서 서삼릉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 화령옹주(和寧翁主)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화령옹주는 1753년(영조 29년)에 영조와 숙의문씨 사이에서 첫째 딸로 태어났으며, 조혼관습이 있었던 조선시대였으므로 12살의 나이 때 심정지의 아들 심능건과 혼인하였습니다
화령옹주의 생모는 숙의문씨(淑儀文氏)이며, 정조가 즉위하자 사도세자를 음해하였다고 해서, 폐서인이 되고, 유배 후에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지료에서 보면 숙의문씨는 왕자도 없이 두명의 옹주(화령옹주, 화길옹주)만을 생산 했는데, 영조가 어여삐 여긴다고, 간이 부었는지,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를 저격하는가 하면, 노론의 김상로와 오빠 문성국과 결탁해서 사도세자를 모략하며,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데, 이런짓을 한 숙의문씨를 보면서도 할아버지(영조)가 예뻐하는 후궁이었으므로 세손(정조)은 어찌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정조가 왕이 돼서, 장문의 교지를 내려 숙의문씨의 죄를 포고하고, 다음날 문씨를 도성 밖으로 쫓아내는 유배형으로 벌을 내렸는데, 정조의 복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영조의 국상(대개 6개월)이 끝나자 마자, 사약을 내려 죽여 버렸습니다.
그만큼 정조가 복수의 칼을 갈았다고 볼 수 있는데, 숙의문씨는 후궁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너무 나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어머니 숙의문씨가 사도세자를 음해한 죄인이므로 , 그 딸인 화령옹주도 처벌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정조는 화령옹주가 나이 어린 때에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처벌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만약 화령옹주가 남자인 대군이었다면, 아무리 정조라고 해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왕위를 노릴지도 모르는것이 권력의 속성이었으니까요!
자료에서 보면 대신들이 화령옹주만 처벌하라고 하였다는 것을 보면, 동생인 화길옹주는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18세에 죽었습니다.
- 화령옹주(和寧翁主)는 1753.3.2 ~ 1821.9.3( 69세)-음력
- 화길옹주(和吉翁主)는 1754.5.19 ~ 1772.12.18(18세)-음력
▼ 화령옹주 태실(和寧翁主 胎室)의 안태지는 예산군 광시면 월송리 229이며, 안태날자는 1753년(영조 29년)입니다
화령옹주의 아버지는 조선의 영조이며, 어머니는 숙의문씨입니다.
태실은 보통 아기씨가 태어나고 2~3년 후에 조성하는데, 화령옹주는 태어 난지 3개월 만에 태실을 만들었습니다.
▼ [자료:서삼릉관리소] 화령옹주의 태실이 있었던 태봉의 상공사진입니다.
▼ [자료사진:서삼릉관리소] 화령옹주의 태실이 있었던 예산군 광시면 월송리 229의 태봉의 모습입니다
▼ [자료사진:문화재청] 아기씨 태실을 조성 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물품이 꼭 필요했으며, 태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태비(아기씨비)나, 태지석에 상세하게 각서(刻書)되어 있습니다
▼ 서삼릉으로 옮겨진 화령옹주의 태실비입니다
▼ 안내문이 있는데 알아보기가 좀 어렵습니다.
▼ 화령옹주의 태실 안내문의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워서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먼저 첫머리의 한문을 풀어 보면,
癸酉三月初二日,戊時生翁主阿只氏胎,乾隆十八年五月十三日,辰時藏는 (계유 삼월 초이일 술시생 옹주아지씨 태실 건융 18년 5월 13일 진시장)
즉 "영조 29년(1753년) 삼월 이일, 술시에 태어난 옹주아기씨태를, 건륭 18년(1753년, 영조29년) 5월 13일 진시에 태를 묻었다"라는 뜻으로 풀이가 됩니다
癸酉三月初二日,戊時生翁主阿只氏胎,乾隆十八年五月十三日,辰時藏 태실은 왕세자나 왕손, 대군, 공주, 옹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명산에 탯줄을 보관했던 곳이며 왕가에서는 이를 법으로 정했다. 이 태실은 조선 21대 영조대왕의 11녀 화령옹주의 태실로 화령옹주는 영조와 숙의문씨 소생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의 조카 며느리가 된다. 정조 즉위 직후 어머니 숙의문씨의 좌와 연좌되어 대신들이 화령옹주를 한성 밖으로 쫓아내 평민으로 강등시킬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정조는 화령옹주가 너무 어려 죄가 없다며 윤허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로 부터 태실은 왕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태실을 파괴하는 것은 곧 왕가의 상징을 파괴시킨다는 의미였다. 화령옹주 태실은 일제시대에 이왕직이 친일파를 시켜 파괴시켰으며 안에 있던 도자기는 일본인이 가져갔다. 현재 예산군에는 현종,헌종,화령옹주, 숙종의 3남 연령군 등 4개의 태봉이 있다. ※ 태봉 : 태실이 묻혀 있는 방향에 있는 산 |
※ 안내문에서 보면 화령옹주의 태항아리를 일본인이 가져갔다고 하였는데, 자료를 찾아보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안내문의 내용은 오류가 있다고 봅니다.
아니면, 일본인이 훔쳐 갔던 태항아리를 회수하였을 수 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태항아리의 주인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국립고궁박물관이 화령옹주의 태항아리라고 확인하였으므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유리건판 사진으로 보면, 화령옹주의 태실에서 꺼낸 외항아리(大)와 내항아리(小), 그리고 태지석이 보입니다
▼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화령옹주의 태항아리들입니다.
▼ 태지석의 내용을 확인해 보면, 화령옹주의 태지석입니다. 태지석은 태실의 땅속에 묻는 것으로서 태실의 주인을 확인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 화령옹주의 태비(아기씨비)의 앞면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보겠습니다. 태실비가 반토막으로 깨졌지만, 명문은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여기서 건륭(乾隆)은 청나라 고종 때 연호입니다
乾隆十八年三月初二日戌時生翁主阿只氏胎室(건륭십팔년삼월술시생옹주주아지씨태실), 즉 "영조 29년(1753년) 삼월 술시에 태어난 옹주아기씨태실"입니다.
여기서 "阿只氏"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인데, 한문으로 보면 "아지씨"라고 읽어야 하지만, 조선에서는 "只(지)"자를 "기"로 읽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아기씨"로 풀어봐야 맥락이 맞습니다
▼ 화령옹주의 태비(아기씨비)의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보겠습니다
乾隆十八年五月十三日 立(건륭18년오월십삼일 립), 즉 "영조 29년(1753년) 5월 13일에 비를 세웠다라는 뜻입니다
▼ 이 둥그런 돌함은 태함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땅 밑에 묻혀 있어야 하며, 내부에는 태 항아리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 [자료:충북문화재연구소] 한살 아래 친동생인 화길옹주(和吉翁主)의 태실은 단양에 있습니다만, 역시 태함 덮개돌도 없어진 훼손된 상태입니다.
※ 참고로 태실에 대해서 몇 가지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 [자료사진] 인성군(인조의 7남)의 태실인데, 조선왕실의 아기씨 태실은 대부분 이러한 모양이며,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 민묘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태실비가 달라 보입니다.
이러한 태실은 왕자, 공주, 옹주 할 것이 없이 대부분 모양이 비슷하지만, 만약 태실의 주인이 왕이 된다면, 태실은 각종 석재들로 가봉(加封)하여 격이 한층 높아집니다.
▼ 아기태실의 주인이 왕이 되었을 때 격이 달라지는 모습을 그린 단면도입니다
▼ 그러면 커다란 태함의 구조를 알아보겠습니다. 태함 내부에는 태 항아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파 냈습니다.
▼ [자료사진] 태함에 들어가는 태 항아리는 외 항아리와 내 항아리로 구분이 되며, 그림과 같이 외 항아리 속에 내 항아리가 들어갑니다. 자료사진은 숙종의 태 항아리들입니다.
▼ 외 항아리에 내 항아리를 안치한 모습의 그림이며, 내 항아리 밑의 구멍에는 동전을 넣었습니다만, 동전을 넣은 이유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 끝 -
'▣ 역사.문화재.사찰 > 왕릉.태실.원.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주_산현리 태실 (0) | 2024.12.03 |
---|---|
왕녀복란 태실(국립춘천박물관) (0) | 2023.12.02 |
예산_헌종대왕태실 (0) | 2023.08.27 |
가평 중종대왕 태봉 (0) | 2022.07.06 |
가평 영창대군 태실비 (0) | 2022.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