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에는 태실과 태봉에 대하여 두 곳이 확인이 되는데, 한 곳은 가평읍 상색리로 중종대왕 태봉이 위치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가평군 태봉리에 있는 영창대군 태실비가 있습니다.
과거 영창대군 태실비는 마을 입구에 세워진 채 방치되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태봉리의 월사 이정구 선생 묘 입구에 세워져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주소 :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308
▼ 길옆에 있지만 작은 안내판 하나만 달랑 있어서 큰 관심이 없으면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태실비가 왜 마을 앞에 세워져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원래는 태실은 좀 높은 봉우리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 영창대군 태비의 위치입니다. 월사 이정구 선생묘 입구에 있습니다.
▼ 영창대군 태실비는 월사 이정구선생 묘역 입구에 있습니다, 태비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만 역사적인 인물로서 가치는 있습니다.
보통은 태실비는 길지의 낮은 봉우리에 묻히게 되며, 모든 왕자. 모든 왕녀는 태를 묻고 태비를 세웠습니다. 태실의 형태는 보통 무덤처럼 봉분이 있고 그 앞에 태비를 세우지만, 만약 태실의 주인공이 왕이 되면 태실을 격식에 맞추어 석재로 치장을 하면서 태봉이라고 격상을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태실과 태봉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왕녀(공주)의 태실은 태봉이 될 수 없었습니다.
▼ 원래는 태비는 서쪽 300미터 떨어진 봉우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광해군 때 파괴되고, 그나마 태실이 있던 일대의 땅을 인조 때 월사 이정구선생에게 하사 하면서 흔적은 사라졌습니다.
영창대군은 이복형인 광해군과 북인의 권력독점에 희생된 왕자였는데, 8살 어린 동생을 죽이고,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왕후 마저 덕수궁 석어당에 감금하는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극단적인 패륜을 저지른 것이 화가 되어 결국은 인조 반정을 불러오게 되고, 광해군은 왕좌에서 끌려 내려오게 됩니다.
▼ 영창대군의 부모는 조선 14대 선조와 인목왕후의 소생입니다. 선조는 후궁을 많이 두어 왕자, 왕녀들이 많았지만, 정작 정비인 의인왕후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계비 인목왕후에서 적자 영창대군만 있었습니다. 적자인 영창대군이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미 세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태어났으니 광해군 자신은 서자이고 영창대군은 적자이니, 엄청 신경이 쓰였을 것이고, 광해군은 나이는 어리지만 정통성을 가진 영창대군이 무서웠을 것입니다. 결국은 컴플랙스 때문에 이복동생을 죽이고 말았고, 조선의 망나니 정원군(김포 장릉)의 아들 인, 왕자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무능한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은 임진왜란에 이어서 또다시 전쟁에 휘말려 나라를 망가트립니다.
선조 39년(1606년)에 태어난 왕자가 둘이 있었는데, 영창대군과 온빈한씨의 온성군입니다. 과거 현재의 태실비가 영창대군의 태비인지, 온성군의 태비인지 알 수없다가 영창대군의 태지석이 발견되어 현재 가평의 태봉리의 태실비가 영창대군의 태실비로 확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 영창대군의 묘는 안성에 있습니다만, 원래는 성남에 있었는데, 도시개발 때문에 안성으로 이전하였습니다
▼ 태실비는 일반 비와는 다르게 비와 머릿돌이 일체형으로 화려함이 없으며, 꼭대기에는 부처님 육계처럼 봉이 달려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비두(碑頭)라고 합니다.
▼ 영창대군 태실비의 앞면에는 마멸이 심해서 명?(明.. )까지만 알 수 있고, 뒷면은 만력삼십사년칠월이십팔일입(萬曆三十四 年七月二十八日立)이 명확하게 판독이 되므로 1606년(선조 39년) 7월 28일에 태실비를 세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선조 39년에 태어난 왕자가 둘이 있었는데, 이해에 태어난 선조의 왕자는 영창대군과 영성군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왕자의 태실비인지 알 수없다가 중앙박물관에서 영창대군의 태지석이 발견되어 현재의 태실비가 영창대군의 태실비로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태지석의 명문에는 만력 34년인 1606년(선조 39) 3월 5일에 출생하였고, 장태 일자가 태실비의 후면에 새겨진 만력삼십사년칠월이십팔일립(萬曆三十四年七月二十八日立)이라는 날자와 일치해서 현재 태봉리의 태실비가 영창대군의 태실비로 확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 조선의 태비는 모양이 비슷합니다.
▼ 자료사진으로 보는 태실입니다. 일반묘처럼 봉분이 있고 태비가 있습니다.
▼ 자료 그림으로 보는 태실이며. 아기비가 태실비(태비)입니다.
▼ 영창대군 태실비는 월사 이정구 선생 묘역 앞의 연안이씨열녀문 앞에서 바라보면 길이 갈라지는 곳에 태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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