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군의 남방한계선 가까이에는 신라의 56대 왕이었던 경순왕의 무덤이 있습니다만. 특별한 묘호(廟號)는 없습니다.  경순왕릉의 뒤가 남방한계선이 때문에 2005년 이전에는 군부대의 허락이 있어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유롭게 가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연천 고랑포구역사관에서 500여 미터 정도 더 올라가야 합니다

 

▼ 경순왕릉 입구 못미쳐 넓은 터의 제단이 보이는데, 신라 경순왕의 아들(4남)인 대안군과 7대손인 태사공의 제사를 올리는 영단입니다. 보통은 사당을 만들고,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넓은 땅에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왼쪽이 대안군(김은열)의 비이며, 오른쪽이 태사공(김인관)의 비입니다.

 
 

▼ 안내문에 보면 이 영단의 주인이 누군지 아주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경순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혼인했던 정비 죽방왕후(3남,1녀)와 고려에 항복 후에 왕건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왕건의 첫째 딸, 효목왕후)와 혼인하여 5남 2녀를 두었는데, 다른 자료를 참조해 보면 두 번째 계비도 왕건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소생의 기록은 안 보입니다.  세 번째 부인은 별빈안씨(순흥안씨)이고, 아들(덕지) 하나를 두었습니다

 

대안군(김은열)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서, 왕건의 딸인 효목광후의 첫째 아들이며, 태사공(김인관)은 경순왕의 7세 손이 됩니다. 

 

▼ 영단의 모습입니다. 대안군과 태사공의 부인들도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 경순왕릉의 입구의 모습입니다. 입구에서 들어가는 길옆은 지뢰지대이며, 곧 남방한계선의 근처로 봐도 무방합니다

 

▼ 신라경순왕릉의 위치를 표시한 관광지도의 일부 입니다. 남방한계선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 안내문에는 경순왕 생의 내력과 경순왕비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 영조이후 임진왜란과 한국전쟁등을 거치면서, 경순왕릉의 존재는 잊혀졌다가, 민간인 통제구역때 이 지역의 한 장교가 무덤의 능표를 보고 상부에 보고하였으며, 군부에서는 경순왕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고 합니다. 

경순왕릉의 존재를 학인한 그 장교는 역사적 감각이 꽤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 경순왕릉은 영조23년에 다시 찾게 되었으며, 이때 무덤을 조선의 능제 맞게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 릉의 앞에서 전체적인 모습을 보겠습니다. 오른쪽에 재실(수복실?)과, 경순왕비각, 그리고 왼쪽에 릉이 있습니다.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릉으로, 조선시대의 릉에 비하면, 마치 조선왕의 왕자들의 원(園)정도를 보는 듯합니다.

 

▼ 릉의 전면입니다. 능상을 보면 봉분은 크게 하고 봉분 아래에는 호석을 둘렀으며, 곡장은 낮게 둘렀습니다.  좌, 우로는 석양, 망주석을 세웠으며 능상 가운데는 혼유석, 능표석, 장명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 [문화재청자료] 경순왕릉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 능표는 총탄자국이 남아 있지만, 신라 경순왕릉의 글자는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 능표는 영조 23년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이 지역의 한 장교가 이 능표를 보고 경순왕릉의 존재를 상부에 보고하였고, 육군의 연락에 경순왕 후손들도 그때서야 릉의 위치를 알았다고 합니다.

 

▼ 비각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신도비는 고랑포 국민학교 뒤편 정원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문화재위원들이 1981년에 방문하여 비문을 판독한 결과 비문의 마모가 너무 심했지만, 여섯 글자는 확실하게 판독이 되었는데, 순, 응, 문, 수, 게, 성자를 판독했으며, 순자 앞에 글자가 경자와 비슷한 것으로 보여서 경순왕의 비로 거의 확증이 되었다고 합니다.

 

▼ 비각안의 전면, 후면, 측면을 보면, 글자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신라왕들의 무덤은 거의 경주에 있지만 경순왕만 개성(개경)에 가까운 연천에 묻혀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고려의 왕건과 싸우다 무참하게 패배하는것 보다는 신라의 백성과 문물들을 보존하면서 실리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내주고 본인도 90넘게 장수하였으며, 그나마 고려조정으로 부터 경순왕이라는 시호까지 받았으니 처신을 잘한 왕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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