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의 가야산(옥양봉-석문봉-가야봉)을 한바퀴 돌고 나서 조선 말 야심가였던 흥선대원군의 야망이 묻힌 곳이라는 남연군 묘를 둘러 보았습니다. 1822년에 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알려 달라고 했는데,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고. 흥선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가야산에 지관이 가리키는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게다가 명당이라는 바로 그 자리에는 금탑이 우뚝 서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가야사에 불을 지르고 기어코 아버지 남연군의 유골을 금탑이 있었던 자리에 이장 하였습니다.
이장을 마친후 7년후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고종이었으며, 고종34(189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고, 대를 이어서 순종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망해가는 조선의 2대 황제의 결말은 너무 참담하여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맥이 끊기고, 남연군 묘는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이 파헤친 바 되었으니 과연 그런 수난을 당하고 2대 천자지의 결말이 그렇게 난 자리가 결과적으로 명당은 아닐것이라고 생각되며, 현재의 남연군의 묘자리가 명당자리라고는 하지만, 이대천자가 나오는 자리다라는 말은 아마도 순종 후대에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지도 모릅니다.
▼ 덕산면의 가야산 들머리에 있는 남연군 묘는 옥양봉, 석문봉, 가야봉의 기운이 한곳에 모이는 형상입니다
▼ 가야산의 들머리에 보이는 곳에 비가 하나 보이는데, 남연군 비 입니다.
▼ 비문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고종이 즉위후에 흥선군이 세운 비라고 하니 아마도 남연군의 일대기를 적어 놓은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여기서 영의정 조두순에 간략하게 알고 가면, 조두순은 고종이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으며, 흥선 대원군이 실권을 잡자 영의정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흥선 대원군의 복고적 개혁 정치의 일환인 경복궁 중건, 삼군부 설치, 대전회통 편찬 등을 담당하였으며, 1866년 은퇴하고 기로소(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에 들어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희대의 악마였던 고부 군수 조병갑이 그의 조카입니다.
▼ 남연군의 묘는 삼거리에서 왼쪽입니다.
▼ 여기서 남연군의 가계도를 알아 보겠습니다. 남연군은 원래 인평군의 6대손이었으나, 은신군(이진)이 재물갈취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풍토병으로 죽임을 당하자 제사봉손을 이유로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습니다. 조선시대때는 강력한 유교사상으로 인하여, 제사에 각별한 원칙을 적용하면서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기게 되면 형제나 조카등의 자손이 풍성한 자식중에서 장남을 제외한 아들중 하나를 제사봉손으로 입적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으며, 왕족은 물론, 일반 양반가, 중인들이 공히 유교 사상을 따랐습니다
▼ 남연군의 묘 앞에는 유구가 모아져 있는데, 가야사의 유구입니다. 뒤로는 옥양봉이 보이는데, 남연군의 묘자리는 석문봉의 능선과 이어져 있습니다.
▼ 2012년 부터 2014년 까지 남연군 묘 주위를 발굴 조사하여 가야사 터를 조사,확인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 남연군 묘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 남연군의 묘비입니다. 그런데, 남연군의 부인이 여흥민씨라는데, 그러면 4대가 여흥민씨였습니다. 남연군 부인도 여흥민씨, 흥선군의 부인도 여흥민씨, 고조의 비인 명성황후도 여흥민씨, 순종의 비 순명황후도 여흥민씨였습니다.
▼ 남연군의 묘표가 땅속에 많이 잠겼습니다
▼ 묘 앞에서 보는 남연군의 묘입니다. 어느 정도는 왕족의 묘제를 따라서 석양, 장명등, 망주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 묘 앞에 땅속에 묻힌 암석이 보이는데, 풍수지리 해석으로는 혈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암석이 두개가 보이는데, 각 암석은 황제를 나타내는 혈(穴)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 두명의 왕(황제)이 나올 명당이라는 남연군의 묘자리입니다. 풍수지리를 밑는 것 은 아니지만, 명당이라는 자리가 조선의 멸망을 바라봐야 했던 자리였단 말인가?...
▼ 묘 뒤에서 바라보는 남연군의 묘입니다. 앞이 트인 것이 좋게는 보이지만, 산자가 살 곳 이나, 죽은자가 묻힐 곳 이나 보는 눈은 비숫한것 같습니다. 앞이 시원하게 보입니다.
▼ 묘 주위에는 호석(묘를 둘러 싸는 돌)를 둘렀는데, 일반 왕족에게는 드물게 호석을 둘렀습니다.
▼ 상석을 고이는 고석에도 귀면 문양을 새겻습니다.
▼ 남연군 묘비인데, 앞면은 묘 아래의 묘비와 동일한데, 뒷면은 다른 글씨입니다
▼ 조선시대때의 왕족의 묘제는 대부분 이런 모양으로 꾸몄을것으로 보이는데, 남연군의 묘는 석물의 문양이 특별하게 화려해 보입니다
▼ 망주석을 자세하게 보면 다람쥐 같은 동물이 땅쪽으로 내려 오는 모습이 보이는데 보통 세호(細虎)라고 하는데, 호랑이를 세밀하게 조각한 모양 입니다만 전혀 호랑이 같지는 않습니다.
왕릉에는 좌,우에 하나씩 망주석에 세호를 조각 하는데, 보통 왼쪽은 하늘로, 오른쪽은 땅으로 향하여 있습니다. 하지만 왕도 아닌 왕족의 묘에 세호를 조각한 망주석을 세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문양도 보통 왕릉의 망주석 문양 보다도 훨씬 화려 합니다
▼ 장명등의 조각도 무척 화려 합니다. 보통 왕릉의 장면등의 문양과 비교 하면 너무 화려 합니다
▼ 상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도 왕족의 묘(원)흉내를 냈습니다
▼ 고석의 귀면 문양입니다.
▼ 남연군의 묘 옆에는 상여각이 있습니다. 내용을 잘 읽어 보면 흥선군이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 할 때 쓰던 상여를 보관 한 각이라고 합니다.
▼ 상여각입니다
▼ 상여각은 마침 역광이 심해서 참고 사진을 인용하였습니다
▼ 상여각 내부는 들어가서 볼 수가 없어서 창문밖에서 촬영하였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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