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오피아참전기념탑

6.25전쟁(한국전쟁)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전투병력을 파병해 준 고마운 나라의 참전기념비가 춘천의 공지천옆 조각공원에 있어서 찾아보았습니다.

 

이 나라는 이디오피아(Ethiopia)이며, 1차 1200명 수준의 1개 보병대대를 시작으로, 1965년에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5차례에 걸쳐 연 인원 6.037명이 파견되어 전사자 121명, 부상자 536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 파병인원수에 대해서는 3000명 또는 6000명이라는 자료가 있는데, 아마 파병기간에 대한 계산의 차이로 인원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카그뉴대대의 3,158명은 1951년 6월부터 1954년 4월까지의 제3진 파병인원이며, 제4진, 제5진 및 1965년까지 파병된 인원까지 누적으로 포함하면, 총 6,037명이 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 높이 15m로 기다란 기둥모양을 하고 있는 기념비는 카그뉴(Kagnew) 대대의 위상을 표현하는 것이며, 1968년 5월 19일 이디오피아의 황제 "하이레 세라세 1세"가 직접 제막식에 참석하였습니다.


▼ 아프리카에서 지상전투병력을 파병해 준 나라는 이디오피아뿐이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공군을 파병하였습니다. 

 

이디오피아 카그뉴(Kagnew)대대는 253번의 전투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무패신화를 썼던 전투부대였지만, 포로는 단 1명도 없는 6.25전쟁중 파병된 국가중에서 으뜸전투부대였습니다.

 

카그뉴(Kagnew)대대는 1951년 4월 13일에 지부티항을 떠나 극동의 한국 부산을 향해서 24일간의 머나먼 항해를 하였으며, 5월 6일에 부산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디오피아군은 6·25 전쟁 기간 동안 3개 대대가 1년씩 교대하며 참전했는데, 날자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 제1 카그뉴 대대 : 1952년 3월

- 제2 카그뉴 대대 : 1953년 4월

- 제3 카그뉴 대대 : 1953년 7월(정전협정 때까지)

- 제4진,제5진의 대대는 1965년 까지

 

▼ [자료:위키백과] 이디오피아의 국기가 두 종류가 있는데, 왼쪽은 1897-1974 까지 사용항 국기이며, 오른쪽은 975년 부터 사용한 국기로 보입니다.

 

▼ 춘천의 이디오피아 참전기념비와 똑같은 기념비가 이디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도 있으며, 국내의 헌금과 현지교민들의 도움으로, 2016년 5월 박근혜전대통령이 참석하여 한국전 참전기념비의 제막식을 거행하였습니다.

 

※ 왼쪽이 아디스아바바의 참전기념탑이며, 오른쪽이 춘천의 이디오피아 참전기념비입니다.

 

▼ 이디오피아를 표기하는 문자중에 가운데 글자는 이디오피아 "암하라어"라고 합니다

 

▼ 이디오피아 정부는 1950년 8월에 한국전쟁에 파병을 미국에 통보하고, 한국과 지형이 유사한 아디스아바바 근처에서 영국군 교관에게 훈련을 받았으며, 1951년 4월 12일에는 아디스아바바의 잔메다 광장에서 1개 보병대대(1200명 수준)를 아일레 세라세 황제가 직접 부대를 사열하고, 초전박살,  궤멸시킨다는 뜻의  ‘카그뉴(Kagnew)’대대라는 명칭을 부여하였습니다.

 

▼ 1951년 4월 13일, 지부티를 떠나는 배에서 1차 카그뉴대대 병사들

 

▼ 이디오피아의 참전군인에게 수여한 참전훈장이며, 아쉽게도 이들은 공산주의 쿠데타세력들에 의해서 한국에 파병되었던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았다니, 참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 1951년 4월 13일 지부트항에서 미군함정 J.H. McRae호를 타고 출발하여 24일간 항해 끝에 1951.5.6 부산도착한 카그뉴 제1 카그뉴대대가 미군의 군악대의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General J.H. McRae호는 원래 미해군의 함정이었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이디오피아, 벨기에, 그리스, 네덜란드의 파병군을 부산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 General J.H. McRae호에서 하선하는 카그뉴대대

 

▼ 행진 중인 카그뉴대대 병사들

 

▼ 카그뉴대대는 1951년 5월 7일부터 8주간의 미군무기에 대한 적응 훈련을 받고 7월 11일에 미 제7사단 32연대 예하 대대로 배정받고, 가평에 배치되었습니다.

 

- 105mm 견인곡사포(M2A1)에 대한 조작훈련 중인 카그뉴대대

 

▼ 1952년 6월, 카그뉴 대대의 60mm 박격포 팀은 중국군에 대한 공격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입혔습니다. 6.25 전쟁 중에 60mm 박격포는 가벼워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잽싸개 쏘고, 도망치는 바람에 매우 효과적인 무기였습니다.

 

▼ 미 제7보병사단 32연대에 배속하여 빛나는 전투를 치른 이디오피아 카그뉴대대인데, 아마도 정비시간인듯 합니다

에티오피아 "카그뉴"(Kagnew) 대대는 미국 제7사단과 함께 전투를 벌여, 중공군에게 야러번 치명타를 입힌 공을 인정받아 

한국과 미국 양쪽으로부터 표창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 1951년 발행된 UN군중에서 이디오파아 참전기념우표입니다.

 

▼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1968년 5월 19일 방한해서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하기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 1968년 5월 18일 춘천의 이디오피아 참전기념비의 제막식에서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황제"이며, 이디오피아는 1936년 이탈리아로부터 침략을 당하게 되자 하일레 세라시에 황제는 영국에 망명하였으며, 이후 무장투쟁과 영국의 도움으로 1941년 독립하였고, 1963년에 한국과 공식 수교하였습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1974년 공산주의자 "멩기투스"의 쿠데타로 실각하였고, 그 이듬해 암살당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대부분의 국가들을 보면, 국가의 경제가 무너지고, 내전이 일어나는 등의 극심한 혼란으로 국민들의 삶은 망가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디오피아도 한때는 나름대로 부유한 나라였지만, 정치의 혼란기에 공산주의에 빠져서 결국은 내전을 겪게 되었습니다

 

▼ 1968년 5월 18일 방한기념으로 기념우표가 발행되었습니다

 

▼ 참전기념비문에는 한글, 이디오피아 "암하라어", 영어로 각각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 전쟁 중에 이디오피아군의 Korean Boy들이며, 대부분의 부대에서는 어린 고아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잡일을 하도록 하였는데, 그나마 부대 내의 고아들은 외국 군인들의 보살핌을 받아서 먹고, 자는 것에 대한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1953년에 동두천에 전쟁고아들을 위한 "보화원"을 만들었던 이디오피아 카그뉴대대 장병들입니다

 

▼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얼굴의 이 사람은 아베베 비킬라입니다. 아베베는 카그뉴대대(제2진)를 따라서 전쟁에 참전하였는데, 그 당시 19세로서 이리다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자는 못하였고 대대장의 연락병 또는 경호병으로 근무를 하였다고 하며, 1960년 로마올림픽, 1964년 도쿄올림픽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 1960년 로마올림픽(좌측), 1964년 도쿄올림 때(우측) 아베베이며, 연속으로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였습니다.

 

▼ 적근산 전투는 미7사단 32연대의 에티오피아대대가 적근산 동쪽에 주저항선(캔자스 라인)을 방어하고 있던 중 1951년 8월 12일부터 9월 22일까지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200사단의 전초기지인 700고지와 602고지를 공격하여 2차에 걸친 격전 끝에 고지를 점령한 전투입니다.

 

- 적근산지구전적비는 1983년 10월 27일에 건립하였습니다.

 

▼ 카그뉴대대의 주요 전투이력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51년 7.11 : 가평으로 이동

- 1951년 8월 ~ 9월 : 적근산전투

- 1952년 10월 : 김화고지전투

- 1953년 5월 :  요크, 엉클고지전투(춘천중동부일대)

- 1965년까지 순차적으로 철수

 

▼ 가평의 카그뉴대대 주둔지입니다

 

▼ 카그뉴대대의 브라우닝 M1919A4로 무장한 방어진지에서의 모습

 

▼ 카그뉴대대의 무반동총(57mm) 팀

 

▼ 다음 무반동총(57mm)팀의 사진은 한국전에 두 차례 참전해 2017년 8월 '이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에티오피아 구르무 담보바 이병(왼쪽)이며, 그는 31살의 나이로 1951년 참전해 강원도 화천과 철원 일대에서 무공을 세웠으나, 전투 중 허벅지와 엉덩이에 관통상을 입어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 다시 참전했는데,  당시 카그뉴대대에는 담보바만큼 무반동총을 잘 다루는 병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 카그뉴대대 병사들이 M18 57mm 무반통총을 잘 다루었나 봅니다

 

▼ 1952년 1월, 카그뉴대대의 병사들이 양구의 펀치볼 전투중에 얼어 붙은 땅에 참호를 파고 있습니다. 

 

▼ 1953년 5월 요크고지(연천)에서 참호를 파고 있는 카그뉴 제3대대 병사들,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고지를 사수하였으며, 휴전이 될 때까지 고지를 사수하였습니다

 

▼ 카그뉴대대의 지휘관들로 보입니다.

 

▼ 카그뉴대대의 병사들이 정보교욱을 받고 있습니다.

 

▼ 카그뉴대대 병사들의 전투실력이 좋아서 그런지 미군, 한국군등이 수시로 부대를 방문해서 훈창등을 수여하였습니다

 

▼ 1953.7.27, 카그뉴대대를 방문한 이승만전대통령

 

▼ 카그뉴대대의 장교와 사병이며, 장교는 M2카빈을 들고 있습니다.

 

▼ 카그뉴 대대는 1953년 7월 정전 이후에 가평에서 동두천의 미군기지(캠프 케이시)로 철수하여 휴식을 갖고 있습니다.

 

1954년 4월, 카그뉴 제3대대는 교대로 철수했고 휴전을 감시하기 위해 1956년까지 소규모 보병부대를 계속 한국에 보냈으며, 휴전 감시단의 임무를 마친 이디오피아 대표는 1965년 1월 3일에 한국을 떠났습니다.

이디오피의 카그뉴 대대는 정전이전까지 총 3,518명이 참전을 하였으며, 121명의 전사와 53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포로가 단 1명도 없는 카그뉴대대는 그렇게 미7사단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 미7사단장 스위치장군이 카그뉴대대의 장병들과 이디오피아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습니다

 

▼ 1952년 5월 5일 가평에 있는 카그뉴 대대의 교목이며, 아마도 이디오피아 정교의 목사님인 듯합니다

 

▼ 아마도 정전 이후에 미군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카그뉴대대의 병사들로 보입니다.

 

▼ 6.25 전쟁에 참전했던 장병들이 아직도 수십 명은 살아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과 같이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분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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