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의 작은 마을 지평리에 있는 지평의병과, 6.25 전쟁 때 지평리에서 벌어진 중공군과의 방어전투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관을 방문하였습니다.

 

※ 양평군은 1908년 양근군(楊根郡)과 지평군(砥平郡)을 합하여 양평군(楊平郡)이 되었습니다.

※ 인용된 사진자료는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홈페이지와 경기도. LIFE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지평은 일제의 민비(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 후 지평 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명이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곳이며,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에는 지평리 일대에서 미2사단 23연대가 배속된 프랑스 대대와 함께 3박 4일(1951.2.13~2.16)일 동안 중공군 39군 3개 사단 5만여 명의 집중 공격을 막아낸 역사적인 전투가 있었던 지역입니다.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9년 3월 1일에 개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지평의병은 이방인에 의해서 사진으로 기록되고, 책으로 발간되면서 기록으로 그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종군기자로 조선을 방문한 맥켄지에 의해 발간된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맥켄지는 지평의병을 만나서 사진을 찍고, 의병장을 만나서 일본을 이길 수 있나? 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의병장은 "일본의 노예가 되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게 낫다"라는 말과 일본군의 잔악한 민간인 살해장면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 우리가 많이 보았던 의병사진은 맥켄지가 남겨놓은 지평의병의 사진이었습니다. 우리는 집요하고 잔인한 민족인 일본인에 대하여 항상 조심해야 하며, 언제든지 우리의 영토, 민족을 호시탐탐 노리는 놈들이 일본인들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뭐...이땅을 노리는 놈들은 뙈놈, 왜놈, 김씨왕조놈, 놈놈놈들이 많이 있기는 합니다.

 

▼ 기념관 앞에 놓여져 있는 Tank는 M48A3K라는 모델로 기본은 미군의  M48A1입니다. 포는 90mm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M48A1전차는 1952년 부터 양산을 해서 유럽등에 공급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변형된 모델이 많이 있으며, 물론 우리나라 해병대에서도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된 M48A3K모델을 최근까지 운용하였습니다. 다만 M48A3K 보다는 지평리전투때의 M46전차나, M4셔면 전차가 전시되었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 참고로 6.25전쟁때6.25 전쟁 때 미군의 전차를 보겠습니다. 6.25 전쟁 때의 북한군의 T34탱크나, 미군의 탱크들의 자료는 많습니다.

 

▼ 셔면전차가 지평리에 마을에서 주둔하고 있는 중에 마을의 노부부가 어린 손자를 업고 탱크 옆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70년이나 지난 사진이지만, 참 마음이 아픕니다.(LIFE지 기자가 찍었습니다).

양평지역도 극좌익에 의한 무차별 인민재판에 의한 희생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저 노부부의 아들도 혹시 극좌파들에 의해 살해 당한것은 아닌지, 그래도 어린 손주는 핏줄이니 본능에 의한 내리사랑을 보여 줍니다.

 

▼ 전쟁중에 저 노인은 순한 눈을 가진 암소와  망아지를 끌로 어디로 가시는지...  아마도 중공군이 지평리를 떠난 후인 듯이 보입니다.

 

▼ 기념관 옆의 언덕에는 지평리전투와 관계된 국가와 부대 이름이 새겨진 충혼비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모두 지평리 전투에 대한 전승 충혼비들입니다.

 

▼ 우선 지평전투가 벌어진 지평리를 지도를 보면 중앙선이 지평리를 가로질러가고, 거의 낮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마을입니다. 미군 2사단 23 연대는 이 좁고 낮은 지역에 똬리를 틀고 중공군을 불러들입니다.

중공군 역시 미군이 연대 병력만으로 지역방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군단급 병력으로 가볍게 쌈 싸 먹으려고 사방에서 달려들었습니다. 지평주조는 미 23 연대 지휘소였습니다

 

 

▼ 자료를 보면 미군 23 연대와 중공군의 병력의 차이가 거의 10배나 차이가 나는 어마 무시한 병력의 차이였습니다만, 뭐... 전사자는 100배나 차이가 날 정도로 가성비(?)가 뛰어난 전투였습니다

 

▼ 지평역에 있는 지평리 전투의 개념도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 중공군 50,000명이 달려들었습니다. 지평역 근처는 프랑스 대대 방어지역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여기서 벌떼 작전으로 대들었지만 2박 3일 동안 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꽁지 빠지게 도망길로 내 달렸습니다. 아니,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이거 너무 한 거 아닌가? 촌 농네에 50,000명이라니...그래도 중공군 사령관 팽덕화는 지평리를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 지평리 전투가 벌어지기 전의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이 횡성의 삼마치고개 일대에서 한국군 3군단(유재흥 소장,현리전투 패배로 부대 해체)을 박살내고 지평리 방향으로 거침없이 밀려오고 있었는데, 지평리에 도착한 미 2사단 23 연대 프리만 대령은 중공군에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여주로 철수를 건의하였으나, 묵살되고 대신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접수하게 됩니다

 

이에 미23 연대(프리먼 대령)는 시간도 없고, 방어지역이 너무 넓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지평리의 낮은 언덕이나, 논두렁을 이용한 약 1.6km의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을 기다리게 됩니다. 물론 23연대 뒤에는 강력한 포병과 항공지원 등의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 눈 내린 벌판의 논두렁에서 무반동포를 방렬하고 경계 중인 23 연대 병사들, 주변을 보면 민가 근처의 낮은 지역입니다

 

▼ 155mm 야포로 지원사격 준비 중입니다. 제식명칭은 M1 155 mm Howitzer(전쟁후에 M114로 변경) 이 곡사포는 최대사거리는 19Km정도이며, 운용인원은 7~8명, 포탄은 40Kg이상으로 성능은 끝내주는데, 단점은 무게가 약5톤 이상이고, 포를 방렬할때 포다리를 벌리는 일은 거의 쌩 노가다이기 때문에 군대에서 155mm포대로 배속되면 그냥 3년동안 죽었다고 생각하면 됨. 제대할때는 거의 허리잡고 전역함. ㅋ.ㅋ

 

- 미 2사단 23 연대의 구성을 보면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 포병은 미37포병대대, 82방공포대대( B포대), 503포병대대(B포대)등으로 편성된 연대전투단이 방어부대를 편성하고 있었습니다.

 

- 중공군은 39군 예하 25,,000명~50,000명 추정(자료마다 틀림) 

 

- 1951년 2월 13일, 중공군이 지평리 전방에서 대규모로 집결 중이라는 정보가 확인되었고, 어둠이 깔리면서 중공군의 신호탄이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지평리는 완전히 포위되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깔리면서 중공군은 박격포로 준비 사격을 시작하면서, 나팔, 호각, 꽹과리. 북소리와 함께 떼를 지어 몰려들었고 23 연대 장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중공군을 격퇴하였으며, 이른 아침에 중공군이 후퇴한 후 확인한  중공군의 시체는 산을 이 룰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 중공군은 포탄 보따리를 나무에 매달아서 어깨에 지고 운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박격포탄인 듯싶습니다

 

 

프랑스 대대는 기막힌 생각으로 이번 전투에서 중공군을 혼란에 빠트렸는데, 중공군은 중앙공격, 우회공격, 후퇴등의 신호를 나팔소리로 전달 하였는데, 나팔소리가 나면 프랑스대대는 갑자기 사이렌 소리로 나팔소리를 압도해 버리는 바람에 중공군은 나팔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갈팡질팡 했다고 합니다. 이때를 이용해서 집중 사격과 백병전으로 중공군을 물리쳤습니다. 붉은점선이 수동식사이렌입니다

 

▼ 화력지원중인 155mm야포. 고폭탄의 살상반경은 50미터 정도라고 합니다

 

 

한편 이날 밤 전투에서 23 연대장 프리만 대령은 지휘소에 날아든 박격포탄에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헬기로 탈출해서 치료받도록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붕대를 감은 절름발이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 1951년 2월 14일(23연대),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던 유엔군은 낮에 수송기 편대를 이용하여 수십 톤의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을 공수하였으며,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갑자기 헬기로 연대 지휘소(지평주조장) 부근 헬기장으로 날와왔습니다. 오는도중에 중공군의 저격으로 헬기가 명중되었으나 다행히 치명적이지 않았으며, 헬기에서 내린 리지웨이는 가슴에 수류탄을 매달고 23연대 장병들을 격려하였습니다. 리지웨이의 트레이드 마크는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아니 별 세 개가 사병처럼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다니다니... 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야전군인 그 자체였습니다.

 

2월 14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지평리에는 중공군의 피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전날 2개 사단의 공격이 실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새로이 3개 사단과 3개연대규모를 추가하여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중공군은 넘쳐나는 인간이란 무기로 물밀듯이 몰려들었지만, 23연대의 지원포격과 박격포세례에 죽고, 참호근처에 도착한 중공군은 지뢰에 죽고, 철조망앞에서는 기관총에 무수히 죽어 나갔습니다. 뭐~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하니 상상이 안됩니다. 아래 사진은 연출된 듯합니다.

 

▼ 포병의 관측팀들이 포탄의 낙하지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1951년 2월 14일(크롬베즈특임대) 리지웨이 UN군사령관은 미 9군단에 지평리의 23연대와 연결작전을 명령하였고, 미 9군단장(무어소장)은 여주에 군단 예비부대로 주둔시켰던 미 1기병사단 5기병연대를 중심으로 연대장인 크롬베즈 대령의 이름을 따 "TF크롬베즈" 로 명명된 미2사단 23연대 구출부대를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TF크롬베즈"는  5기병연대 예하 3개 보병대대와 6전차대대 D중대와 70전차대대 A중대 2개소대, 의무 1개소대, 전투공병 1개중대, 자주포 2개포대등으로 구출부대를 구성하였으나, 기동성이 생명인 특수부대의 특성상 다시 전차부대 위주로 TF를 구성하고 2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여주를 출발하여 지평리로 진격하게 됩니다.

 

선두에는 6전차대대의 M46 패튼전차, 뒤에는 70전차대대의 M4A3 셔먼탱크가 뒤따랐으며, 항공부대는 진격로 주변에 있던 중국군들은 사전에  대부분 제압하면서  "크롬베즈 특임대"는 빠르게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 1951년 2월 15일.15시가 지난 시간, 크롬베즈 특임대가 곡수리 (양평군 지평면)에 도착했을때 중국군이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먼저 공격을 해오자, 전차위에 타고 있던 보병들은 일제히 하차하여 교전에 돌입하였고, 전차가 지원사격을 하려하였으나, 크롬베즈 대령은 진격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전차들을 먼저 출발시켜버렸습니다. 이때 보병들이 중공군에게 사살당하거나 포로가 가 되었습니다

 

▼ 지평리에 도착하여 중공군을 쓸어버리고 휴식중인 크롬베즈특임대 M46패튼전차부대, 호랑이 도색을 했습니다

 

▼ 크롬베즈 대령은 전차에 보병을 탑승시켜 중공군 지역을 돌파하려 하였지만, 중공군의 집중사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보병은 결국은 무수한 희생만 내고 대부분 사살, 포로가 되었습니다.

보병을 탱크에 태우는것은 적과의 교전이 없는 이동중에나 가능한것이지 , 집중사격을 받는것을 알면서도 탱크에 보병을 태우는 무식한 크롬베즈대령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크롬베즈 특임대가 지평면 곡수리를 지나 다시 중국군을 만나 교전에 돌입하자 보병들이 타기 전에 또 전차가 출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차위에 탑승한 보병은 중공군의 집중적인 포화에 떨어져 나갔고 중공군은 폭약을 들고 필사적으로 기어들어오고 있었고  처음 출발한 보병 165명중 약 70여명 정도만 타고 있었습니다

돌격중에 2대의 전차가 중공군의 로켓공격으로 파괴되었지만, 크롬베즈 대령은 전차의 승무원이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전차를 도로밖으로 밀어내고 후속전차가 멈추지 않도록 전속력을 유지하면서 돌진 하게 하였습니다.

 

한편 지평리에서는 2일간의 전투로 초죽음이 된 23연대 장병들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지만, 진지를 보수하고 15일 밤에 또 다시 덤벼들 중공군과의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프리먼 대령은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후송되어 23연대는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 미 2군단장 무어 소장

 

이때 여주에서 쉼없이 20시간을 달려 오후에 지평리에 도착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중공군의 지휘소와 탄약고등 전투지원시설을 잇따라 파괴하고 파죽지세로 돌진하면서 중공군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있었습니다.

 

▼ 전투후 정찰을 하는 미23연대 병사들

 

▼ 정찰기에서 보는 지평리 전투현장

 

▼ 농로에 기대어 만든 임시 천막

 

▼ 급하게 만들어진 참호속에서 전투를 치른후에 휴식중인 병사들

 

▼ 지평리에 들어온 크롬베즈 특임부대 기갑차량

 

 

▼ 중공군은 크롬베즈 특임부대의 기세에 눌려 도망치기 시작하였으며, 미군과 프랑스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마치 사냥하듯 중공군을 쓸어버렸습니다.

전투가 끝난후 알몬드중장이 프랑스대대 전투지역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 참호앞에서 사살당한 중공군의 시체는 UN군의 야전삽이나, 철모와 뒤엉켜 딩굴고 있는데, 중공군은 철수할때 시신을 어느정도 거두어 간것으로 보입니다. 참혹한 사진이 많이 있으나, 카카오에서 혐오게시물이라고 블로그를 정지 시킬까봐서 1장만 보겠습니다

 

소총사거리를 벗어나 도망치는 중공군은 박격포와 야포의 불방방이를 맏으면서 무수히 쓰러져갔고 중공군의 2월 공세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중공공군은 그들이 자랑하는 인간무기로 돌격 앞으로만 외치다가 5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면서 지평리는 온전히 보전하게 되고,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수복하면서 북진을 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 살아서 포로가 된 중공군들

 

 

▼ 미23연대의 부상병을 들것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롬베즈 특임부대는 여주를 출발할 때 전차위에 보병 1개중대 165명을 탑승시켰으나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23명이고 나머지 142명의 장병이 전사하거나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크롬베즈 대령은 지평리에서 작전을 성공시키려 무리한 돌격을 명령하여 무수히 많은 보병을 잃은 잘못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진급을 위해서 전차에 올라탄 보병들의 죽음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들으면서 훈장을 받았고, 1953년 준장으로 전역하였습니다.

 

※ 지평리전투를 보면 프랑스대대의 뛰어난 전투실력이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프랑스대대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 프랑스는 미국의 파병요청에도 뜸을 들이다가, 1950년 8월 25일에 대대급의 전투병력(겨우 1개 대대?)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현역병과 예비역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9월 18일에 대대편성을 마치었으며, 병력은 약 400명이었습니다

 

1중대는 주로 해병대 출신으로, 2 중대는 파리 경비대 출신,  3중대가 공수부대와 외인부대 출신으로 편성되었으며, 1950년 10월 25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출항하여 11월 29일 부산에 도착했고, 약 2주간에 걸쳐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프랑스 대대는 미국 제2보병사단 예하 23연대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여기서 프랑스대대의 돌+i 지휘관이 짠 하고 나타납니다. 바로 몽끌레루 장군입니다

겨우 1개 대대 전투병만 파병하는데, 별 세개(중장)가 전쟁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별을 떼 버리고 중령으로 참전한것입니다. 설마리의 영국군이나, 지평리의 프랑스군을 보면 전투의 DNA는 참 남다르구나 하는것을 느낍니다.

- 프랑스 해군은 1951년 7월 22일 동부 함대 소속 구축함 1척(La Grandiere)를 먼저 파견하였으며, 7월 29일 한국 해역에 도착해서, 미국 제7함대에 배속되었습니다.

 

▼ 한군전 참전중에 프랑스대대에는 미군의 카투사처럼 한국군에서 전출된 중대가 생겼는데, 전투지휘관은 구필대위였습니다. 구필대위는 인종차별없이 한국군인들을 통솔하여 지휘관으로서 지지를 받았으며, 단장의 능선에서 전사하였습니다

 

▼ 프랑스대대 주둔지이며, 복장으로 봤을때 여름으로 보이며, 아마도 가평에 주둔할때 인듯 합니다

 

 

▼ 프랑스대대에 배속된 한국군 병사. 프랑스군과 똑같이 대우받고, 프랑스군과 똑같이 치열한 전투에 참여 하였습니다

 

 

▼ 프랑스대대 깃발에 훈장을 달아주는 리지웨이 장군

 

 

▼ 미군 알몬드중장이 프랑스대대장 몽끌레르 중령에게 훈장을 달아준 후에 악수릉 하고 있습니다, 복장은 미2사단 복장인데, 모자는 프랑스군 모자입니다

 

 

▼ 프랑스대대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알몬드중장

 

▼ 프랑스대대의 전사자들이 고향으로 가는 배에 실려지고 있습니다

 

▼ 우측에는  21세기 기념물이라는 미2사단(인디언헤드)과 UN군(미군)의 전승 충혼비가 있습니다

 

▼ 제일 위쪽에는 "지평리지구전투전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기념관 옥상에서 바라보이는 주차장과 전적비입니다. 자유는 공짜가 없으며. 피로써 지킨 땅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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