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군(터키군)의 한국전쟁 참전기념비가 마성 인터체인지에 있습니다. 6.25 전쟁(한국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튀루키예군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튀르키예를 얼마전까지만 해도 영어로 "Turkey"로 하였는데, 2022년 1월에 터키가 국가명을 튀르키예(Türkiye)로 공식 변경하면서 국가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튀르키예는 전투병력을 파병한 16개국 중의 한나라입니다

 

▼ 2차 세계대전후에 세계의 권력이 미국과 유럽의 NATO와, 소련으로 양분되고 있었는데, 튀르키예도 소련의 위협에 대비해서 NATO에 가입하려 미국 편에 서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튀르키예는 한국전쟁 참전의 댓가로 1951년 9월 NATO에 가입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NATO 회원국입니다.

 

마성 인터체인지에 있는 튀르키예군 참전기념비는 1974년도에 세워졌으나,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 튀르키예군 참전기념비 접근방법입니다. 무조건 마성톨게이트를 통과해서 용인 방면으로 진행하면 참전기념비 앞 주차장이 보입니다. 나갈 때는 용인 방향으로 나가면 됩니다.

 

▼ 튀르키예군은 UN군이 북한 공산군을 북으로 밀어내던 시기인 1950년 10월에 부산에 도착하면서 참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튀르키예군도 압록강 근처까지 갔다가 중공군에 기습에 쫒겨 후퇴를 하게 되었으나 눈부신 활약으로 튀르키예 전사들의 용맹스러운 후손을 증명하였습니다.

 

튀르키예군은 1950년 10월 19일 부산에 도착하면서 참전하여 1971년 6월 27일 최종 부대가 귀국하면서 마무리 되었는데, 파병자 수는 1개 여단의 규모이므로 약 5500명 내외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0번의 부대교체로 약 55,000여명이 파병된것으로 추산이 됩니다. 전사자 724명, 부상자 2,493명, 실종 175명, 포로 234명의 피해를 입었다는 자료가 있는데, 자료마다 차이가 심합니다.

 

▼ 튀르키예군은 여단을 파병하였는데, 1차로 파병됐던 부대는 터키 육군 제 28사단 241연대를 기간으로 하는 터키 제 1여단이며, 1950년 10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해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고, 미 제8군단에 배속돼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 튀르키예 군의 파병 당시 모습을 자료사진으로 보겠습니다.

 

▼ 한국전쟁 참전국으로 파병되는 튀르키예 병사들이 모여 있는데, 장교와 소수의 하사관등 외에는 대부분 쿠르드족의 병사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봉급도 거의 없었으며, 차별대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 제1여단 병사들이 항구로 출발하기 전, 흙을 한 주먹 담아가고 있습니다.

 

▼ 병사들이 부대에서 항구를 향해 행진하고 있습니다.

 

▼ 파병되는 남편을 배웅하러 아들과 함께 급하게 뛰어 오는 모습을 보니, 마치 현장에서 보는듯합니다

 

▼ 항구에 도착한 병사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총이 M1 TOMPSON 기관단총처럼 보이는데, 전쟁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투보병이 아닌듯합니다

 

▼ 튀르키예군의 기본 무장이던 GEW98 소총인데, 이게 1차 대전 때 개발(1898년)되었고, 2차 대전때는 독일군의 기본 소총이었는데, 이걸로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미군의 M1과 호환도 안되니 탄환 보급의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그냥 볼트액션 소총이라서 단발이었지만, 나름대로 성능도 좋고, 명중도 잘돼서 저격소총으로 쓰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만, M1과는 비교가 안돼서 선더볼트 작전 때 미군이 전부 M1으로 바꾸어 줬습니다

 

▼ 개인 군장을 짊어지고 배에 오르고 있는 제 1여단입니다.

 

▼ 배에 승선해서 기념사진을 찍는 병사입니다.

 

▼ 튀르키예 제1여단을 싣고 부산으로 출항하는 배이며, 군부대 관계자들이 환송하고 있습니다

 

▼ 1950년 10월 17일 부산에 도착한 튀르키예 제 1여단입니다. 미군 군악대가 환영 연주를 하고 있는데, 군악대는 전부 흑인으로 구성하였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나라들의 병력이 부산에 도착하면 환영연주를 도맡아 했습니다.

 

▼ 소총(GEW98)에 착검까지 하고 배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 제1터키 여단이 배에서 내리면서 튀르키예 국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습니다.

 

▼ 부산에 도착해서 기차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개인 소총을 자세히 보면 GEW98과 M1개런디 소총이 보이는데, 새로 파병된 여단과 교대하고 부산에서 티르키예로 귀국하는 병사들처럼 보입니다

 

▼ 터키 제1여단은 6·25 전쟁에 참전한 후 최초로 벌인 전투는 보통 청천강 전투라고 하는 군우리 전투인데, 지역은 평안남도 개천시 일대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이며, 북진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을 중국군이 포위, 공격해서 벌어진 전투로서,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38선 이남으로 철수하는 1.4 후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 [자료:위키백과] 군우리 전투 상황

 

▼ [자료:국가보훈처]

 

군우리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1월 29일(12월1일)까지 군우리 인근에서 벌어진 한국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인데, 말이 전투지, UN군(미군 2사단)이 중공군에 개박살 나면서 죽음의 계곡을 통과하는 후퇴 중 발생한 전투이며, 전투의 주역은 튀르키예 제1여단입니다.

 

당시 미 2사단은 철수하던 미 8군 대열의 마지막 부대였으며, 남쪽으로 이어지는 좁고 기다란 계곡 사이의 길을 따라서 퇴각하면서 미 8군의 철수 작전을 돕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군우리 남쪽 10Km의 계곡을 포위하는데 이때 튀르키예 제1여단이 미군의 철수작전을 지원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중공군과 전투를 치르게 되었으며 중공군을 지연시키려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그나마 튀르키예 제1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미군은 전멸하지 않고 죽음의 계곡을 벗어났지만 병력의 80%를 잃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 당한 최고의 치욕이었습니다.

 

▼ 중공군 진지를 공격하는 튀르키예 군입니다. 어떤 자료에는 후퇴하는 사진이라고도 합니다.

 

- 튀르키예 여단의 장교와 사병에게 상을 증정하러 방문한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과 제1여단장 야지지 준장

 

▼ 튀르키예 군의 참전기념비는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 장소에 있어서 특별하게 찾아보지 않는 이상, 일반들이 접근하기는 참 어렸습니다.

 

▼ 튀르키예 여단의 병사들이 M1 개런디 소총에 대해서 삽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튀르키예 여단은 GEW98 구식소총으로 무장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미군이 탄약보급, 성능 문제로 M1개런디 소총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 총검술 교육을 받고 있는 튀르키예 여단의 병사들

 

▼ 박격포 발사훈련을 받고 있는 병사들

 

▼ 튀르키예 여단의 병사들이 전입한 부대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튀루키예여단의 참전기록을 보면 총 10차에 걸쳐서 파병이 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투에 직접 참전한 여단 1 여단, 2 여단, 3 여단인 것으로 보입니다. 나머지는 정전 후에 파병된 여단으로서 의정부지역 방어 임무에 배치되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한국군이나 연합군은 부대는 그대로 있고, 부족한 병력은 보충만 하는데, 튀르키예는 부대 전체를 교대하였습니다.

 

▼ 다음은 김량장리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김량장 전투(금량 장전 투)는 6.25 전쟁 중기인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용인군 용인읍 김량장리 일대에서 벌어진 중공군과의 전투입니다.

유엔군의 강력한 선더볼트 작전으로 북으로 밀리던 중공군은 수원과 용인 일대에서 지연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튀르키예 군이 중공군을 밀어 올리면서 용인의 김량장리에 도착했을 때 151 고지에 많은 중공군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미 25사단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아 151 고지의 중공군 소탕 전투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터키 여단은 앞선 군우리전투에서 미2사단 철수작전을 지원하다가 예하 일부 부대가 명령없이 철수해서 큰 피해를 본 미군한테 욕만 바가지로 먹고 있었던 상태로 어떻게든 군우리 철수작전의 실수를 되 갚아야 할 빛이 있었습니다


이때 군우리에서 멋대로 철수해버린  터키여단 241 보병연대 제3대대, 대대장 비글린 중령이 151 고지 공격을 자청하여 3대대 단독으로 151고지 돌격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자료에는 금양장리 전투로 나오는데, 김양장리를 영어로 표기하면서 잘못되어 금양장리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양장리 전투는 185고지와 151고지의 전투를 묶어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 김량장리와 151고지는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튀르키에 제1여단은 김량장리와 151고지로 두방향으로 진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 151고지는 지금의 보라동 일대의 야산입니다.

 

▼ 김양장리는 지금의 김량장역 부근입니다

 

▼ 튀르키예 여단의 포병대가 사전 포격을 하고 있습니다

 

▼ 미군 2사단 탱크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하는 튀르키예여단 병사들

 

▼ 151 고지에서 지연전을 하고 있던 중공군 1개 대대를 향해서  241 연대 3대대는 장병 전원이 총검을 꽂은 후 "알라후 아크바르"라는 함성을 지르며 151 고지의 참호진지를 향해 그대로 돌진하면서 닥치는 대로 부숴버렸습니다.

 

※ 이날(1월 25일) 오후 5시경 전투가 끝난 후에 151 고지에서 발견된 중국군의 시체는 474 구였는데, 시체 대다수가 개머리판에 맞아 뼈가 부서지거나 총검에 찔려 과다출혈을 일으킨 상태로 전사하였습니다.

 

터키군은 이 돌격 전투에서 전사 12명과 부상 70명이라는 가벼운 손실만을 입었으며, 이 전투로 군우리에서 명령 없이 철수해버린 죗값을 값았습니다. 이때부터 백병전의 부대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 중공군 포로

 

▼ 전투후에 트르키예 병사가 노새를 붙잡고 있습니다. 이 노새는 중공군의 무기나 탄약을 날랐습니다.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전투가 벌어져도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있는다고 합니다.

 

▼ 전투가 끝난 후, 중공군의 무기를 정리하고 있는 튀르키예 여단 병사들입니다. 그런데 소총이 UN군의 M1 카빈처럼 보입니다

 

▼ 이 사진은 1951년 2월 라이프지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Carl Mydans)가 한국(Korea)에서 촬영한 튀르키예군 병사들


 ▼ 김양장리에서 전투가 끝난 후에 표지판 앞에 서있는 튀르키예 여단의 병사입니다. 표지판이 금양장리로 쓰여 있네요!!!

 

▼ 한국전쟁에 참전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든지 이 땅에 피를 뿌리고 스러져간 젊은 이국인에 대한 기억은 꼭 되새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 피난민에 대한 의료지원을 하는 튀르키예군입니다

 

▼ 튀르키예군 야전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파란민들인데, 네이팜탄에 의한 피해로 보입니다


 

- 다음은 튀르키예 여단이 수원의 서둔동에 세웠던 앙카라 학교(앙카라 고아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 2018년 6월에 한국에서 개봉된 튀르키예 영화 "기적의 아일라"가 개봉되었을 때 국민들의 관심을 받았으며, 또한 수원의 앙카라 고아원이 여러 매체를 통해서 다뤄지게 되었습니다

 

"아일아의 전쟁"은 2017년 10월 27일에 튀르키예에서 먼저 개봉된 영화로 6.25 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군 부사관인 슐레이만 딜빌리이 육군 하사(최종 계급 대령)와, 한국전쟁에서 고아가 된 소녀 아일라와의 만남과 이별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서  60년 후에 슐레이만이 아일라를 찾아 나서고 만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10년, 춘천 MBC에서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를 통해 한국과 튀르키예에 알려졌고, 이후 튀르키예에서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주연으로는 이스마일 하즈오울루와 한국 아역 배우 김설이 맡았습니다.

 

▼ 수원의 앙카라 고아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슐레이만 딜빌리이 하사(중앙)와 아일라가 손을 잡고 사진를 찍었습니다

 

▼ 슐레이만 딜빌리이 하사는 튀르키예에서도 아일라를 그리워하면서 어떻게든 찾고자 했습니다

 

▼ 그리고 2010년 4월, 여의도 앙카라공원에서 MBC 다큐멘터리팀의 도움으로 무려 60년 만에 슐레이만과 아일라(김은자)가 재회하게 됩니다.

 

▼ 60년만에 만나서 행복하는 슐레이만과 아일라(김은자)

 

▼ 앙카라학원에서의 튀르키예군의 사진들입니다.


 

▼ 다음은 앙카라학원에 대한 다른 자료를 보겠습니다. 현재 앙카라학원은 보존되지 못하고 있으며, 앙카라학원 표지석도 옮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좀 튀르키예 연대에 대한 예의는 아닌것 같습니다. 최소한 원래 자리에 기념관이라고 짓고  기념비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너무 멀리 옮겨졌습니다

 

▼ [자료:수원일보]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의 한 골목길에 터키군이 건립한 앙카라고아원에 대한 기념비는  현재 앙카라학교기념공원으로 이전되었습니다

 

▼ 기념비가 이전된 지도자료입니다

 

▼ 앙카라학원은 현재 건물은 철거되어 있고, 담벼락에 앙카라학원 때의 벽화만 그려져 있습니다. 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건 튀르키예 여단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부지를 매입해서 기념관이라고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산 UN군 묘지에서 튀르키예군 전사자들에 대한 안장식을 하고 하고 있습니다. 


▼ 튀르키예 여단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크게 환영받는 자료사진입니다.

 

▼ 튀르키예에서 발행한 한국전쟁 우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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