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가평은 첩첩산중에 크고 작은 산들로 둘러 싸인 산골짜기 마을입니다. 가평은 산골 중의 산골이지만, 군사적으로 보면 철원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가려면 꼭 지나야 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6.25 전쟁이 북한군에서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쟁으로 바뀔 때부터 중동부전선에 배치된 한국군에 대한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한국군을 지원해 주던 연합군의 피해도 많이 있었지만, 세계 전투사에 길이 빛날 방어전투도 많았던 곳이 가평지역입니다.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의 춘계공세 때 힘 한번 못써보고 꽁지 빠지게 도망만 치다가,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비아냥만 듣던 국군 제6 사단은 용문산 근처에서 재정비하여 한 달 만에 가평 설악면 미사리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을 전멸시킨 전적비가 용문산 전투가 벌어졌던 고지 근처에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Freedom Is Not Free
▼ 용문산 전투 가평지구 전적비는 조그만 마을의 뒤편에 있습니다. 아마도 6.25 전쟁 중에는 마을의 뒷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적비는 1997년에 완공된 국가보훈시설물이며, 한편으로는 국군 제6사단의 승전비입니다
▼ 용문산 가평지구 전투에서 중공군 63군을 박살 낸 파란 별 청성부대 제6사단의 심벌입니다. 중국인민지원군 63군은 파란 별만 보면 오금이 저렸을 것입니다
▼ 전적비에는 주차장이 없습니다. 지방도로 갓길에 주차하고 걸어서 찾아가야 합니다. 차를 가지고 설렁설렁 들어갔다가 회차할 곳도 없어서 고생했습니다... 뭐~잠깐 걸어가면 됩니다.
- 용문산 가평지구 전적비 주소 : 경기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 98
※ 가평군 지역은 과거 6.25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격전지 중 한 곳으로 가평지구 전투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와 전적비등이 곳곳에 있습니다 가평의 전투기념비. 참전기념비, 전적비등을 찾아 보면 호주/뉴질랜드전투기념비, 프랑스대대참전기념비. 캐나다전투기념비, 미국참전기념비, 영연방참전기념비, 용문산전투 가평지구 전적비등이 있습니다. 용문산전투 가평지구 전적비외에는 전부 연합군(특히 영연방군)의 전투기념비입니다. 가평에 연합군전투기념비가 많은것은 국군 제 6사단이 사창리에서 중공군에게 개박살 나면서 가평을 통해서 용문산으로 후퇴를 하게 됬는데, 이때 6사단의 안전한 후퇴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던 영연방군의 방어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있는 이유입니다. |
▼ 가평 용문산 가평지구 전적비는 6.25 전쟁이 한창인 1951년 5월 18일~6월 6일간에 벌어진 국군 제6사단과 중국인민지원군(63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간의 전투에서 크게 이긴 것을 기념하는 전적비이고 1997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국군 6사단은 가평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춘천 지암리를 거쳐서 화천까지 60Km 정도 더 쫓아가서 개박살을 냈는데, 화천호 주변에 널린 중공군의 시체가 너무 많아서 호수(나중에 파로호)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쓸어 메워도 더 이상 시체 처리가 어렵고, 날이 더워지면서 시체의 부패가 심해지자 전염병을 우려해서 화천호에 쓸어 넣어 버렸습니다. 6월의 여름은 날이 뜨거워지고, 더워서 부패하는 중공군의 시체를 정상적으로 처리하기는 시간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중공군의 3개 사단이 몇 명인지 알 수는 없고, 자료마다 중공군의 피해 숫자가 너무 차이가 심한데, 중공군 1개 사단의 병력이 최소한 15,000명 정도라고 하면 중공군의 3개 사단이 전멸했으므로 최소한 35,000명도 정도는 사살했고, 10,000명 정도는 포로였다고 추정해 봅니다.
※ 용문산 전투(양평군)의 자료에서 보면 가평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의 피해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료는 아마도 단순히 6사단의 가평지구 전투에서의 자료는 아니고 넓게 춘천 지암리 포위공격과 화천 저수지에서의 궤멸 작전까지 전부 포함한 숫자로 보입니다
이때부터 중공군은 별안간 휴전을 하자고 하면서 전쟁을 2년을 더 끌었습니다.
▼ 전적비 구역은 좀 넓기는 하지만 차량은 들아 갈 수 없습니다. 행사 때는 개방하겠죠?
▼ 1951년 6월 초에도 날씨가 흐렸을까? 철모에 결사(決死)를 붉게 쓰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참호 안까지 침투한 중공군을 대검으로 해치운 불사조 6사단 장병들에게 추모의 마음을 올립니다. 전적비는 용문산을 바라보면서 서 있습니다
▼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의 산속에서의 작전회의 인듯 합니다.
▼ 가평지구 전투의 개념도를 보면 3단계로 설명이 되는데, 중공군 3개 사단의 전투배치와 국군 6사단 2 연대의 1대대, 2대대, 3대대 방어 배치와 중공군의 공격, 6사단의 반격으로 설명이 됩니다.
- 용문산 전투 :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18일부터 5월 30일(최종은 6월 9일)까지 가평 남쪽의 용문산 지역을 방어 중이던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 제63군(187,188,189사단)의 침공을 격퇴하고 승리한 방어전투입니다.
- 전투배치 :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업산, 3대대는 (후방에 위치한) 353 고지에 참호를 파고 중공군을 기다렸고, 드디어 1951년 5월 18일 오후부터 1대대와 2대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중공군이 강을 건너서 새카맣게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모습입니다. 항공이나, 대포등은 없었지만, 전투에 필요한 최소한의 무기는 대체로 잘 갖추고 전투를 하는것으로 보입니다.
국군 제6사단은 용문산 북쪽의 낮은 고지의 주저항선(No Name Line)에 예비연대(19연대,7연대)를 배치하고 제2연대를 경계부대로 용문산에서 멀리 떨어진 전방의 홍천강과 북한강 남안에 추진배치하여 방어배치를 하였을때 중공군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6사단 2연대 1대대는 보통때 처럼 전투를 하다가, 후퇴를 하면서 주 저항선으로 후퇴하여 에비대대가 되는것으로 준비를 하였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1대대는 철수를 하는것 처럼 하다가 원래의 위치에서 좀 떨어진 나산고지에 짱 박혀서, 2연대의 1대대, 2대대, 3대대와 같이 삼각형 형태로 배치 되어 몰려 오는 중공군의 2개 사단(187,188사단)과 맞짱을 뜨게 되는데, 3일간 2개 사단과 정면 대결을 합니다
이때부터 2 연대 주변에 몰려드는 중공군을 향해서 전폭기와 각종 야포의 지원이 시작되자 중공군 지휘부는 2연대 방어지역이 6사단의 전체 병력이 방어하는 것으로 오판하여, 예비사단인 189사단까지 추가로 투입해서 6사단을 사창리전투처럼 말아먹으려고 덤벼 듭니다.
5월 19일 야간부터 20일 새벽까지 네 차례나 이어진 중공군의 파상공세가 결국 모조리 실패로 돌아간 20일 오전 5시, 이때 용문산 북방 고지 주저항선에서 놀고(?) 있던 7 연대와 19 연대는 반격을 개시하는데, 중공군의 특기인 우회 침투를 역으로 이용하면서 중공군 63군의 뒷덜미를 잡아챕니다.
지금까지 국군의 전투 형태와는 전혀 다르게 오히려 역습으로 뒷치기를 당한 중공군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깨달았으며, 승기를 잡은 6사단과 미군의 9군단의 대대적인 포위 작전을 눈치채고, 가뜩이나 식량과 탄약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한국군 6사단에게 무리한 전면공격을 계속 퍼붓다가는 후방이 미군에게 차단당해 포위·섬멸당할 수 있음을 직감한 중공군 제63군은 20일 새벽을 기해 3개 사단 전체를 퇴각시켰고, 20~21일 야음을 틈타 북한강을 다시 건너 북쪽의 연천, 철원 방향으로 퇴각했습니다.(그런데 사실 몰살을 당한 중공군은 63군이 아니라 강촌에서 우물쭈물하다가 퇴각 시기를 놓친 제60군 제180사단 병력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입니다(용문산전투의 사진이 아닐 수 도 있습니다)
▼ 후송을 기다리는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입니다. 포로 처리만 해도 어마어마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 화천댐은 1951.5.6 미공군이 중공군의 수공(水攻)의 위험성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강습기에서 어뢰로 미리 폭하여서 호수에 물이 별로 없었습니다. 중공군이 6사단에 패하면서 화천호 오음리 부근에서 북한강을 건너려 했지만 강폭이 넓어서 강을 건너기 전에 미공군 강습기에서 쏟아지는 네이팜탄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 국군 6사단이 승기를 잡은 것은 제2연대의 물러나지 않겠다는 강한 정신무장과 각종 야포의 지원사격, 전폭기의 무차별 공격과 부대원들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정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6사단이 할 일은 패주 하는 중공군을 추격하는 일입니다.
▼ 사창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불난 집 똥개처럼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국군 6사단은 영연방군과 미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만 챙겨 용문산에 자리를 잡습니다.
국군 6사단이 미군과 영연방군의 철수 지원작전이 없었다면, 아마도 거의 전멸을 당했을 것입니다.
▼ 용문산에 사단본부를 차린 장도영 장군은 미군의 도움으로 무장을 다시 하는 한편 사창리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도망치던 2 연대의 지휘관(연대장), 정보장교, 작전장교를 모조리 교체하고 3개 대대장들을 모두 후송시키거나 군사재판에 회부해 버렸습니다
그전에 6 사단장 장도영 장군은 신임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한테 "야 너 전투할 수 있냐?"라는 말도 듣고, 미군으로 부터 검쟁이 파란 별이라고 돌팔매를 당하는 등 개망신을 당한 터라 , 지휘체계부터 다시 세우고 장병들의 정신 재무장에 힘을 쏟았습니다.
장도영 사단장은 1951년 5월 1일 2 연대의 군장검사를 실시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우리 청성부대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데 너희가 사창리 전투에서 망쳐 놓았다. 이 오명을 씻기 위해 너희는 앞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이제 후퇴는 없다.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 말고 전초진지를 사수하라. 진지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한 사단장은 모든 것을 최대한 지원하겠다"며 전투의지를 자극하였다. 특히 2대대는 전방으로 향하며 머리띠나 철모에 決死(결사)를 쓸 정도로 강한 전의를 보였습니다.
▼ 전투력은 정신력에서 나오는 만큼 장도영 사당장은 싸움의 자세를 가르쳤고, 장병들은 지급받은 무기로 훈련을 하면서 사창리의 패배를 되 갚아줄 날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 전투 중인 6사단 장병들
▼ 전투가 끝나고 집결한 6사단 장병들, 철모에 결사 띠가 둘러져 있습니다. 말은 중공군이 후퇴하면서 두고 간 말이며, 중공군은 전투장비의 이동을 말이나, 노새에게 의지 하였다고 합니다
▼ [자료사진] 1951년 5월 17~21일 용문산 전투와 파로호 전투로 국군 육군 6사단이 중공군 63군 3개 사단을 궤멸시키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장도영 육군 6 사단장이 한국을 방문한 오성장군 오마르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 등 최고위층 지휘관 앞에서 전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장도영 장군은 1923년생이므로 1951년에는 겨우 29세(한국나이 30세)에 준장으로 사단장을 하였습니다. 미군 장성들을 상대로 브리핑하는 장도영 장군의 얼굴이 앴돼 보입니다
▼ 제2의 살수대첩의 기록을 쓴 중공군 킬러 육군 6사단
1951년 5월 18일 부터 벌어진 전투는 크게 보면 3단계로 1단계는 국군 6사단의 용문산 전투, 2단계는 지암리 포위작전, 3단계는 파로호전투로 구분이 되는데 보통은 3단계 전투를 통합하여 용문산전투라고 하는 듯합니다. |
용문산 전투에서 패주한 중공군은 화천 파로호 인근에 오음리에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육군 6사단에도 새로운 명령이 하달됐는데,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온 중공군 패잔병들과 춘천 그리고 평창 속사리 방면에서 후퇴해 온 중공군 3개 군단이 파로호 남쪽 간동면 오음리 일대에 집결하니까 신속히 퇴로를 차단하라는 지시였습니다.
1951년 5월 26일 6사단 19 연대는 미 24사단 21 연대, 미 7사단 7 연대와 한께 화천-춘천-지암리로 이어지는 축 선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공군 3개 군단의 퇴로를 차단했고, 6사단 7 연대는 패주 하는 중공군 후미를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5월 28일 하루 동안 6사단 7 연대는 중공군 3만 80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6사단 전체가 파로호 전투에서 총 6만 200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군사편찬위원회).
전투는 이겼지만 또 다른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중공군 시체 처리였습니다. 더운 여름철이라 중공군 전사자의 부패도 빨랐기 때문에 6사단 7 연대 병력 대부분은 시신 처리에 매달렸습니다. 가평호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쓸어 넣었고, 처리에 한계를 보이자 병사들은 뗏목에 시신을 싣고 나룻배로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끌고 가서 수장 시기도 하고. 미군들은 불도저로 시신을 한꺼번에 호수에 밀어 넣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신을 처리했는지는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널린 게 중공군 시체였다고 합니다.
▼ 용산전쟁기념관에 영원히 기억될 용문산전투 코너에 6사단기와 "결사"라고 쓰인 철모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1986년 평화의 댐 공사로 화천댐의 물을 뺄때가 있었는데, 방류 하한선까지 물을 빼고 나서 땅을 파 보았는데, 인골은 없었다고 합니다.아마도 뻘에 깊이 묻혀 있거나, 댐 가까이에 휩쓸려서 뻘에 깊숙히 묻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40여년전에는 파로호에 고기가 많다(?)고 낚시도 갔었는데, 그 때는 중공군들이 몰살돼서 물속에 수장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이제 70년이 지났으니, 수장된 중공군 인골은 잊어도 될 것같습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 오랑캐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 화천호를 파로호라고 명명하면서 6사단을 부대 표창했습니다.
▼ 파로호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파로호(破虜湖) 비의 필체를 복제한 비입니다, 오랑캐를 깨 부순 호수...ㅎ.ㅎ
몇년전에 중국인들이 파로호의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는데..지들이 오랑캐인줄은 아는 모양이네요!!!, 근데 어따 대고 ㅈㄹ이야!!!
▼ 이승만 대통령은_1955년 11월 18일 파로호의 명명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 [자료:중앙 포토] 파로호 비 뒤로 보이는 호수에서 수많은 중공군이 몰살되었습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물에 뛰어 들었을까?
▼ 국군 6사단이 사창리에서 정신 못 차리고 꽁지 빠지게 용문산으로 도망칠 때 영연방군이 철수작전을 도왔는데 이때 영 연방 군을 지원하던 탱크 부대가 미군 2사단 72 탱크대대였습니다. 영연방군과 미군 72 탱크부대의 도움으로 6사단은 용문산에 자리를 잡고 한 달 후에 중공군 63군단을 개박살 내버렸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참전기념비입니다.
▼ [자료:플리커] 미 2사단 72 탱크부대 마크입니다
▼ 가평에서의 미 제2사단 72탱크부대 셔면 전차
▼ 영연방군(호주군)을 지원하는 미군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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