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과 홍천의 경계인 삼마치고개에서 1951.2.4.~1951.2.12. 사이에 국군 8사단이 중공군에게 맥없이 패하고 포위되면서 기타 미군과 유엔군의 연쇄 후퇴를 불러왔는데, 네덜란드군은 횡성교 부근에서 철수지원작전을 하던 중에 중공군의 대대지휘부 침투로 대대장인 덴 오우덴 중령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횡성교를 끝까지 지키면서 국군과 유엔군의 철수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총 4,748명의 군인을 파병하였으며, 전사자는 대대장인 덴 오우덴 중령을 포함해 122명이며, 3명은 행방불명(포로)되었습니다. 특히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횡성지역인 관계로 새말IC부근에 참전기념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 처음에는 네덜란드공원이었으나, 625참전기념비와 베트남참전기념비가 세워지면서 2009년에 횡성참전기념공원으로 명칭이 제정되었습니다.
▼ 네덜란드군 참전기념비는 새말IC 부근에 있습니다
※주소 :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 393-5
횡성 참전기념공원 안내도 |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희생된 네덜란드군을 추모하기 위해 1975년 9월 29일에 국방부의 주관으로 기념탑과 동상이 건립되었다. 횡성군참전기념공원에는 네덜란드군참전기념비 및 횡성군참전기념탑이 있어, 참전용사의 호국정신과 평화우호정신을 함께 기릴 수 있는 애국의 고장 횡성을 대표할만한 공원이라 하겠다. UN군 16개국 가운데 한 나라인 네덜란드 해군은 1950년 7월 16일부터 6개 함정이 참전하여 해상작전을 전개하였고, 육군은 같은 해 11월 23일부터 강원지구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횡성군참전기념탑은 국가보훈처와 강원도, 횡성군이 지원해 건립하였으며 네덜란드군참전기념비와 함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참전용사들의 애국혼과 애국의 고장 횡성을 알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
▼ 대한민국이 사라질 뻔한 절체절명의 와중에 전투병력을 파병해 준 나라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 참전약사는 글자가 너무 작아서 따로 옮겨 적었습니다
참전약사 |
네덜란드군은 1950년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용전분투하다가 육군은 1954년 10 18일, 해군은 1955년 1월 24일에 각각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여기 여러 유엔회원국 국민들에게 그 뜻을 전하고자 그들이 남긴 찬란한 전력과 지휘관들의 이름을 새긴다 해군 네덜란드 해군은 1950년 7월 16일부터 1955년 1월 24일 까지의 참전기간동안 구축함 및 프리기트함 6척과 1,350명의 병력이 한국해역에서 활동하였다. 1950.7.3. 네덜란드 정부 한국전 해군 파병 결정 1950.7.16.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Evertsen)호가 일본 사세보 해군기지에 도착 1950.7.19.~1951.1.24. 해상작전임무 수행(초계, 소해, 해안포격, 지상군 업호, 기뢰부설 수송선당 호위, 대공) 1951.4.18.~19523.2 반가렌(Van Galen)호 서해 작전해역에서 임무수행(적의 해상징 js 차단 및 봉쇄, 탄약과 보급품 지원, 지상군의 측면지원) 1952.3.2.~1953.1.18. 피엣 해인(Piet Hein)호 서해항모 부대호위 1953.1.18. 조안모리츠 반나소(Johan Maurits van Nassau)호의 해상초계임무 1953.12.5.~1954.9.10. 두보이(Dubois)호의 해상초계임부 1954.9.10.~1955.1.245 반지질(Van Zijil)호 임무수행 육군 1950.8.11. 네덜란드 정부 육군 파병 결정 1950.11.23.~1950.11.24. 보병대대 부산항 도착 후 대구 유엔군 수용 센터로 이동 1950.12.5. 수원 도착 후 미 제8군의 예비대가 됨 1950.12.22. 수원 출발, 충주 횡강리에 진지 구축 1951.1.2. 횡성으로 북상 1951.1.3. 초현리 전투 1951.1.13.~1951.1.14. 원주방어(325고지)전투 1951.2.4.~1951.2.12. 횡성전투 1951.5.16.~1951.5.22. 가리산(1021)전투 1951.5.31.~1951.6.8. 인제전투 1951.7.15.~1951.8.6. 대우산 전투 1951.10.3.~1951.10.15. 문등리 전투 1952.2.18. 별고지전투 195.7.13~1953.7.27. 묵곡리(340)전투 |
횡성전투 |
횡성전투의 발생배경 1951년 2월 5일 국군 제 5사단과 제 8사단이 공격 부대가 되어 라운드업(Operation RoundUp)작전을 개시하였으며, 작전 개시 후 약 3일 동안, 예정대로 계획된 제한 목표들과 통제선을 확보하였으나, 공산군(중공군)의 주 저항선에 부딪히면서 더 이상의 전진이 어려웠다. 이 무렵 중공군은 새로운 공세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조중연합사령관 펑더화이는 서부전선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중동부전선에 대한 집중 공격을 계획하였다. 즉 서부전선에서는 한강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유엔군의 전진을 저지시키고, 주력을 가평~홍천 일대에 집결시켜 양평~횡성(삼마치고개) 일대의 유엔군 전선 돌출부에 대해 공세를 가한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기동력과 화력이 열세한 국군 제 8사단이 배치된 횡성 지역이었다. 횡성전투 서론 중공군은 1951년 2월 11일 17시를 기해 횡성 공격을 시작하였다, 중공군 제42군단 제124사단이 횡성 서북방에서 진격로를 개척하고,이어 중공군 제66단군단 주력이 국군 제 8사단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예비대 없이 예하의 3대 연대를 모두 전선에 투입해 진격하라는 미 제10군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횡성 북방 삼마치 고개로 진출한 국군 제 8사단은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사력을 다했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상황은 급속히 악화히었다. 제8사단은 중공군의 공격 3시간 루인 2월 12일 01시경부터 지휘 통신의 두절과 함께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제8사단은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거나 개별적으로 철수하였다. 국군제8사단의 조기 붕괴는 사단을 지원하던 미군 지원부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미군 지원부대들은 전방 사단의 붕괴 사실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함으로써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이로 인해 미군 지원부대들은 화포와 차량등 많은 중장비를 버리고 산악능선을 따라 횡성으로 철수하였다. 네덜란드군의 활약 철수 과정에서 미 제7사단 제 38연대에 배속된 네덜란드대대는 덴 오우덴 대대장의 전사와 적중 고립의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방 부대가 횡성으로 철수하는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횡성교를 1951년 2월 12일 야간까지 확보해줌으로써 분산되었던 부대들의 철수를 가능하게 했다,. 1950년부터 1954년 까지 네덜란드는 총 4,748명의 군인을 파병하였다. 이 중 전사자는 대대장인 덴 오우덴 중령을 포함해 122명이며, 3명은 행방불명되었다. |
▼ 네덜란드의 풍차를 기본 컨셉으로 1975년 9월 29일 완공한 네덜란드군 참전기념탑입니다
특징·설명/추모내용 (국가보훈부 홈페이지에서 인용)
1975년 9월 29일 국방부는 네덜란드군 전사상자 768명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영동고속도로 새말 인터체인지 근처에 탑과 동상을 세웠다. 참전비가 이곳에 세워진 이유는 네덜란드군이 횡성 부근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웠고, 특히 횡성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1951년 2월 12일 횡성에서 홍천으로 진격 중이던 국군과 미군이 중공군의 2월공세에 부딪쳐 철수하게 되자, 네덜란드대대는 횡성에서 이들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밤, 국군으로 가장한 중공군이 대대의 동측 후방으로 침투하여 대대본부를 기습공격했다. 당시 네덜란드대대로서는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로 인하여 대대장 오우덴(M.P.A. den Ouden) 중령이 전사하고 대대 지휘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선임자인 화기 중대장이 대대장의 지휘권을 승계하고 부대를 능동적으로 지휘 통제하여 밤새도록 중공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날이 밝을 무렵에 전 대대원은 원주로 철수했다.
▼ 기념비문의 내용을 옮겨 적었습니다
충성과 용기로서 신조를 삼는 “오렌지”공의 억센 후예들 붉은 침략자와 싸우다가 피를 흘린 768명의 고귀한 희생자들! 우리는 그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빛나는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비를 세운다 |
▼ 횡성에서 전사한 덴 오우덴중령입니다.
횡성에서 국군 8사단과 미군의 철수작전을 하던중 대대 지휘부에 침투한 중공군의 수류탄에 전사하였습니다
▼ 다음 사진은 네덜란드대대의 파병과 전투의 기록사진입니다(국가보훈부, 위키백과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신형 호위함으로 재탄생한 에베르센호
▼ 수원역으로 추정됩니다(저도 60년대 수원역에서 멀지 않은 곳의 철로변에 살았는데, 정지신호가 걸려서 미군화물기차가 서면, 달려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했었습니다)
▼ 6.25전쟁에는 미군은 물론 각 나라별로 파병된 부대에 한국군(카투사)이 소대병력 규모로 배속되어 함께 전투를 치렀습니다.
네덜란드군에 배속된 한국군이며 , 지휘체계는 네덜란드군에게 있었습니다 어깨에 별마크는 네덜란드군이 미 2사단에 배속되었을 때입니다.
▼ 네덜란드 병사의 군복에 새겨진 마크는 미군 2사단의 마크인데(보통 인디언헤드라고 함), 네덜란드군은 미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를 치렀습니다.
한국전쟁(6.25전쟁)중에 여러국가에서 파견된 전투병들은 대부분 미군에 배속되었습니다.
▼ 전쟁 막바지의 별고지전투에서의 네덜란드군(앞에 네덜란드군에 배속된 한국군 카투사입니다)
▼ 임무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한국을 떠나는 네덜란드 대대
▼ 네덜란드군 참전기념비 옆에 보이는 탑에는 두 개의 기둥에 각각 6.25 참전기념탑, 베트남참전기념탑이 서로 기대어 세어져 있습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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