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지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대한민국 누구도 몰랐던 비극의 분단선이 생겼는데 그것이 38선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통치 결정에 따라서, 철원지역은 북한땅이 되었지만, 6.25전쟁중에 남한땅이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지는 않고, 휴전상태지만 과거 북한땅, 남한땅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승일교라서 한번 들려 보았습니다.

 

승일교는 한문으로 보자면, 박승일 대령을 추모하는 昇日橋(승일교)가 맞다고 합니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이름중 한자씩 차용하여 承日橋(승일교)라고 하는 것은 정식명칭이 아니라고 합니다


▼ 한탄강 승일교 하부로 들어가는 길에 조형물 뒤로 승일교가 보입니다.

 

▼ 한여울길 트레일 지도중에 승일교의 위치를 표시하여 보았습니다.

 

▼ 승일교의 모습입니다만, 현재는 자동차 운행은 못하고 보행자만 다니는 길이 되었습니다. 승일교는 6.25 전쟁중에 북한정권에서 두번째 교각까지만 세우다가 전쟁이 시작되자 공사가 중단 되었다가, 1952년 부터 주한미군 79공병대와 국군 62공병대가 교각과 상판을 완성시켜 1958년 12월 3일 완공하고 승일교라고 하였습니다.

 

※ 철원군청 홈폐이지에서 인용한 승일교의 내용입니다

 

- 건축물 이력
소련식유럽공법의 철근 콘크리트라멘조 아치교로서 교량의 조형미 가 돋보이는 교량높이 35m, 길이120m, 폭 8m 로,
철원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 김명여 교사가 설계한 것으로 1948년에 착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건축물 연혁
새로 놓여진 철교로 인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이 다리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이 시간차이를 두고 완성한 남북합작의 다리이다.
큰 아치위의 상판을 받치는 작은 아치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은 시공자가 달라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원래 이 다리가 놓여진 곳은 철원읍을 가로지르는 한탄강의 남부와 북부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예전에는 얕은 여울에 돌다리를 놓아 사용하고, 수위가 높아지면 목선을 이용하던 곳에 1948년 8월 이 도로를 군사적 연결로로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정권하에서 교량설치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철원 및 김화 지역주민들이 5일간 교대제의 노력공작대 라는 이름으로 총동원되어 한국전쟁 초까지 다리 기초 공사와 2개의 교각을 세워 북쪽 부분은 거의 완성되고 남쪽부분은 남게 되었다.

 

그 이후 이지역이 수복되어 국군에 의해 임시목조 가교가 놓여 있다가 1958년 12월 미완성된 부분이 마감되어 다리가 완공되었다.

 

원래 한탄교39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다리 이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해지기도 하는데...
북한이 절반가량 완성했다가 남측이 나머지부분을 완공해 이승만 대통령의 승자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해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남한과 북한이 시기는 다르지만 반반씩 만들었다는 것이 이 다리의 운명적인 생태가 흥미를 더 하는 요소가 들어 간 다리이름이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다리 이름의 유래는 ...

 6.25한국전쟁 중에 큰 공을 세우고 조선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박승일(朴昇日, 1920년 ~ 몰년 미상) 연대장(대령)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昇日橋)라고 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합니다


▼ 이국적인 모습의 승일교인데, 유럽의 다리사진을 보면 많이 보이는 형태 입니다

 

▼ 아치형 교각이 두개인데, 하나는 북한, 하나는 남한이 만들었다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 자료사진으로  승일교 옆에 철교인 한탄대교가 만들어지기 전의 사진입니다._철원군청 홈폐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다리를 완공하고 단기4291년(1958년) 12월 3일, 승일교라고 새겼습니다, 공사기간이 7년이 걸렸습니다.


▼ 승일교가 낡고, 왕복 2차선이라서 추가로 철교를 만들고, 한탄대교라고 하였으며, 옆에는 추가로 승일교와 같은 디자인으로 콘크리트 다리를 추가로 만들었으며, 상행2차선, 하행2차선이 되었습니다

 

▼ 승일교와 같은 디자인으로 만든 하행전용 다리 입니다. 언뜻 보면 승일교와 헷갈립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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