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定林寺地)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서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중문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 이상은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인용된 사진자료들은 문화재청 산하기관,문화재연구소, e_뮤지엄(전국박물관)등에서 가져온 자료임을 밝힙니다.


▼ 부여 석탑로에서 보면 부여중학교와 마주보고 있는 정림사지 사이의 길을 보면 길바닥에 백제의 문양을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거의 700년의 역사를 가졌던 나라였으나, 역사적인 사료나, 유물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때 대부분 일본으로 밀반출되어 있는지도 모를일입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것은 660년이었으며, 현재 1361년이나 지났지만, 우리는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던 백제의 역사를  조금씩이나마, 느껴보고자, 사비성을 찾아 갑니다

 

▼ 정림사지의 정문입니다. 정림사지는 일제강점기때의 1942년도에 발굴조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때쯤 정림사지의 출입문의 윤곽이 나왔을 것 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 부여박물관 자료에서 보는 현재의 정림사지의 모습입니다

 

▼ 부여박물관의 자료에서 보면, 현재의 도심 사진위에 정림사지가 완전 복원 됬을때의 모형도를 컴퓨터그래픽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 정문 앞에서 바라보는 정림사지의 연지, 5층 석탑, 강당의 모습입니다.

 

▼ 일제강점기때 1916년도 부터 조선총독부에서 부여의 모든 지역을 유리건판 사진기로 촬영을 하였고, 그 이후 1930년대~1940년대까지는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면서 수많은 유물을 발굴하였습니다.

 

그 유물들은 현재 부여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고, 일부는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을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앞으로도 발굴조사에 따라서 더 많은 유물들이 나올것이 예상되며,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는 우리문화의 자존심을 돋우어 주는 귀중한 보물이 될 것 입니다 

▼ 일제강점기때의 부여 정림사지와 그 일대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정림사지를 발굴하기 전인 1916년도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데, 탑과 석불 주위로 민가와 농경지만 보입니다

 

▼ 정림사지를 발굴하고 있는 모습인데, 1942년도 찍은 사진으로 보입니다.

 

▼ 연지를 가로질러 갑니다. 연지에는 당연히 연꽃이 있지만, 아직은 연꽃이 피는 시기가 아니므로 상상으로 아름다운 연꽃의 모습을 봅니다. 연지를 지나면 바로 중문지 입니다

 

▼ 현재는 중문지가 흙으로 덮혀 있고, 복원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의 정림사지의 모든 건물의 발굴 결과는 고려시대 고려 현종 때(1028년경) 건물로 밝혀지고 있는데, 원래는 백제때의 사찰이었지만, 백제가 멸망하고, 몇백년이 지난후에 고려때 다시 절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중문지를 통과하면, 5층석탑앞에 서게 됩니다.

 

▼ 오층석탑과 뒤로는 강당이 보입니다. 그동안 투박한 백제시대의 석탑을 보다가 날렵하게 다듬은 옥개석(屋蓋石)을 보니, 크게 기교를 부린것도 아니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제시대때 세워진 석탑은 현재 2기가 남았는데, 정림사지5층석탑과 익산의 미륵사지석탑만 있습니다.

 

▼ 부여정림사지 5층석탑은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상은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때(1916년도추정) 일본경찰과 일본관리들이 조선인 학생들과 찍은 사진입니다.

 

▼ 탑신에 크게 새겨진 글씨는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하는데, 당나라군(장수는 소정방)이 백제를 명망시킨 660년에 석탑에 새긴 글씨라고 합니다. 탑신 16면에 작은 글씨들이 보이는데,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왕(의자왕)과 신하, 백제국민등을 당나라로 잡아갔다는 내용들이라고 합니다.

 

자료에 보면 의자왕은 사비성이 무너지자 웅진(지금의 공주의 공산성)에서 최후의 방어전을 치르게 되었지만, 소정방과 내통한 좌평 예식진의 배반으로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의자왕과 태자융,왕자효,왕자인,과 대신 과 장군들 88인, 백성 12,807인을 당나라 수도 낙양으로 압송하였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최근 KBS역사스페셜 방송에 의하면, 당나라 왕족의 무덤을 발굴하던중 부여태비(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씨(扶餘氏, 690∼738)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 발견이 되었는데, 의자왕의 손녀는 나라가 망해서 당나라에 포로의 신세였지만, 여전히 왕족이었으며, 당나라왕과 결혼해서 죽은후에도 당나라 왕족에 무덤에 묻히게 되었고 묘지명에는 太妃扶餘氏라고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즉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扶餘)이며, 의자왕의 이름은부여의자(扶餘義慈)로 전해집니다.

그 당시 당나라에 잡혀간 의자왕은 왕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되었고, 백제민들이 사는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군의 소정방은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다, 도리어 신라에 패배하여 이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소정방은 76세에 지금의 문경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김유신의 유인작전에 걸려서,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 부여박물관에서 제공된 자료에서 5층석탑의 세부적인 명칭들을 알아 보겠습니다. 

 

▼ 5층석탑의 3면을 담아 보았습니다. 마치 목제탑처럼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 기단부를 자세히 보면 온통 탑신에 작은 글씨들이 많이 보입니다

 

▼ 5층석탑과 강당 사이에는 흙으로 덮어 놓은것은 금당이 있었던 자리 입니다. 발굴조사가 끝난후에 다음 복원때까지는 보존하는 상태입니다.

 

▼ 금당지 앞에서 바라보는 강당의 모습입니다. 강당은 수리중이서 비게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강당지는 현재 고려석불의 보호각이 들어서 있지만, 백제시대때는 현재의 강당이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던 곳이었는데, 백제 멸망후에 고려시대때 강당이 없어진 자리에 석불을 세웠는데, 현재 시대에는 강당도 복원하고 석불도 보호하는 차원에서 강당의 자리에 석불 보호각을 세웠습니다만, 백제때는 강당안에 석불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입니다.

 

▼ 일제강점기때(1942년) 정림사지를 본격적으로 발굴하면서 자료사진을 남겼습니다. 사진을 자헤히 보면 발굴하던곳이 회랑자리인듯 하고, 기와를 엇비슷하게 세워 깔아서 회랑기초공사를 하였던 모습입니다.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 강당앞에서 바라보는 5층석탑 입니다.

 

▼ 정림사지석불좌상은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이상은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석불좌상이 보호각 안에 모셔지기 전의 사진들입니다

 

▼ 정림사지를 발굴하던 일제 강점기때의 사진으로 1942년으로 추정 됩니다

 

▼ 강당에 모셔진 석불좌상입니다. 보호각를 보수 공사중이어서 내부는 어수선 합니다


▼ 다음 장하리에 있는 삼층석탑을 찾아 보았습니다.

 

장하리 3층석탑은 백제의 옛 땅이었던 충청·전라도에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양식을 모방한 백제계 석탑이 몇 개 전하고 있는데 이 탑 역시 그런 계열에 속하는 탑이다.

땅 위에 자연석에 가까운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같은 돌로 너비를 좁히면서 3단의 기단(基壇)을 만들었다. 탑신(塔身)은 네 귀퉁이에 위로 오를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기둥 모양을 새겼고, 그 사이에 긴 판돌을 세워 면을 이루게 하였다.

 

동서남북 사면에 감실모양이 있는데, 우주와 면석의 약화된 모습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감실은 목탑에 많이 나타나던 것으로 불상을 모시는 방을 의미한다. 석탑에서는 대부분 이를 형상화하는데 그쳐 모양만을 새기는 정도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전체적으로 탑신의 몸돌이 높고 지붕돌은 지나치게 넓어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모방하였다고는 하지만 조형감각이나 수법에서 훨씬 떨어지는 작품이다.

1931년에 탑신 1층의 몸돌에서 상아불상, 목제탑, 다라니경 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1962년 해체 수리시에는 2층에서 지름 7㎝, 깊이 12㎝로 사리를 두는 공간이 둥근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41개의 사리가 들어있었다. 이 유물들은 모두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상은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마치 정림사지 5층석탑을 모방한 탑처럼 보이는 장하리 3층석탑입니다. 하지만 이 석탑은 고려시대때의 석탑이라고 하며, 밋밋하게 정림사지 5층석탑의 느낌은 들지만, 완성도에서는 정림사지 5층석탑과는 견줄 수 가 없는 탑입니다.

 

▼ 옥계석 부분 2층에 감실이 있는데, 여기서 사리병이 발굴되었습니다.

 

▼ 1931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1층 몸돌에서 발굴된 목제탑과, 상아불상, 그리고 1961년에 탑을 해제 수리하면서 2층 몸돌에서 사리병(은병, 금동병)이 발국되었습니다. 그런데 1931년에 수리를 위해서 탑을 해체했을때는 사리병이 발견되지 않았을까... 긍금합니다

 

▼ 1931년전 해제수리하기 전의 3층 석탑의 기울어진 모습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한산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절은 폐사되었지만, 탑은 남아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1931년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1층 몸돌에서 발굴된 목제탑과 불상, 상아불상입니다

 

▼ 상아불상은 용기에 담겨서 탑의 1층 몸돌안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 정림사지의 5층석탑과는 비교불가이지만, 그래도 백제의 솜씨를 이어받은 작품이어서 아름답게 보입니다

 

▼ 장하리3층석탑과 정림사지 5층석탑을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 번잡하지 않은 한적한 시골에서 마주하는 백제양식의 장하리3층 석탑이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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