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서석은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백마강가 암벽에 새겨진 글씨로서,. 효종 때 명신 이경여(李敬輿)가 1657년(효종 8)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에 관계된 상소를 올렸고, 이에 효종이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후에 송시열이 뜻을 기려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의 8자를 써서 아들 민서(敏敍)에게 전한 것을 손자 이명(頤命)이 1700년(숙종 26)에 이 암벽에 글씨 8자를 새기고 건물을 지었다. 이 정자의 이름을 대재각(大哉閣)이라 합니다.
※ 여기에 참고로 올린 사진자료들은 문화재연구소,문화유산채널등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지금은 흔적만 남은 백강나루지만,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룻배로 사람들과 물자들을 실어 나르던 나루터였습니다
▼ 진변리 마을사람들이 이용하던 나루터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문입니다.
▼ 백제교를 당겨보았습니다. 다리 오른쪽에는 수북정과 자온대, 그리고 규암나루터가 있습니다. 백제교는 보기에는 다리가 하나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두개의 다리입니다.
첫번째 다리는 왕복2차선이고, 두번째 다리는 왕복 4차선 입니다. 첫번째 다리는 인도교로만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 부산 각서석의 이정표가 보이는 곳 까지 왔습니다. 여기서 부터 약간 오르막를 오르면 두번째 이정표가 나오고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터 대재각 까지는 10분~15분 정도 걸립니다.
▼ 대재각을 찾기는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른길이 있는것도 아니고, 마을에서 들어가는 길은 이 길 뿐입니다.
진변마을 마을회관에서 보면 부산서원앞으로 해서 주택들이 몇채 있는 골목길을 들어 갑니다.
붉은줄 표시대로 가면 백강나루가 나오고 이정표가 보입니다. 산을 어느정도 오르다 보면 대재각 이정표가 있습니다.
▼ 강 건너에서 보면 아래 사진처럼 보이는데, 양수장에서 들어오는 길은 없습니다.(사친출처는 문화유산채널입니다)
▼ 일제강점기때 구드래나루에서 바라보는 부산의 모습입니다.
▼ 대재각이 보이고 앞에는 백마강이 흘러 갑니다. 백마강은 금강이 부여를 지나는 지역의 강 이름으로만 불리우는 이름입니다만, 백강이라고도 합니다.
▼ 절벽밑의 넓다란 공터에 세워진 각서석을 보호하는 대재각입니다. 팔작지붕으로 누각의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 이경여 선생이 청을 쳐야 한다는 상소를 올릴때는 효종8년인데, 이경여는 죽기 3개월전에 상소를 올렸다고 하는데. 죽기전까지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어떤지 알 수 있을것 같습니다.
▼ 절벽아래 터를 다듬어서 누각을 만들었습니다. 누각 뒤에 보면 철제 사다리가 보입니다.
▼ 누각 내부의 모습입니다만, 사람이 서 있기에는 좀 낮습니다. 각서석의 뒷모습이 보이고, 대들보 왼쪽에 보면 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는데, 꼼짝을 하지 않고 납작 업드려 있습니다.
▼ 각서석의 전체 모습입니다.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의 글씨를 아주 힘차게 그리고 아주 깊게 새겨서 몇천년이 흘러도 잊지 않게 후세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느낄 수 가 있습니다. 글씨는 송시열의 글씨체를 모방해서 새겼다고 하며, 이와 똑같은 글씨가 가평 조종암에도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백강 이경여의 생애 및 활동사항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수찬(修撰)에 취임했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였다.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 부제학(副提學)·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해 선비 양성의 방책을 올렸고,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음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해,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해 대사헌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 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하여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 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경여(李敬輿))]
※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1976.01.08지정)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백마강가 암벽에 새겨진 글씨. 효종 때 명신 이경여(李敬輿)가 1657년(효종 8)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에 관계된 정세의 득·실을 논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효종이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 중에 “경의 뜻이 타당하고 마땅하지만 진실로 마음이 아프나 뜻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늦다(誠以至痛在心 有日暮途遠意).”라는 구절이 있었다.
후에 송시열(宋時烈)이 그 뜻을 기려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의 8자를 써서 아들 민서(敏敍)에게 전한 것을 손자 이명(頤命)이 1700년(숙종 26)에 이 암벽에 글씨 8자를 새기고 건물을 지었다.
이 정자의 이름을 대재각(大哉閣)이라 했는데, 이것은 이경여가 효종의 비답을 받았으므로 ≪상서 尙書≫의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大哉王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글씨의 필체가 힘차고 강건하여 금석문의 자료로도 좋을 뿐 아니라, 당시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내려와서도 북벌계획을 왕과 협의하고 토론하던 노재상의 굳은 정신이 담겨진 교훈적인 각서(刻書)이다. - 이상은 서원연합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대재각 내부에는 대재각중건기등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 첫번째 돌기둥은 교체한듯 한 모습입니다. 대재각은 대체로 잘 관리되고 있는듯한 모습입니다
▼ 대재각 정면의 모습입니다. 대재각은 각서석을 보호하는 기능과 누각의 기능도 합니다만, 누각은 사람이 서 있기에는 좀 낮습니다.
▼ 대재각 아래로 계단이 있어서 내려가면서 올려 담아 보았습니다.
▼ 일제강점기때인 1935년에 찍은 항공사진으로 보입니다. 부소산과, 부산, 수북정의 모습이 한꺼번에 찍힌 사진엽서 입니다.
_사진은 문화유산채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때 발행한 사진엽서에서 보는 대재각의 모습이며, 일본어로 각서석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대재각 아래에는 부산각서적이라는 표지가 보여서 아래로 내려가 봅니다
▼ 강변에서 올려다 보는 적벽입니다. 나무가 우거져서 대재각의 모습은 안 보입니다.
▼ 대재각에서 바라보는 부소산과 강변의 구드래나루터의 모습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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