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사는 부여군 임천면 소재지 동쪽에 위치한 성흥 산성의 동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의 연혁은 오래되었으나 사찰이 일시에 폐사되고, 최근에 이르러 다시 개창된 것으로 전한다. 대조사의 시원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백제 때 도승 겸익이 인도의 상가야 천육자 휘하에서 5년동안 수학하여 범문에 능통하게 됨에 아담장 5부 율문을 가져다가 번역하여 이 번역본을 흥윤사에 두었는데 어느날 꿈에 관음보살이 광명주를 들고 나타나 겸익에게 말하기를 번역본이 꽤나 잘 되었다고 칭찬하더니 이 관음보살이 큰 새(大鳥)로 변하여 날아가 가림성(지금의 성흥산성) 부근에서 사라졌다.
이에 겸익은 꿈을 깨고 가림성 부근에 가서 새가 앉은 곳을 찾아보니 큰 새 대신에 바위 위에 관음이 앉아 있었다 하는데, 이에 여기에 석불을 조성한 것이 대명사의 뒷편에 있는 석불이며, 이때 지은 절이 대조사라 전하고 있다.
이 대조사의 연혁과 관련된 내용은 <<부여읍지>>와 <<대조사 미륵실기>>에 전해오는 내용인데 이의 신빙성 문제에는 상당한 의심이 있다. 즉 이 사찰의 조성년대가 성왕 5년이라고 하지만 사찰의 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석불은 고려양식이 분명하고, 더불어 대조사미륵실기가 고려 원종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고려한다면, 연혁 문제는 오히려 후대에 추가로 기술된 것이 아닌가 한다.
- 이상은 문화재연구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대조사의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보통의 산사에서 보는 일주문, 천왕문, 또는 누각으로 된 출입문등은 없는 구조 입니다.
▼ 지반을 튼튼히 하려고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서 축대를 만들었습니다
▼ 범종을 달아 놓은 범종각도 나름 화려하게 단청을 하였습니다,
▼ 향적당(香積堂)이라는 현판을 걸러 놓은 사찰이 많이 보이는데 보통은 종무소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 부천님오신날이 가까워 오니 사찰에는 등을 많이 달아 놓았습니다. 하지만 등들이 탑을 가리고 있어서 사찰의 중심부를 살펴 보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 그래서 방해물이 없는 온전한 사진을 찾아봤습니다. 이제야 아담한 절의 모습을 봅니다.(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인용 하였습니다)
▼ 원통보전앞의 3층석탑을 가까이서 담아 보았습니다. 고려전기에 만들어졌지만 신라탑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탑신은 2단으로 되어 있는 신라양식의 3층석탑입니다
▼ 이 탑은 원래 지붕돌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에 사찰 주위에서 몸돌을 찾아내어 복원된 탑이라고 합니다 탑의 상륜부와 2층,3층부의 몸돌을 를 보면 옥개석등과는 차이가 나는데, 1975년 복원 할 때 새로 만들어서 수리를 한 것 으로 보입니다
▼ 3층석탑의 뒤에는 원통보전이 있으며 단청의 상태는 화려합니다
▼ 원통보전의 내부를 볼 수 없어서 자료사진을 가져왔습니다. 목조보살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명칭은 부여 대조사 목조보살좌상(扶餘 大鳥寺 木造菩薩坐像)이며 사진은 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원통보전옆에는 불유정이라는 샘물이 있습니다. 이 샘은 물이 부족한 대조사에 예산 성당의 장끄랭깡 신부님께서 물줄기를 찾아주었고, 그자리에 불유정이라는 샘터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샘을 찾아주었던 장끄랭깡 신부님이 고마워서 정만스님은 불기2538년(서기1994년) 불유정기라는 표석을 만들었습니다.
▼ 불유정 옆길로 오르면 명부전이 있습니다만, 역시 문이 닫혀 있습니다. 명부전 뒤로는 그 유명한 석불인 석조미륵보살이 서 있습니다. 언뜻보기에도 커다란 보살상입니다.
▼ 명부전옆길로 잠깐 오르면 산신각이 있습니다.
▼ 원통보전의 오른쪽길로 오르면 용화보전(龍華寶殿)이 보이는데, 앞에서는 별로 이상한 것을 모르겠는데, 뒤에서 보면 벽이 없고, 유리창입니다. 법당안에서 보면 미륵보살상이 보인다고 합니다.
▼ 아마도 용화보전 안에서 보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위에는 알 수 없는 모임의 회원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 대조사 창건설화에 맞지않게 이 석불은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것 이라고 합니다. 충남논산의 관촉사의 석불과 양식은 같다고 하니, 관촉사에도 가봐야 겠습니다.
▼ 손에 쥐고 있는것이 무슨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석불 머리에 보면 길다란 장식이 보이는데, 예전에 폭설로 소나무가지가 부러지면서 머리장식이 파손되어서 새로 복원한 머리장식입니다.
▼ 미륵보살을 일제강점기때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찍은 유리건판사진의 모습인데, 사진을 찍은 시기는 서로 다릅니다. 석불의 모습은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만, 석불 뒷머리 부분을 보면 머리장식처럼 금속물체가 보이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스님의 모습도 지금의 스님의 복장과는 많이 다른듯 합니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1916년~1936년 사이로 보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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