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의 진산인 설봉산 기슭에 있는 영월암 대웅전 뒷편에는 고려시대의 마애석불과,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있습니다.
□ 영월암마애여래입상(映月庵 磨崖如來立像)
-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 2709번길 388(영월암)
- 출토지 : 소재지와 동일
- 문화재 : 보물 제 822호(이천시 향토유적 제 14호)
- 시 대 : 고려전기
□ 영월암석조광배 및 연화좌대
- 소재지 :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 2709번길 388(영월암)
- 출토지 : 소재지와 동일
- 문화재 :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
- 시 대 : 고려전기
▼ 영월암의 대웅전 뒷편에 있는 마애여래입상의 모습입니다.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마애여래입상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에는 정말 불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예 대웅전의 불당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 아무리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정면의 모습과 하반신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가 없어서 포기 했습니다. 다른 사찰의 유명 문화재를 보러 가면 어쩌다가 보는 모습이기는 합니다만, 마애여래부처님을 보러 오시는 다른 분들도 생각해서. 공양단의 높이를 낮추고 차양막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어쩔 수 없어서 자료사진으로 전체의 모습을 봅니다. 대체적으로 신체의 모습은 깊게 새겨서 자세하게 보입니다._자료사진은 문화재청과 이천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우선 크기를 보면 대략 8~9미터 정도 높이의 바위면을 다듬어서 불상을 양각하였는데, 대담한 솜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얼굴의 모습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나이가 지긋한 노승의 후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양손의 모습은 중생들에게 설법을 하는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법의는 한쪽 어깨에 걸려 있고, 옷 주름은 자연스럽게 발목까지 흐르는듯 하게 표현 하였습니다.
▼ 이천시청 홈폐이지에서 인용한 자료사진 입니다.
▼ 1986년의 자료사진입니다. 온전하게 보는 모습이라서 더 좋습니다.
▼ 대웅전 옆길 언덕의 화불전(化佛殿)이라는 보호각 안에는 좌불이 보이는데, 불상을 제외한 영월암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 입니다. 자료사진을 보면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원래 이 자리에 고정적으로 있지는 않았고, 이리저리 많이 옮겨 다녔습니다.
▼ 이제는 불상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말고, 이 자리에 계속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천시청에서 인용한 자료사진입니다. 연도별로 불상이 이리저리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원래의 위치를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 1986년의 모습으로 대웅전 앞에 있습니다
- 1991년의 모습으로 대웅전 앞에서 옆으로 이동 되었습니다.
- 2007년의 모습으로 대웅전에서 현재의 삼성각 아래의 계단옆으로 이동되어 있습니다.
- 2008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상은 원래 큰법당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어느 때 부터인가 법당 밖으로 유랑을 다닌듯 합니다. 연화좌대와 광배는 고려전기의 작품이며, 불상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특히 광배가 넘어져서 크게 깨진 것도 안 보여서 정말 다행으로 생각 합니다. 광배가 넘어지지 않도록 불상에 광배를 밀착시키고 앙련좌대를 약간 비스듬히 놓은 다음, 돌기둥으로 받쳐 놓았습니다.
▼ 지금 부터는 영월암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영월암은 1988년 7월 28일 전통사찰 제50호로 지정되었으며,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 (義湘大師.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하고 산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하나 이를 뒤받침할 만한 실증적 자료가 없어서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월암에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또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영월암은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영월암은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는 사세가 꽤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고려시대의 뛰어난 불교 유물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1531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월암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산에 있는 어떤 사찰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후 조선영조의 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감수한바 있는 신경준(申景濬 1717∼1781)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 북악사가 보이고 있다.
거의 비슷한 때인 1799년(정조23)에 정조의 명에 따라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와 1760년(영조36)에 편찬된 전국읍지인 여지도서 (與地圖書) 에도 역시 북악사라고 이름이 보인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영월암(북악사)은 고려 이후 조선 중기까지 그 사세가 알려지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모습을 역사속에 다시 드러내고 있다. 774년(영조50)에 영월대사(映月大寺) 낭규(朗奎)가 북악사를 중창하고 자신의 법호를 따 영월암이라 절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_이천시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설봉공원에서 영월암까지 오르는 길은 꽤 가파릅니다. 차를 타고 암자 밑에 까지 올 수는 있지만, 설봉공원에 주차하고 걸어 오시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 설봉산영월암(雪峰山映月庵), 달빛이 비추는 암자라고 풀어 봅니다. 영월암은 화성 용주사의 말사이며, 창건은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 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북악사 (北岳寺)라고 하였으며, 조선중기 영조50년(774년)에 영월대사가 암자를 중건 하고 자신의 호를 빌어서 영월암이라고 하였습니다. 암자의 특성상 일주문등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 영월암의 안심당(安心堂) 지붕의 기와를 교체하는 공사가 있어서 대웅전 마당은 혼잡합니다.
▼ 멋진 석등이 보이는데, 전통적인 모양이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창작품으로 보입니다.
▼ 산속 암자의 사정상 넉넉한 자리가 없다 보니, 석조가 있는 자리도 어색하게 보이며, 암자에서 생활용수를 받아서 쓰였을 석조도 그 용도를 다 했는지 연꽃이나 기르고 있습니다.
▼ 삼성각 앞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입니다.
▼ 삼성각의 맞배지붕으로 방풍막이로 덧된 판자에는 보통은 卍자나, 종파의 표식을 그리는데, 영월암은 삼족오(?)가 그려져 있습니다. 삼성당 뒤(붉은선) 바위에는 불상이 있습니다. 보통 삼성각에는 독성, 산신,칠성 이렇게 세분을 모시는데, 영월암의 삼성각은 내부에 벽을 유리창으로 만들고, 창문 너머 암벽에 감실을 만들고, 그안에 독성을 모셨습니다.
▼ 삼성각 유리창 너머로 보면 암벽의 감실 안에 독성이 모셔져 있습니다. 보통은 삼성각 밖에서는 잘 안보 입니다
▼ 삼층석탑에서 내려다 보는 영월암의 모습입니다. 가람의 배치는 서쪽이 터진 ㄷ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가운데가 대웅전(大雄殿), 좌측이 안심당(安心堂), 우측이 아미타전(阿彌他殿)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 영월암에도 삼층석탑이 있는데, 대웅전 앞에 있는것이 아니고, 동쪽의 언덕에 있습니다.
▼ 언뜻봐도 기단석과, 탑신석, 옥개석과의 크기가 조화롭지가 못합니다. 1979년 주지 정해스님이 영월암 주위에 흩어져 있던 석탑 부재들을 모아서 다시 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옥개석 외에는 거의 후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옥개석을 보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 합니다.
▼ 영월암을 둘러보고 나서 내려갈때는 삼형제바위가 있는 길로 내려 갔습니다만, 삼형제바위를 정면으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 삼형제바위 옆에서 내려다 보는 이천시내의 일부분이며, 설봉저수지가 보입니다.
▼ 설봉공원에서 보면 삼형제바위가 작게 보이는데, 망원렌즈로 당겨 찍었습니다
▼ 삼형제바위를 자세하게 보려면 자료사진으로 보는것이 더 좋습니다_이천시청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삼형제바위에서 좀더 내려오면 좁은 공터가 보이고, 길 옆에는 지대석이 보이는데, 석탑의 지대석처럼 보입니다. 이 공터는 아마도 또 다른 법당이 있었던 자리가 있었던듯 합니다.
▼ 팔각의 지대석에 방형받침이 있습니다. 모양은 석탑의 지대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잘 안 보여서 낙옆과 잡풀을 치우고 봤습니다.
- 끝 -
'▣ 역사.문화재.사찰 > 경기지역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천 관고리오층석탑 (0) | 2021.11.01 |
---|---|
이천 관고리석불입상 (0) | 2021.10.30 |
이천 어석리석불입상 (0) | 2021.10.27 |
이천 선읍리입상석불 (0) | 2021.10.22 |
이천 중리삼층석탑 (0) | 2021.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