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 봉산 근처의 문화재를 둘러보다가 대한제국 말기 원주지역의 의병장이었던 "창의대장 민긍호선생"의 묘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 원주에 오지 않았다면, 민긍호선생에 대해서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왕 선생의 묘소에 찾아온 이상 여러 가지 알아볼게 많았습니다

 

안내할 내용이 많아서 그런지 작은 글자로 빽빽하게 인쇄를 해서 알아보기가 좀 어렵기는 합니다.

 

※ 정미년에 봉기한 의병인 창의군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나무위키)

 

1. 개요
정미 7조약 때문에 대한제국의 정규군이 해체되자,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쳐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목적에서 1907년 12월에 의병들이 경기도 옛 양주에서 조직한 연합 의병단체이며 전국(13도)에서 편성되었습니다

 

2. 편성(주요 의병장)
- 대한관동창의장(총대장) 이인영
- 군사장 허위
- 진동창의대장(황해도) 권중희(2,000명)
- 호서창의대장(충청도) 이강년(李康秊)
- 관동창의대장(강원도) 민긍호(閔肯鎬)
- 창의군 총독장 이구재
- 창의군 중군대장 이은찬(6,000명)
- 교남창의대장[2](경상도) 박정빈(경상도)
- 호남창의대장(전라도) 문태수(文泰洙)-100명
- 관서창의대장(평안도) 방인관(方仁寬)-80명
- 관북창의대장(함경도) 정봉준(鄭鳳俊)-70명

 

※ 정미의병의 수는 약 1만 명이었며, 이중 해산군인들이 약 3000명으로 신식무기를 소지하여 전투력은 막강했습니다.

※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의병들의 봉기는 초기에는 국내에서 많이 일어났지만,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이후에는 대부분 만주 등으로 옮겨서 투쟁을 하였습니다._나무위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민긍호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매우 좁은 골목길로 찾아가야 하며, 묘소아래 주택가에 매우 사나운 개가 짖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이니 주의필요합니다.

 

보문사 아래 주택사 근처에 길이 있지만, 붉은선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묘소 아래 하얀 집의 개가 너무 심하게 짖는데 주인께서 개에 대해서 조치를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에는 순종할 수는 없어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민긍호의 계급은 진위대 정교(지금의 상사계급)였습니다.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묘소(關東倡義大將 閔肯鎬 墓所)
한말 의병장 민긍호는 1865년(고종 2년) 서울에서 민치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여흥이다. 인품이 곧고 강했으며 공과 사가 분명하여 부하들에게 존경을 많이 받았다. 

1907년 원주 진위대의 특무정교(현재의 특등상사)로 있을 때, 고종이 일제의 압력을 받아 물러나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이에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원주의 장날인 1907년 8월 5일 병사들을 이끌고 원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항일 무장 투쟁을 펼쳤다.

그는 일본 경찰 분견소 등을 공격해 원주 지역을 차지한 뒤, 충청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과 힘을 합쳐, 충주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경기도 양주에서 이인영이 일제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전국 의병 연합 부대로 13도 창의군이 새로 생기자 관동 창의군 대장으로 뽑혔다.

그는 강원·충청·경기도 일대의 의병 부대와 연합해 일본군과의 100여 차례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08년 2월 29일 원주 치악산 강림촌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용감히 싸우다가 붙잡혀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는 일본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근대 민족 운동의 횃불이 되었다. 나라를 세우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봉산동 민긍호 의병장 묘역 충혼탑은 1954년 원주 제2경비사령부로 부임한 독립운동가 출신 권준(1895~1959) 장군이 민긍호 의병장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곳으로 묘를 이장하면서 건립했다._국가보훈부에서 인용

 

▼ 민긍호 선생의 어머니 아들과 가족들은 만주로 피신하여 안중근의사의 도움 속에서 지냈으나, 하얼빈 의거 때 급히 러시아로 갔으며, 이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 정착하였습니다.

 

- 좌측사진

오른쪽 부터 민긍호의병대장의 아들 민영욱과 부인 민긍호대장의 부인, 민영욱의 딸

 

-우측사진(데니스 덴)

소치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데니스 덴이 민긍호 의병대장의 외고손자였는데, 2018년 고향(카자흐스탄)에서 강도들과 몸싸움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러시아, 러시아 주변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많은 독립투쟁가들의 후손들을 보면,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완전한 독립은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족을 배반하고 친일을 해서 떼돈과 권력을 쥐고 살았던 사람들은 대대손손 잘 살고 있는데, 독립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타국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수많은 그 후손들은 지금도 타국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 충혼탑은 1954년에 권준장군이 세운것으로 보이며, 앞쪽석조물은 국가보훈부에서 묘역정비 때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 민긍호의병대장과 원주의 해산된 군인들, 의병들이 함께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고 있는 그림입니다(원주역사박물관)


▼ 민긍호 대장의 기념물은 원주치악체육관앞도 있습니다.

 

▼ 이 충혼탑은 1954년에 민긍호선생의 묘소를 이전할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새겨진 글씨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 민족영웅 의병대장 민특무긍호공 충혼탑』이라고 새겨 있습니다.

 

※ 민긍호의병대장의 묘소를 이전하고 충혼탑을 세운 권준장군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권준장군의 생애를 보면, 정부권력기관장으로 들어가서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독립투쟁가를 이데올로기로 씌워서 반역자로 몰아가는 이 나쁜 세상에 참군인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분이십니다.

 

▼ 권준장군의 자료를 나무위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오른쪽 흉상은 대구신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권준장군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의열단의 단원이자 중국군 장교로 항일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의열단의 김원봉과 같은 독립투쟁을 하였습니다
국군 50사단의 초대 사단장이었으며, 독립유공자 권태휴선생은 그의 장남이며, 제2대 국가보훈부장관 강정애는 손주 며느리가 됩니다.


▼ 묘소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에 따라서 담장을 두르고, 묘에는 병풍석을 둘렀는데, 태극기문양인 태극 4괘인 건, 곤, 감, 리를 무궁화를 사이에 두고 하나씩 배치하였습니다

 

※ 민긍호대장의 묘소는 원래 평원동에 있었으나, 1939 흥업면 무실리로 옮겨졌다가 1954년 북부지구 경비사령관 권준장군에 의해 지금 봉산동으로 이전하였으며, 충혼탑도 세웠는데, 권준장군이 보기에 흥업면에 있는 민긍호대장의 묘소가 부실하게 보였나 봅니다.

 

▼ 묘지석에는 『민족영웅의병대장민특무긍호공지묘』, 우측(살신성인), 좌측(정신불사)

 

▼ 고층아파트만 아니면 아주 멀리까지 보이겠지만, 충혼탑은 변함없이 민긍호대장의 혼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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