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56대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사당이며, 미륵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원주는 경순왕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귀래면의 유래를 봐도 경천묘가 귀래면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라 경순왕이 천년 사직을 고려에 바치고 용화산(미륵산) 정상 절벽에 거대한 미륵불상을 조성하여 용화세계 건설을 발원하였다는 전설이며, 귀한 분이 오셨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경순왕은 신라를 태조 왕건에게 넘기고, 원주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으로 들어가 학수사와 고자암을 세웠다. 그때 한 화승이 그린 경순왕의 영정을 고자암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이 영정각의 시초였고, 영조 13년에 이르러 경천묘라 이름 붙였다 한다. 원주시는 18세기 말부터 행방이 묘연해진 경순왕의 영정을 모사하여 다시 제작하고, 경천묘를 복원시켰다. - 원주시관광 홈페이지 |
※ 주소는 원주시 귀래면 미륵산길 200
▼ 2006년 9월에 복원된 경천묘(敬天廟)
※ 원주역사박물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시대 : 고려초 건립, 조선 시기에 거듭 중수, 2006년 복원,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전각
◇내력 및 유구현황 : 경천묘(敬天廟)는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 ?~979)의 영정(影幀)을 모신 묘우(廟宇)이다. 경순왕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8 세 손이며,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말 927년 경순왕은 왕위에 올랐으나 신라는 이미 사직을 보전할 힘이 미약한 상황이었으므로 935년(경순왕 9년) 이미 운명이 다한 신라의 형편을 신하들과 논의한 끝에 고려에 넘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 후 경순왕은 두루 다니다가 이곳 용화산(龍華山,현 미륵산)의 빼어남을 보고 그 정상에 올라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그 아래에 학수사(鶴樹寺)와 고자암(高自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순왕이 돌아가시자 왕을 추종하던 신하와 불자들이 고자암에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받든 것이 영정각(影幀閣)의 시발이었다.
◇양식적 특성 : 고려 중기 이후 전각은 무너지고 인적도 끊어졌다가 조선 초에 이색,권근 등에 의해 전각이 다시 지어졌다. 숙종 때 원주목사 김필진(金必桭)이 새로 초상화를 그리고 전각을 지어 모셨으나 화재를 당했고, 영조 때 재건되면서 임금이 영정각의 명칭을‘경천묘(敬天廟)’로 바꾸었다. 그 후 경천묘는 다시 불태워졌으나 경순왕이 머물렀던 유래에 따라 신라 문화를 지켜낸 왕의 충정을 기리고자 원주시가 2006년 9월 이곳 미륵산 아래에 경천묘를 복원하였다. 외곽의 진입문은 평삼문으로 되어 있고 사당 진입문은 솟을 삼문으로 되어 있는데 당우는 조선후기 익공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맥락을 지닌 경천묘가 경주 김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경천묘가 경남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686에 있다.
▼ 경순왕의 사당인 경천묘까지느 두 개의 문을 거쳐야 합니다. 먼저 경천문입니다
▼ 경북안동에도 경천묘가 있습니다.
▼ 두번째 문이 신문입니다
▼ 경천묘에는 하나의 재실(동재)만 있습니다
[자료사진:연합뉴스] 매년 가을에 한번 올리는 추향제의 모습입니다.
▼ 경순왕의 영정
▼ 사당앞의 모습입니다.
▼ 경기도 연천군의 DMZ내 경순왕릉이 있는데, 조선왕릉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 끝 -
'▣ 역사.문화재.사찰 > 강원지역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주_거돈사지 전시관 (0) | 2024.12.07 |
---|---|
원주_주포리 부도 및 삼층석탑 (0) | 2024.12.06 |
원주_비두리 귀부와 이수(原州 碑頭里 龜趺, 螭首) (0) | 2024.12.02 |
원주_부흥사지 석탑재 (0) | 2024.12.01 |
원주_창의대장 민긍호 묘소 (0) | 2024.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