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는 3대 폐사지가 있는데, 흥법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입니다. 공통적으로 남한강과 섬강을 끼고 있어서 배를 이용한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며, 모두 신라말기~고려시대에 번성했다가 조선시대에서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이후에는 폐사(廢寺)되어 화전민들이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마을을 형성하며 살았습니다.

거돈사지 전시관은 거돈사지의 총 4차에 걸친 발굴조사 후에 발굴유적과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여 신라와 고려시대의 불교증흥기에 왕족과 고승들의 관계와 임진왜란과 여러 번 전란에 따라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버티기 어려웠던 폐사된 유명사찰의 현황등을 복합적으로 구성하여 폐교된 분교의 교실에 전시관을 마련하여 거돈사에 대한 제반 내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 거돈사지 전시관은 거돈사터 바로 아래 부론초등학교 정산분교(폐고)터에 학교 교실을 그대로 이용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 정산분교는 거돈사지 주변에 담배농사등 농작물을 가꾸며 살아가던 농가의 아이들을 위하여 1960년 초에 개교하였으나, 30여 년이 지난 1995년 폐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 정산분교 운동장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거돈사의 들머리를 안내하기 위해 세우려고 사기막골에서 돌기둥을 옮겨 놓았다고 하는데, 나머지 한 개는 옮겨오지 못하고 사기막골 산속에 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법천사지 당간지주와 거돈사지 당간지주의 전설...
당간지주를 세우는 일을 맡았던 한 남매가 있었다. 누나는 법천사 당간지주를 남동생은 거돈사 당간지주를 세우게 되었다. 옛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누나는 요령을 부렸다. 남동생이 당간지주를 옮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묻자 누나는 힘이 센 장정을 많이 구하여 힘쓰는 음식을 잔뜩 먹여야 하는데 콩을 볶아서 먹이면 된다고 하였다. 남동생은 누나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였다. 장정들이 볶은 콩을 많이 먹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니 모두 탈이 나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당간지주를 다 옮기지 못하고 일부만 옮겨오고 다른 한 개는 사기막이라는 동네에 남아 있다.

 

▼ 돌기둥만 옮겨 놓고 다듬지도 않은 상태로 운동장 한편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는 정산분교 학생들이 걸터앉아서 쉬던

기다란 의자였을 것입니다만, 짝이 없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기둥은 무슨 사연을 담고 있을까?

 

전시관 관리자이신 박우철선생님의 옛날 이야기에 따르면, 사기막골은 거돈사지에서 3~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산속에는 아직도 옮겨오지 못한 당간지주 한 짝이 남아 있으며, 산속에서 절터까지 당간지주를 옮겨오는 기간은 대체로 3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 전시관 입구의 문에 붙어 있는 관리자 박우철선생은 전시관의 제반 시설들을 관리하고 계신분이신데, 정산리에서 이장을 하셨으며, 이곳 정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거돈사지에서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셨었습니다.

옛날 거돈사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현지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를 많이 알려주셨으며, 매주 목요일에 문화재해설사분들이 쉬는 날에만 하루 해설사를 한다고 합니다.


▼ 거돈사지 전시관에 들어서면 전시관의 역활, 전시관의 공간구성등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전시관은 모두 네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 전시실에서는 고려불교가 거돈사를 통해서 남긴 역사적 이야기.

제2 전시실에서는 옛 거돈사의 모형을,

제3  전시실에서는 명사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네 번째 방은 북카페로서 전시실을 모두 둘러본 후에 잠시 휴식을 하는 공간입니다

 

▼ 1912년에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촬영반들이 찍은 거돈사지의 모습이며, 이미 오래전부터 농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돈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안락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이었는데, 864년에 지증 도헌이 '거돈사'로 사찰이름을 바꾸고 중창하였습니다.


▼ 거돈사지는 창산 김정기박사와 한림대학교 사학과 학생들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해방이후 대부분의 중요한 유적발굴을 이끌었습니다.

 

▼ 거돈사지의 발굴은 1989년에 1차 발국조사 부터 1992년 4차 발굴까지 총 4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발굴조사 면적은 7500평이었습니다.

 

▼ 발굴조사후 거돈사의 축조과정을 추정해 보면, 금당의 대웅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처럼 단층구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거돈사지는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진행된 4차례의 발굴조사에서 금당, 강당,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 1993년에 찍은 거돈사지 사진을 보면, 민가들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발굴하는 과정에서 부지를 매입하고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이 끝났을 때로 보입니다.


▼ 제 1 전시실은 신라시대의 "안락사"가 거돈사로 이름을 바꾸며, 제2의 전성기를 통해서 크게 번성하였으며, 고려불교가 거돈사를 통해서 남긴 역사적 이야기를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경북문경의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탑비에 따르면, 신라시대 때 창건되어 있던 '안락사'를 경문왕의 누이였던 장옹주 주선으로 지증 도헌이 거돈사로 개명하면서 거대한 철불을 조성하고, 삼층석탑을 건립하였습니다

※ 1장 6척은 4.8m 정도 됩니다.

※ 지증 도헌은 879년 경북문경의 봉암사를 창건하였습니다.

 

▼ 지증 도헌(지증대사)의 지증대사탑은 문경 봉암사에 있습니다

 

▼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의 이해

 

▼ 고승의 지위 승계단계


▼ 고려시대의 대사찰의 이름 및 위치인데... 이렇게나 많았던가요???

 

▼ 와편들과 도자기들이 몇 점 보이는데, 생각 외로 발굴유물이 몇 점 안 되어 보입니다.


▼ 제2 전시실에서는 거돈사를 복원한 모형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 거돈사의 금당 규모에 관심이 많았을 것인데, 형태는 자료마다 단층이나, 2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현재 금당지와 불좌대가 남아 있는데 주초석들의 배치상태로 보아 큰 규모의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불좌대의 구조와 크기로 미루어보면 금당은 2층 건물로, 내부는 층의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으로 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 자료에는 금당이 2층식이며, 내부는 통층이라고 하는데, 모형에는 단층으로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복제하였습니다.


▼ 세 번째 방인 명상의 방에서는 좌불의 대좌모형만 있는데, 기록에 대형철불이 있었다고 해서, 철불좌상을 얹어 보았습니다만, 대형석불이라는 자료도 있습니다.

 

거돈사의 불상대좌가 이렇게 된 것은 대형화재로 화강암 석재가 고온에서 터지는 현상으로 알 수 없는 형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서 금당이 불에 탈 때  대좌가 크게 훼손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불상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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