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돈사지는 원주시 거론면 정산리에 있으며 한계산 기슭을 안고 펼쳐져 있는 신라 말기에 창건되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중기에 폐사된 거돈사의 옛 터입니다
거돈사는 창건기, 증흥기, 폐사기로 볼 수 있는데, 거돈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차 중흥기는 '안락사'였던 사찰을 864년(신라 경문왕 4년) 지증 도헌이 '돈오 속에 살겠다'라는 뜻을 가진 거돈사로 이름을 바꾸어 중창하고, 경문왕과 경문왕의 누이인 단의 장옹주의 후원으로 사세(寺勢)를 크게 키웠습니다
2차 중흥기는 원공 지종이 89세인 1018년 4월(고려현종 9년) 하산하여 보름여 만에 입적하고, 고려왕실의 지원하에 이름을 떨쳤지만, 조선중기 임진왜란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돈오(頓悟)는 단박에 깨닫는다는 뜻이며, 수행을 통해서 점진적인 깨닫는다는 점오(漸悟)와 대비되는 불교용어 입니다.
한림대학교박물관에서 1989년~1992년까지 4 차례 걸친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되었다가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절터에는 중문터, 삼층석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불좌대의 구조와 크기로 미루어보면 금당은 2층 건물로, 내부는 층의 구분이 없는 통층(通層)으로 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산지 가람인 거돈사의 가람배치는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이며, 1968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뒤, 1982년 토지매입을 시작으로, 1984년 정비 보수공사와 1989∼1992년에 한림대학교박물관에서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 자료는 지역N문화, 원주역사박물관, e뮤지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 신라시대의 탑이라고는 하는데, 고려초기의 탑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자료사진을 보면, 현재 남아 있는 중문지를 지나면 세운 3층 석탑이 있고 바로 뒤에 기단 위에 초석이 있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터가 있고, 강당지는 초석은 없고 터만 남아 있습니다.
▼ 191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모든 문화재, 생활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사진기록을 만들었는데, 이때 찍은 거돈사지의 삼층석탑과 마을의 모습입니다.
▼ 1912년에 촬영된 유리건판사진이며, 특별하게 도굴된 흔적 없이 멀쩡한 모습입니다.
▼ 1912년의 거돈사지 삼층석탑(조선고적도보)
▼ 삼층석탑은 석축을 쌓고 탑신을 지탱하는 지대석 밑에는 흙과 돌을 섞어서 다진 후에 기단부를 올렸습니다. 보통은 적심석을 깔아서 탑을 지탱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축조양식은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인데도 면석에 팔부신중을 새기지 않았습니다.
▼ 석탑 앞에 놓여 있는 배례석(拜禮石)이라고 하는데, 보통 석탑, 불상, 승탑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용도는 향(香)을 공양할 때 향로(香爐)를 올려놓는 돌 받침대입니다.
배례석이라는 용어보다는 향로대(香爐臺)가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배례석을 연구하신 대구 도림사 종인스님은 봉로대(奉爐臺)라고 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 금당의 중앙부에 2m 정도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시던 불상 대좌가 남아있는데, 사방에 지대석을 돌린 것으로 보아 불상은 이미 금당이 짓기 전에 먼저 불상을 조성한 후 금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상의 크기가 일반 단층목조 건축으로는 불상 높이를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므로 최소한 2층이나 3층의 구조물로써 내부는 통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 거대한 초석이며, 금당에는 수십 개의 초석이 박혀있어 거돈사 금당의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 금당지에 보면 알 수 없는 돌과 부서진 돌조각이 보이는데, 언듯 봐서는 무슨 용도인지는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왼쪽의 돌조각은 불상대좌인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금당이 불탈 때 고온에서 화강암이 열폭주현상으로 깨져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거대한 철불(석불이라는 자료도 있음)이라는 자료가 있어서 대좌 위에 합성을 해 보았습니다
왼쪽의 거대한 돌은 초석이며 가운데에 사각 구멍이 보이고, 무슨 바위인지 알 수 있는 자료나 안내문은 없습니다만, 거돈사지전시관을 관리하시는 박철우선생께서는 아주 오래전에 동네에서 연자방아를 만들기 위해서 지주석을 뒤집었으나, 완성하지 못해서 방치하였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 강당터 옆에는 그동안 발굴하면서 수집된 유구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 강당터를 보면, 동서로 길게 일자형 건축물이 들어섰을 것으로 보이는데, 초석은 없어졌습니다. 아마도 밭을 일구면서 초석은 빼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 강당지의 계단은 자연석으로 쌓아서 금당의 계단과는 다르며, 강당지에는 초석은 없습니다.
▼ 강당터에서 바라보는 승방지입니다.
▼ 승방터에서 바라보는 원공국사의 승탑이 보입니다.
▼ 처음에는 중앙박물관에 있는 원공국사승탑이 옮겨져 왔나, 했는데, 복제품을 새로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 지증이 1018년에 거돈사에서 입멸 후 현종으로부터 국사 원공으로 추증된 그는 탑비와 함께 비의 서쪽 기슭에 부도가 건립되었습니다.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와다(和田)가 서울의 자기 집으로 옮겨간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거돈사지에 있는 승탑은 복제품입니다.
▼ 원공국사승탑에서 바라보는 금당과 삼층석탑입니다.
▼ 거돈사터 동쪽에는 원공국사탑비가 세워져 있으며, 1025년에 세워졌으니 2025년이 되면 탑비가 세워진지 10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비문은 당시 대표적 문인인 최충(崔沖)이 짓고 김거웅(金巨雄)이 썼습니다.
▼ 원공국사탑비를 보면 작은 깨짐이나, 갈라짐, 변색등이 보이지 않는데, 1000년 동안 이렇게 무사히 전해져 온 것이 무척 대단하게 보입니다.
▼ 원공국사 탑비의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를 보면 등에서는 연화와 만자를 새겼으며, 머리는 거북이의 머리와는 사뭇 다른 모양으로 일반덕인 귀부와는 많이 달라 보이는데, 용머리같이 생겼습니다
▼ 용두는 뺨의 측면에 지느러미와 유사한 비늘이 있는데 어룡형(魚龍形)이라고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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