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우표
※ 발행 : 2011년 6월 10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신흥강습소가 세워졌다.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라고 했지만,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인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연 것이다.

1910년 일제가 강제한 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이회영과 이상설, 이동녕 등 애국지사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뜻을 모았다. 

 

이회영은 일제 치하에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6형제의 뜻을 모아 1910년 말 집안의 재산을 정리해 6형제 가족을 이끌고 만주 서간도로 이주하였고 이동녕, 이장녕과 안동의 이상룡, 김동삼 일가도 서간도로 망명했다.

 

당대 최대 거부 중 한 사람이었던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기부로 신흥무관학교는 1912년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에 교사를 짓고 이전하게 된다. 3·1운동이 있은 후 국내외 각지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자 신흥무관학교는 삼원포 고산자에 건물을 새로 지었으며, 일본군 장교였던 지청천 등이 교관으로 오면서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러시아와 중국에 있던 다른 독립운동 기지와 달리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졸업생들은 청산리전쟁을 비롯하여 이후 무장독립운동에서 커다란 공을 세우며,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자 핵심 간부로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의열단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는 우리 독립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신흥학우단’의 모습을 담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통해 그간 우리에게 잊혀져왔던 신흥무관학교와 독립 운동가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100년 전 그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지키려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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