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독립투쟁가들의 우표를 년도별로 수집하였습니다
※ 명칭 : 독립투쟁가(안중근,유관순) 우표
※ 발행 : 1982년 10월 8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체신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인물을 소재로 한 보통우표를 발행하여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자, 다음과 같이 인물 우표 2종을 발행한다.
1. 안중근(安重根)
안중근(1879-1910)은 조선 말 황해도 출신의 항일 우국 지사로서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학문에 접했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분개하여 연해주에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9년 10월 우리나라 침략의 주도적 인물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권총으로 이등박문을 명중시키고 체포되었다.
일본 관헌에 넘겨진 그는 끝까지 항변하다 여순(旅順)에서 재판을 받고 1910년 3월 26일 사형당하였다. 글씨에 뛰어나 많은 유필이 있고,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2. 류관순(柳寬順)
류관순(1902-1920)은 충남 천안 출신의 항일독립투사로서 1918년 이화학당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엔 삼일운동에 참가하였다. 총독부에 의해 학교가 휴교 되자 귀향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여, 천안ㆍ청주 등지의 여러 학교, 교회 등을 방문하면서 시위 행렬을 지휘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대에 의해 부모가 피살당하고 자신도 체포당하였다.
서울로 이송된 류관순은 7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 계속 독립만세 등으로 동지들을 격려하며 적에게 항거하다가 갖은 고문 끝에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 명칭 : 독립투쟁가(김구선생) 우표
※ 발행 : 1986년 6월 10일(1차), 1986년 12월 10일(2차)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체신부에서는 우표의 액면을 체계화하여 우편 이용자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국내 등기우편 기본요금인 450원권 보통우표를 새로이 발행한다. 이 우표는 독립운동가나 정치가였다는 것 보다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차원에서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선생의 도안으로 택하였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김구는 18세에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갑오동학란 때는 해주 동학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3ㆍ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우리나라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 경무국장, 내무국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였다. 1940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으며 광복군을 조직,조국의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항쟁을 전개하였다.
8ㆍ15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한 그는 민주의원 총리, 비상국민대회회장, 한국독립당 당수로 있으면서 통일 자주독립노선을 지향하여 1948년 4월 김 규식과 함께 남ㆍ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오다가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京狡葬)에서 암살당하였다. 1962년3월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 명칭 : 독립투쟁가(윤봉길의사) 우표
※ 발행 : 1992년 4월 29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1932년 4 월 29일 상해 홍구(虹口) 공원에서 일본제국주의 무리에게 폭탄을 던진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한국인과 세계민중의 가슴을 영원히 진동시킬 불타는 민족의지였으며, 중화민국의 고(故)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이 못한 일을 한국이 청년 한사람이 해냈다""라고 크게 감동했던 장거(壯擧)였습니다.
이날 세계에 떨친 우리의 독립의지는, 당시 한민족과 소원한 상태에 있던 중국을 움직여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후 1933년에는 중국의 낙양군관학교에 광복군 특별반이 설치되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는 등 조국광복의 서광이 비쳐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윤봉길의사를 비롯한 여러 선열들의 순국의지와 숭고한 희생정신은 우리민족 본래의 근면성과 우수성에 빛을 더하여 적은 부존자원과 6.25전쟁의 폐허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놀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으며, 민족통일에 대한 우리의 책임감을 더욱 깊게 해 주고 있습니다.
체신부는 윤봉길의사 의거 60주년을 맞이하여 조국 광복에 기여한 큰 업적을 되새겨 보며 오늘날 지역주의와 국가이기주의 사조가 팽배하는 혼란속에서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먼저 민족정기가 확립되어야 함을 널리 인식시키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 명칭 : 독립투쟁가(이봉창의사) 우표
※ 발행 : 1992년 10월 12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제 나이 이제 서른 한살입니다. 앞으로 저는 서른 한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이봉창의사가 김구선생께 토로한 이 말은 우리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이란 미명(美名) 아래 동양평화를 유린하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는 한, 중 갈등을 야기하여 중국정부로 하여금 상하이에 있던 우리 나라 임시정부활동에 제약을 가해왔습니다. 이때문에 침체에 빠져있던 우리 임시정부는 1932년1월 8일 일본육군관병식(日本陸軍觀兵式)에 참석하러 가던 히로히토 일본왕의 무리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의사의 의거로 새로운 활력소를 얻게 되었으며 전세계에 한민족의 용기있는 민족적 역량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와 더불어 어려울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회생정신은, 오늘날 일부 사회계층에 만연되어있는 개인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추진되고 있는 블록경제체제의 구축에 따른 총체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체신부는60년전 이 의사가 보여주었던 용기와 슬기가 온 민족의 가슴에 요원의 불길처럼 펴져서, 우리가 처해있는 국내, 외적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국민정신으로 승화되기를 기대하면서 이봉창의사 순국60주년 우표를 발행합니다.
※ 명칭 : 독립투쟁가(윤봉길의사) 우표
※ 발행 : 2008년 6월 20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난다는 결심이었다.” - 1930년 10월 18일, 중국 칭다오에서 보낸 윤봉길 의사의 서신 중에서.
일제 치하에 있던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고무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을 거부한 채 사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스스로 신학문을 공부했던 당찬 소년이었다.
야학과 독서회를 운영하고 농촌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농민을 위한 책을 쓰는 등 농민계몽과 농촌부흥을 위해 농민운동가로 활동했던 그는 23세가 되던 1930년 3월, 나라와 겨레를 위한 보다 더 큰 뜻을 세우고 중국으로 향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을 만난 청년 윤봉길은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밝히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거행되었던 일본의 전승기념 축하식에서 일본군의 수뇌들이 서 있던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지게 된다.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 민족의 가슴 아픈 현실을 국내외에 알리고 침체에 빠져있던 항일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순간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25년의 짧은 생을 뒤로 한 채 일본 가나자와시 교외에서 총살형을 당한다. 이는 조국을 위해서 강의(剛毅)한 사랑을 바치겠다던 서신을 띄운 지 이 년여 뒤의 일이다.
윤봉길 의사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지금, 조국의 아들로서 그가 택한 숭고한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보며 윤봉길 의사의 모습과 한인애국단의 선서문을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 명칭 : 독립투쟁가(안중근의사) 우표
※ 발행 : 2010년 3월 26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일백 번을 꺾어도 굴함이 없이 ∼ 중략 ∼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안중근의사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 중에서
1879년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개화론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실력 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 문명개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을 품고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그
러나 한국인에 대한 교육을 탄압하는 통감부 통치하에서는 실력양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해외에 나가 의병을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꾀하게 된다. 1909년 3월, 안중근은 동지 11인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써 태극기에 ‘大韓獨立’을 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자는 단지동맹을 맺었다.
그 해 10월, 한국의 자주독립권을 박탈한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듣고 안중근은 거사를 도모하게 된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들어서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었다. 역사적인 의거가 행해진 순간이었다.
체포 후 사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날까지 그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 안중근 의사는 그의 유묵에 남겨진 말처럼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로 민족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년을 기리며 안중근의사의 손도장과 태극기에 쓴 혈서를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 속 무명지에는 안의사의 유언 내용이, 태극기에는 감옥에서 작성한 ‘한국인 안응칠(안의사의 아명) 소회’의 내용이 미세문자로 표기되어 있다.
※ 명칭 : 독립투쟁가(남자현,주시경선생) 우표
※ 발행 : 2016년 6월 1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평화·번영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수많은 영웅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바친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국어로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한 주시경도 그 중 하나이다. 이에 우정사업본부는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호국영웅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디자인하였으며, 남자현 편에는 남자현 어록비가, 주시경 편에는 국립한글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말모이 원고가 배경으로 사용됐다. 남자현(1872~1933)은 남성도 수행하기 힘든 무장투쟁을 하며 평생을 바친 여성 독립운동가로,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린다.
남자현은 을미사변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은 일본에 대항하여 나라를 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46세의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만주 무장 독립운동 단체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 작전, 일송 김동삼 선생 구출 작전 등에 참여했고, 국제연맹 조사단에 자신의 손가락 마디를 잘라 혈서와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주만주국일본 전권 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사살하려다 체포되었고, 혹독한 고문을 받아 결국 순국했다.
주시경(1876〜1914)은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신학문을 공부하며 문명 강대국은 자국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서재필박사를 만나 1896년 4월 국문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했고, 그 후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도와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 쓰기를 실천하며 근대 민족운동에 이바지했다.
또, 국문동식회를 조직해 한글 연구와 보급의 초석을 마련했으며, 협성회와 독립협회 등에 참여해 국권 회복 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학생용 교재인 대한국어문법과 초등 국어 교과서 국문초학 등 한글 저서 출간과 보급 활동으로 국민 계몽에도 힘썼다.
※ 명칭 : 독립투쟁가(이회영선생) 우표
※ 발행 : 2017년 4월 21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1867. 3. 17. ~ 1932. 11. 17.)은 국외 항일 운동의 전반에 참여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로 기억되는 독립운동가이다. 우정사업본부는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당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가인 백사 이항복 가문의 후손으로, 열린 사상과 선각자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다. 우당은 1898년 독립 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 계몽 운동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운동을 펼치다가 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또한 만주에 한국 최초의 신학문 민족 교육 기관인 서전서숙 설립에도 참여했다.
1906년에는 민족 교육 계몽 운동과 무장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던 신민회의 창립 구성원으로 활동했으며, 헤이그 특사 파견을 주도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우당과 여섯 형제는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현재 가치로 6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가지고 온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그리고 1911년 이주 동포 정착을 돕고 농업을 지도하기 위한 경학사를 조직하고, 같은 해 독립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해 독립 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다. 우당은 1918년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하여 고종의 국외 망명을 계획했으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베이징으로 다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임시 정부의 파벌과 분열상을 보고 신채호와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가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하고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에는 중국 각지에 있던 동지들을 상해로 집결시켜 항일 구국 연맹을 조직했고, 1932년 중국 국민당과 교섭해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해 11월, 만주에서 한중 연합 항일 투쟁을 지도하기 위하여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가던 중 비밀이 누설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다 65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명문가 자손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 모든 것을 바친 우당 이회영 선생. 그의 숭고한 정신은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명칭 :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우표
※ 발행 : 2018년 8월 6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곳곳에서 펼쳐졌습니다.
우정사업본부는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소개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준 열사 기념관 (네덜란드 헤이그 바헨스트라트 124)은 이준 열사가 구국 외교 활동을 펼치며 머물다가 순국한 장소입니다. 1907년 광무 황제(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해 을사늑약 의 불법성을 국제 사회에 알려 대한 제국의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와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본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준 열사 기념관 은 세 분의 한국 특사가 투숙했던 융 호텔을 복원하여 설립한 곳으로, 순절한 이준 열사의 구국 외교 활동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얼빈 안중근 의사 의거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구내)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던 곳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 앞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가 권총을 발사한 지점과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가 표시돼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중국 상하이시 훙커우구 사천북로 2288호 루쉰 공원 내)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결행한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 세워진 기념관입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중국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승전 기념식을 거행하는 일제 침략자들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결행하였습니다.
의거의 현장인 루쉰 공원 내에 마련된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비와 정자 형태의 윤봉길 의사 기념관 매헌은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미국 로스앤젤레스 웨스트 제퍼슨가 1368)은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중심 단체로 무형(無形)의 임시정부 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던 대한인 국민회 총회관 건물입니다.
대한인 국민회는 1910년 하와이의 한인 합성 협회와 북미의 공립 협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미주 지역 최고의 중추기관이며, 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1936년 총회관 건립을 추진하여 1938년 4월 완공되었습니다.
※ 명칭 : 독립투쟁가(홍범도장군) 우표
※ 발행 : 2018년 10월 12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홍범도장군(1868~1943)은 19세기 말 일제에 항거해 일어선 항일의병장과 대한독립군 사령관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50여 년간 조국 해방을 위해 무장 독립투쟁을 펼친 전설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입니다.
평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홍범도장군은 조실부모한 후 머슴살이를 하며 힘든 유년을 보냅니다. 10대 중반 나이를 속여 가며 군에 입대했지만 부정부패로 가득한 군의 부조리를 보다 못해 탈영하고, 뛰어난 사격술을 인정받아 의병항전에 참여하기 전까지 산포수로서 안정된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1907년 일제가 총포와 화약류 단속법을 시행하며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 항일의병을 일으켜 큰 승리를 거둡니다. 날으는(나는) 홍범도 라는 별명을 얻으며 눈부신 의병 활동을 펼치던 그는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며 일제 항거 활동을 합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으며, 특히 1920년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전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최고 지휘관으로서 일본 정규군을 격퇴합니다. 일제의 대대적인 보복전에 대비하여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함께 흑룡강 국경 지대로 이동한 그는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로 추대됩니다.
그러나 한국무장독립투쟁 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자유시사변으로 항일전 재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연해주에서 집단농장을 운영하며 한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씁니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고, 그곳에서 원로로 활동하다 1943년 75세의 나이로 서거합니다.
백성에게는 추앙받는 항일투사였던 홍범도장군. 이번 기념우표 발행이 의병활동부터 독립군까지 항일투쟁의 역사와 함께해온 그의 독립정신을 되새길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명칭 : 여성독립투쟁가 우표
※ 발행 : 2019년 3월 15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에는 남녀 가릴 것 없이 하나 된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정사업본부에서는 조국 독립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소개해 그분들의 희생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안경신(1888.7.22.~알 수 없음)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 애국부인회 를 조직하고,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섭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쳤습니다. 무력적인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1920년 미국의원동양시찰단 방문에 맞춰 광복군 결사대와 함께 평남도청과 평양부청,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짐으로써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김마리아(1892.6.18.~1944.3.13.)는 정신여학교 교사를 지내다 일본 유학을 한 뒤 1919년에 귀국,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북돋웠습니다. 여성 항일 운동을 위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8년 근화회를 조직해 한인의 애국심을 일깨우고 서방 국가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애썼습니다.
권 기옥(1901.1.11.~1988.4.19.)은 평양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채를 판매하고 군자금 모금 활동에 나섰으며,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공작을 펼쳤습니다. 1920년 9월 일본 경찰을 피해 상하이로 탈출한 뒤, 임시정부에서 이승만, 안창호 등과 활동했습니다. 특히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중국군에서 10여 년간 복무 하며 항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박차정(1910.5.7~1944.5.27)은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했으며, 광주항일 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확대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1 930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무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서 활약했으며,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단을 조직하여 후방 공작 활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라디오 방송으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고 알리는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글을 투고하여 항일운동 의지를 심어주고자 노력했습니다.
※ 명칭 : 유관순열사 순국 100주년 우표
※ 발행 : 2020년 9월 28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3·1운동의 상징이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혼의 표상 유관순 열사는 조국의 독립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에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유관순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정사업본부는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괄괄한 성격에 성경 구절을 한 번 들으면 줄줄 외울 만큼 총명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교적 전통과 충효사상을 깨우치고 기독교 바탕의 신문화를 배우면서 민족정신을 키워갔습니다.
유관순이 8살이었던 1910년, 우리 민족은 치욕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강한 확신과 의욕을 가지고 있던 사애리시부인이 영민한 유관순을 주목하였고, 1915년에 유관순은 교비생으로 이화학당(이화여고·이화여대의 전신)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며 나라 사랑의 정신을 더욱 굳게 다졌습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광무황제)의 서거로 온 국민이 슬픔에 빠졌고, 민족대표 33인은 이 사건을 독립운동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마침내 3월 1일, 전국에서 몰려온 애도행렬 앞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발표로 3·1운동은 시작되었고, 2천만 민중의 한목소리는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라면 국내외 어디서든 울려 퍼졌습니다.
이화학당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유관순 역시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와 함께 ‘5인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간 유관순은 1919년 4월 1일에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었습니다.
수감 중에도 옥중 동료들을 격려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은 그때마다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결국 이듬해 9월 28일에 서대문 형무소 감방에서 순국했습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 앞에 태극기를 손에 쥐고 맨몸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맞섰던 유관순 열사의 생애는 순국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동을 전합니다. 기념우표에는 어린 나이에 만세운동을 이끌다 일본 헌병에게 잡힌 후 그들에게 직접 일갈한 유관순 열사의 한마디가 쓰여 있습니다.
굴하지 않는 용기를 남기고 떠난 유관순 열사를 이번 우표와 함께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 명칭 : 대한독림에 헌신한 외국인 우표(1)
※ 발행 : 2022년 8월 12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우리 역사 속엔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지지했던 외국인들 덕분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그 시절, 세계 곳곳을 다니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운 헐버트와 베델을 소개합니다.
호머 베잘렐 헐버트(1863~1949, 한국명 ‘헐벗’)는 1886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뒤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내한하자마자 한글의 우수성에 매료되었고, 1891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하였습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의 창간을 도왔고, 영문판의 편집인이었습니다. 헐버트는 1905년에 고종 황제의 밀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호소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되어 한일 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주의를 규탄하였습니다.
이후 미국에서도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38년을 투쟁하였습니다. 1949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라는 유언에 따라 헐버트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당시 태극장)에 추서되어 대한민국의 독립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았고, 2014년에는 한글에 관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1872~1909, 한국명 ‘배설’)은 1904년 러일전쟁 직후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하여 강력한 항일 논조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를 시작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고종이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였습니다. 베델은 전국 각지의 항일 의병 활동을 연일 보도하여 한국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고종 또한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하며 베델을 지원하였습니다. 일본은 베델의 추방과 신문의 폐간을 영국에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베델은 상하이에서 3주일간의 금고형(징역)을 복역하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긴 베델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96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어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기념우표의 변지에는 두 사람의 유품 및 업적과 관련된 발간물이 실려 있습니다. 〈사민필지〉와 ‘아리랑 악보’는 헐버트의 업적과 관련된 자료입니다.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신문사 사옥에 게양한 것으로 알려진 ‘배설 유품 태극기’에서는 베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표를 감상하며 우리의 독립을 돕기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명칭 : 대한독림에 헌신한 외국인 우표(2)
※ 발행 : 2023년 8월 14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한국 독립운동을 돕고 일제에 대항했던 외국인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특히 실존 인물을 재현한 작품이 많아 당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기념우표에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대표적 인물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와 조지 루이스 쇼를 소개합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의학자이자 선교사이며, 1916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1919년 3·1운동 첫날부터 사진을 찍고 기록하여 해외에 알렸으며,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 현장에도 찾아가 일제의 만행을 보고서로 남겼습니다.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그는 틈틈이 강연과 기고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며 일제를 비판했습니다. 광복 이후에 다시 내한하여 수의병리학을 가르쳤고, 강연과 언론 기고에서 한국인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1970년 4월 12일에 서거하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조지 루이스 쇼(1880~1943)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중국 안동현(현 단둥)에서 무역업과 선박업을 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연락망 조직인 ‘연통제‘의 운영을 돕기 위해 자신의 무역선박회사 ’이륭양행‘에 교통사무국을 설치한 일이 대표적입니다.
1919년 3·1운동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돕기 시작한 그는 자신의 선박을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입출국을 지원하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활동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쇼는 안동으로 돌아간 후에도 1938년까지 계속 독립운동을 돕다가 1943년 11월 13일에 푸저우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번 기념우표에는 두 사람의 모습 및 업적과 관련된 자료를 담았습니다. 변지 좌측에는 스코필드가 3·1운동 당시 모습을 촬영한 대한문 앞 만세시위 사진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사진기로 촬영하는 모습을 담은 스코필드의 동상(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소재)이 있습니다.
우측 상단에는 쇼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1920년 8월 11일 자 동아일보 기사와 일본을 방문했던 쇼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표를 감상하며 광복절을 맞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들의 공로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명칭 : 김상옥의사 순국 100주년
※ 발행 : 2023년 1월 27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김상옥 의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군경 1천여 명과 대치했던 ‘일 대 천 서울시가 전투’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는 목숨을 던져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을 되살린 김상옥 의사의 순국 100주년입니다.
가난한 집안의 소년 노동자였던 김상옥 의사(1889-1923)는 형제들과 돈을 모아 동대문 앞 영덕철물점을 창업하여 청년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나 그는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동업조합’을 결성하여 일본 상권에 대항하였고, 1919년에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온 시간과 힘을 다했습니다.
‘혁신단’을 조직하고 비밀신문 ‘혁신공보’에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다 일경의 추적을 받은 김상옥 의사는 일제를 직접 타격할 ‘암살단’을 조직했습니다. 1920년 8월에 총독 처단, 일제 주요 기관시설 파괴 등을 계획했으나 아쉽게도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고,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였다가 그해 10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했습니다. 그곳에서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을 함께했고,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 재조직에 관여했습니다.
1922년 12월에 국내로 돌아와 다시 한번 총독 처단과 일제 주요 기관시설 파괴를 계획하고, 1923년 1월에 총독이 일본제국 의회 참석을 위해 동경으로 가는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의사와 동지들은 첫 행동으로 독립운동가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를 향해 경고의 신호탄을 쏘았습니다. 이후 일제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삼판통(현 후암동) 은신처에서 탈출하여 다시 몸을 숨겼으나, 1월 22일에 서울 효제동 은신처마저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군경 1천여 명으로 둘러싸인 4중 포위망 속에 총격을 벌이다 김상옥 의사는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라는 결심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한민족의 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은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희망과 결의를 다시 다지게 되었습니다.
기념우표에는 상해에서 찍은 김상옥 의사의 유일한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초상화와 태극기 아래 종로경찰서에 투탄한 의거 장면을 담았습니다. 성공한 사업가의 삶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준 김상옥 의사의 삶을 우표와 함께 되새겨보시길 바랍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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