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독립기념관 개관 기념우표
※ 발행 : 1987년 8월 14일
※ 인터넷우체국(K-stamp), 국가기록원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국가 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ㆍ연구ㆍ전시함으로써 국민의 투철한 민족 정신과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국민의 성금으로 세운 온 겨레의 전당이다.
독립기념관 설립은 1945년 조국 광복 후부터 제의되었으나 국내외 정세의 혼란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다가, 일본 교과서의 우리역사 왜곡 사건을 계기로 1982년 8월 28일 온 겨레의 이름으로 건립 발기 대회를 열고 성금 모금을 시작하였으며, 1983년 8월 15일 기공식을 갖고 건립공사에 착수함과 동시에 국내외에 걸친 광범위한 전시 자료 수집 운동을 폈다.
1986년 8월 4일 불의의 화재로 개관을 1년간 연기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으나,보다 완벽한 복구ㆍ보완공사를 거쳐 드디어 1987년 8월15일 준공ㆍ개관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발행되는 기념우표의 디자인은, 1종은 독립기념관의 전경과 겨레의 탑(한도룡 작)이며 다른 1종은 불굴의 한국인상(김영중 작)조각 작품과 태극기이다.
체신부에서는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독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여 이 우표를 발행한다."
일제 강점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의 땀과 노력이 있어 우리의 역사는 바뀔 수 있었습니다.
자주와 독립 정신으로 국가를 지킨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 독립기념관이 올해로 개관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1987년 8월 15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세워진 독립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국가 발전사에 관한 자료의 수집보존조사연구 활동을 해 왔으며, 전시교육을 통해 민족의 문화 정체성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뜨거운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7개의 전시관(겨레의 뿌리, 겨레의 시련, 나라 지키기, 겨레의 함성, 나라 되찾기 새나라 세우기, 함께하는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민족의 비상을 표현하는 높이 51m의 겨레의 탑, 1995년 철거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자재로 조성한 조선 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 공원, 조국의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통일 염원의 동산,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추모의 자리, 새천년 숲, 백련못 등을 마련하여 역사의 배움터이자 문 화와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조성하였습니다.
독립기념관은 개관 30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전시, 교육 행사를 진행합니다. 그동안의 성과와 발자취를 기록한 독립 기념관 30년사를 발간하고, 학생의 신분으로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이들을 주제로 한 특별전 학생, 역사의 중심에 서다를 개최합니다. 현재와 과거를 돌아보는 추억의 사진 공모전 추억 속 30년 전으로, 나 돌아갈래! 야외 사진전 국민들과 함께한 독립기념관 30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제30회 독립기념관 관람 감상문 공모 대회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2017 대학생 독립 운동 사적지 탐방 손수 제작물(UCC)공모전 독립기념관 30년 홍보 영상을 제작하라! 등의 행사를 통해 독립기념관 개관 30주년의 의미를 함께 되새겨 볼 예정입니다.
우정사업본부는 겨레의 집을 중심으로 펼쳐진 독립기념관의 전경과 한민족의 강한 의지를 표현한 조각상 불굴의 한국인상을 담아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상들의 나라 사랑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입니다. 우정사업본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가 지켜온 지난 100년을 기억하고, 현재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100년이 희망 가득한 미래로 이어지길 바라며 기념우표를 만들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불같이 일어난 3·1운동은 나라 안팎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와 독립운동가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조국 독립을 반드시 이루고자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3.1운동 직후인 4월 11일, 곳곳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 29인은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모여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역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삼권 분립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제 정부였으며, 대통령중심제를 지도체제로 채택했습니다.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선출됐으며,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에는 대한국민회의를 이끌었던 이동휘, 외무총장에 김규식, 내무총장에 안창호, 법무총장에 신규식 등을 선출해 정부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27년간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서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라고 밝혀 두었습니다. 그만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우리 민족사의 큰 전환점으로서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념적 정부로 독립운동의 통합을 시도했고, 8·15 광복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친 유일한 기구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숭고한 가치는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일제 강점기를 피해와 굴욕의 역사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 하 35년의 역사 속에도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고자 일제와 싸워 값진 승리를 거둔 기록이 존재합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운동사에서 ‘독립전쟁 제1회전’으로 불리는 최고의 전과 중 하나로 우정사업본부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의 독립군은 규모를 키우고 조직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독립군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하는 국내진공작전을 벌였습니다. 1920년 6월 4일 새벽에도 신민단 소속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하여 일본군 초소를 격파하고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로 복귀하였습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였지만, 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습니다. 이에 독립군은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일본군을 선제공격한 ‘삼둔자 전투’는 봉오동 전투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둔자 전투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 제19사단 사령부는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추격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던 독립군은 6월 7일에 두만강을 건넌 월강추격대를 길림성 왕청현 봉오골로 유인하여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독립군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의 구성은 상해판 독립신문(1920. 6. 22.)과 매일신보(1920. 6. 21.)의 기사 및 서양화가 임직순(1921~1996)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입니다.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를 통해 민족 주체성을 지키고자 치열하게 노력한 독립군을 기억하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후손임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35년의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에게 큰 승리를 안겨준 청산리 전투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정사업본부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던 청산리 전투의 전승 100주년을 기리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군은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지에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독립군은 1919년 하반기부터 국내진입작전을 펼쳤고, 1920년 들어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 단체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습니다.
그 직후에 일어난 전투가 1920년 6월 7일에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봉오동 전투입니다. 일본은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만주의 독립군을 없애기 위해 만주의 군벌에 압력을 가하는 외교적인 노력과 더불어 대규모 군사 동원을 계획하였습니다.
일본은 9월에 마적이 훈춘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는 사건을 꾸민 뒤 이를 명분 삼아 중국 땅인 만주에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독립군은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군사력을 비축하고자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연합부대’ 등으로 나뉘어 북간도를 떠나 백두산 방향으로 이동하는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백두산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던 독립군을 일본군 기병 등이 추격해 오자 독립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싸웠습니다.
그 첫 전투가 1920년 10월 21일에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싸워 승리한 백운평 전투입니다. 그리고 10월 22일,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큰 싸움이었던 어랑촌 전투에서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가 지휘하는 연합부대와 일본군을 협공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이후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연합부대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은 각자 싸우거나 함께 힘을 합하여 싸우며 엿새 동안의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이기는 쾌거를 이루었고 독립군의 기본 군사력을 비축할 수 있었습니다. 6일간 치러졌던 청산리 전투는 사실상 한국 독립운동사 최대의 승전보이자 ‘대첩(大捷)’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는 독립군의 전투정보가 실린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자)의 보도기사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했던 서양화가 김태(1931~)의 민족기록화 청산리 전투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념우표를 통해 100년 전 이맘때 울려 퍼진 일본군을 향한 독립군의 함성을 떠올리며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여기까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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